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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춘향의 선택, ‘정렬부인’인가 ‘인간 해방’인가

by 낮달2018 2019.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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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사랑 ①] 춘향과 몽룡, 고전 <춘향전>과 최인훈의 현대소설 <춘향뎐> 사이

▲ 광한루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누원(樓院)으로 근세 전기에 조영된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히고 있다.

[남원의 사랑 ] 신과 인간의 대결, 혹은 인간과 영혼의 만남

 

지난 1월 초순에, 남원을 다녀왔다. 서른몇 번째 혼인기념일이라 집을 나섰지만, 목적지가 굳이 남원일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나는 지난해 말에 확장 개통했다는 ‘광주-대구 고속도로’를 타는 여정을 떠올렸고 여러 번 스쳐 지나가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들르지 못한 도시 남원을 기억해 낸 것뿐이었다.

 

88올림픽고속도로는 광주 학살로 집권한 신군부가 광주와 대구 간 화합을 명분으로 1981년에 착공하여 1984년에 개통한 도로다. 그러나 중앙 분리대도 없는 편도 1차로에 불과한 88올림픽고속도로를 달려본 사람은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한다.

 

길만 좁은 게 아니라 길의 물매와 구부러짐도 급한 데가 많아 사고가 빈발했다. 제한속도(80㎞/h)는 이정표나 경고 표지판에만 있는 규정일 뿐 차들은 일상적으로 속도를 위반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추월 차로가 따로 없다 보니 정면충돌 사고도 잦았다. 이는 결국 88올림픽고속도로가 ‘죽음의 고속도로’라는 오명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되었다.

 

광주-대구 고속도로로 두 시간 만에 남원에 닿다

 

지난 30년 동안 88올림픽고속도로가 덮어쓴 오명과 상처는 광주 호남을 배제하면서 만들어진 신군부 권력이 행사한 시혜 시늉이 지닌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막혔던 동서를 뚫어 잇긴 했지만, 그 길은 옹색하기 짝이 없는 상호 교류의 내용과 형식을 넘지 못했다는 얘기다.

 

뒤늦었지만 이번에 이 도로는 전 구간을 4차로(편도 2차로)로 확장하고 콘크리트 중앙 분리대를 설치하면서 ‘광주-대구 고속도로’라는 새 이름으로 개통되었다. 이 길의 새 이름이 한동안 후보로 오르내렸던 ‘달빛(달구벌-빛고을)고속도로’ 대신 어정쩡한 ‘광·대고속도로’가 된 것은 아쉽다.

▲ 88올림픽고속도로는 지난해 연말 4차선으로 확장 개통하면서 광주-대구 고속도로로 바뀌었다.

2차로로 시원하게 뚫린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남원에 닿는 데는 두 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평일이긴 했지만 넓어진 길에 차량 통행마저 뜸했으니, 편안하게 가속기를 밟을 수 있었다. 확장 개통 후 두 지역 간 관광객이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은 것은 그 얼마 뒤다.

 

춘향의 고장 남원, 광한루원

 

남원(南原)은 전라북도의 조그만 도시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이름에 담긴 이야기가 예사롭지 않은 고을이다. 남원은 판소리계소설 <춘향전>의 고향이고, 이 나라 사람치고 ‘춘향’과 그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얻은 정보로 갈치 정식으로 유명한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들른 데가 광한루원(廣寒樓苑)이다. 외지 사람들이야 그저 ‘광한루’로만 알고 있지만 기실 광한루는 명승 33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누원(樓院)인 광한루원을 구성하고 있는 중심 누각이다.

▲ 광한루는 처음엔 '광통루'라 부르다가 세종 때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광한루가 되었다.

조선 태조 때 황희가 남원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이 누각은 처음엔 ‘광통루(廣通樓)’라 부르다가 세종 16년(1434년) 정인지가 고쳐 세운 뒤 "월궁(月宮)의 광한 청허부(廣寒淸虛府)와 흡사하다"하여 광한루가 되었다. 지금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인조 16년(1638년) 다시 지은 것인데 이 누각에서 <춘향전>의 두 연인이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남원 부사 이한림의 자제 이몽룡이 방자에게 “이곳 경처(景處) 어디메냐?”고 물어 “전라도 오십삼관 중에 남원이라 하는 고을 광한루라 하는 곳이 놀음직하”다는 답을 듣고 행장을 차려 광한루에 나오면서 시작된다.

 

이몽룡은 광한루에서 ‘저 건너 화류(花柳) 간(間)에 아른아른하는’, 그네 뛰던 춘향을 운명처럼 만났고, 이들의 사랑은 이후 폭풍처럼 치닫게 된 것이다. 누각엔 오를 수 없으니 춘향이 ‘물명주 속곳 가랭이 동남풍에 펄렁펄렁, 박속 같은 네 살결이 백운 간에 힛득힛득’했다는 ‘저 건너 화류 간’이 어디쯤인지 요량하는 일은 쉽지 않다.

▲ 광한루는 본루가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누마루 집인데 익루와 월랑(다락)까지 포함하면 대단한 규모다.
▲ 광한루의 앞뒤에는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 계관(桂觀), 광한루(廣寒樓)'란 편액이 걸려 있다.

춘향과 이몽룡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저마다 이 연인들의 사랑을 꿰고 있지만 정작 고전소설 <춘향전>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유아용 그림책에서부터 초등학교에선 동화 형식, 중고등학교에선 고어 또는 현대어로 푼 원전 일부를 배우긴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을 읽은 사람은 드문 것이다.

 

춘향의 선택, ‘신분 상승’인가, ‘인간 해방’인가

 

그래서 <춘향전>은 의심 없이 ‘여인의 정절’, ‘열녀의 교훈’을 가르치는 소설 작품으로 간주된다. 소설의 줄거리야 단순하다. 천민 춘향이 정렬부인(貞烈夫人)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스토리 라인은 그녀가 일부종사(一夫從事)한 데 대한 보상이니 <춘향전>은 소설 일반의 인과율을 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춘향전>의 디테일로 들어가면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주제인 유교 덕목인 ‘열(烈)’로 작품을 한정하는 게 온당치 않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춘향전>이 중세의 가치관인 ‘여성의 정절’을 내세우고 있는 듯하지만, 그 속내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얘기다.

 

춘향이 변학도의 수청 요구를 거절하고 몽룡과의 약속을 지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난 ‘인간 해방’의 사상이다. ‘천한 기생무리에게 충렬이자(忠烈二字) 왜 있’냐고 으르는 변학도에게 ‘충효열녀(忠孝烈女) 상하 있’냐는 춘향의 반박은 한 여인의 당당한 ‘인간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춘향은 수청을 거부하면서 ‘관장(官長)을 거역하고 조롱하는 죄’ 운운하는 변학도에게 ‘유부녀 겁탈하는 것은 죄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그녀는 또 모진 매를 맞으면서 ‘십장가(十杖歌)’를 통해 관장의 구실을 환기하고 되묻는다.

 

“팔자 좋은 춘향 몸이 팔도 방백 수령 중에 제일 명관(明官) 만났구나. 팔도 방백 수령님네 치민(治民) 하러 내려왔지 악형(惡刑) 하러 내려왔소.”
     - <열녀춘향수절가> 중에서

 

부당하고 불의한 지방 수령의 요구를 거부하고 이에 항거하는 춘향의 모습은 당대 사회와 신분 질서에 저항하는 민중을 대변한다. 이전 시대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지배층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만큼 세상은 달라졌고 그러한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도 새로워졌다.

 

이처럼 <춘향전>은 ‘열(烈)’이라는 당대의 윤리 도덕을 답습하면서도 ‘인간 해방’과 ‘불의한 지배층에 대한 서민의 항거’라는 대립하는 주제를 드러낸다. 전자가 당대의 성리학적 질서를 수용한 것이라면 후자는 근대로 이행하고 있는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를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춘향전>의 작가들(이른바 유동적층 문학인 판소리계 소설의 작가는 개인이 아니다.)은 춘향의 ‘정절’을 말하기 위해 후자의 서사를 들인 것일까. 아니면 인간해방과 불의한 지배층에 대한 저항을 말하기 위해서 춘향의 ‘열녀’로 만드는 타협을 한 것일까.

▲ 광한루원의 호수 안 섬에 있는 누각인 영주각. 정철이 주도한 광한루 확장 공사 때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 오작교는 누 오른쪽에 있는 연못에 있는 돌다리다. 견우와 직녀의 안타까운 천상의 사랑을 상징하는 다리다.

광한루 앞으로 영주(한라산), 봉래(금강산), 방장(지리산)을 뜻하는 삼신산(三神山)이 있는 연못이 펼쳐지는데 누 오른쪽의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오작교(烏鵲橋)다. 해마다 칠월칠석에 견우·직녀가 만난다는 안타까운 천상의 사랑을 춘향과 몽룡의 사랑으로 빗댄 ‘사랑의 다리’다.

 

오작교는 선조 15년(1582)에 부사 장의국과 관찰사 송강(松江) 정철이 광한루를 고쳐 짓고 하천을 넓혀서 호수로 만들면서 축조한 다리다. 이 다리는 길이 57m, 폭 2.4m, 4개의 홍예(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존하는 연지교(蓮池橋)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다리 이름이 오작교가 된 것은 신성한 ‘월궁(月宮)’인 광한루원의 연못은 ‘은하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최인훈의 <춘향뎐>, 원전의 서사를 극적으로 뒤집다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1년에 딱 한 번 안타까운 상봉을 하는 반면, <춘향전>에서 몽룡은 암행어사 출도로 위기의 춘향을 구해낸다. 춘향이 정렬부인이 되는 것은 당대의 도덕률을 지킨 데 대한 보상이다. 변학도의 야유가 아니더라도 천민 춘향이 굳이 수절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충효열녀에 상하가 있지 않다’며 ‘열녀 불경 이부’의 절(節)을 따랐다. 이는 앞서 밝혔듯 신분의 제약을 넘고자 한 그녀 자신의 인간 선언이었다.

 

그러나 춘향의 신분 상승을 주목하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즉 열녀의식이라는 주제를 춘향의 목적인 신분 상승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경우다. 신분 사회에서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을 불순한 것으로 볼 순 없겠지만, 나는 춘향의 저항을 신분 상승의 그것보다는 사랑의 동기로 이해하고 싶다.

▲춘향관에 전시하고 있는 목판본 한글 춘향전. 춘향전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개작 단편소설 <춘향뎐>을 통해 <춘향전>에 드러난 ‘사랑의 문제’를 탐구하고자 한 이가 작가 최인훈(1936~2018)이다. 그는 <춘향뎐>에서 주인공이 보유하고 있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힘을 박탈해 버린다. 즉 위기에 처한 춘향을 구하러 남원으로 온 낭군은 암행어사가 아니라 역모 혐의를 받아 집안이 몰락해 버린 이름뿐인 양반 몽룡인 것이다.

 

작가는 몽룡을 권력과 힘을 가진 연인의 위치에서 무력한 일상적 인간의 자리로 끌어내린다. 출두할 암행어사도, 정렬부인이 되는 춘향도 없다. 도덕 준수에 대한 반대급부를 제거하고 난 후에 작가는 두 연인의 앞길을 주목하려고 한 것이다. 원전의 서사를 극적으로 뒤집고 있는 이 소설은 춘향의 실존을 담담히 기술하며 시작된다.

 

“춘향은 가장 어두운 중세의 밤을 보낸 여자다. 구월 하순 남원의 그 밤에 달이 없었다는 뜻에서만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도 이 밤처럼 캄캄하였다.”
     - 최인훈, <춘향뎐> 중에서

 

가장 어두운 ‘중세의 밤’을 보낸 여자, 춘향

▲ 춘향관에 전시된 유화 9폭의 춘향 일대기 그림 가운데 하나. 박남재 화백의 그림이다.

마침내 암행어사가 출도하여 변학도는 봉고파직이 되고 무죄한 춘향은 풀려난다. 물론 어사또는 이몽룡일 수 없다. 그러나 동헌에 좌정하여 끌려 나온 춘향을 넌지시 떠보는 어사또의 제의는 사실이었다. 어사또는 열녀를 맞아 부귀영화를 같이하고 싶다며 춘향을 소실로 원했던 것이다.

 

“너만 한 년이 수절한다 하고 관장에게 포악하였으니 살기를 바랄쏘냐? 죽어 마땅하건만 나의 수청도 거역할까?”
     - <열녀춘향수절가> 중에서

 

설상가상으로 월매가 어사의 뜻을 받들고자 하면서 두 사람이 맞은 ‘캄캄한 밤’은 더욱 어두워진다. 그것은 춘향에게 있어선 ‘기다릴 이몽룡도 없고 믿을 모친도 없’는 그런 어둠이다. 결국, 이 불행한 연인들은 사랑의 파국을 피해 잠적해 버리는데 이는 딸을 팔아 부귀를 노리던 월매의 입장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연놈은 야반도주를 하였던 것이다.”
   - 최인훈, <춘향뎐> 중에서

 

이후 두 연인의 이야기는 마치 풍문처럼 전해진다. 지리산에서 산삼을 캐며 살아온 한 노인이 깊은 산중에서 발견한 인가, 그리고 거기 사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아름다’운 아낙네와 그 지아비, 그리고 어린 사내아이. 작가는 끝까지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그들이 야반도주 이후의 두 사람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노인은 하룻밤 묵어갈 것을 허락받고 밤늦도록 주인 남정네와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든다. 밤중에 소피를 보러 나왔다가 노인이 엿들은 주인 내외의 대화는 이제 완전히 시정(市井)의 평범한 부부로 돌아온 두 연인의 모습을 직접 드러내 준다.

 

“씨팔놈의 세상 일 알아서 뭐할랍디여?”
그러자 웅얼웅얼하는 남정네의 목소리.
“오매 속 뒤집는 소리 마씨오잉. 효도에도 양반 상놈 있습디여?”
      - 최인훈, <춘향뎐> 중에서

▲ 1917년에 간행된 현토(토를 단) 한문 춘향전.

 

시정의 뭇 내외와 하등 다르지 않는 이 일가의 풍경은 결국 원전의 열녀와 암행어사에서 일상적 인간으로 귀환한 연인들의 소박한 모습이다. 어떤가, 작가가 원전을 비틂으로써 확인하고자 했던 ‘비극의 보다 진실한 모습’이 떠오르는가.

 

춘향이 맞닥뜨려야 했던 ‘가장 어두운 중세의 밤’, 그 함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그녀가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전근대적 신분제에서 비롯한 권력의 압제,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방해받는 사랑이었다. 부귀영화가 아니라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춘향의 선택은 산중에 은거하는 일상의 삶으로 이어졌다. 마침내 이들의 사랑은 완성된 것일까.

 

그러나 ‘어사 출도’와 ‘정렬부인’으로 상징되는 원전의 영향력은 이미 압도적이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우리는 암행어사의 출현으로 연출되는 반전과 이어지는 춘향의 신분 상승이라는 화소(話素)에 이미 깊숙이 빠져 있는 것이다.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서화류, 장신구, 서책 등이 전시된 춘향관에서 유화 9폭의 ‘춘향 일대기’를 바라보면서 나는 <춘향뎐>의 줄거리를 뭉뚱그려 이야기해 준 뒤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내는 심드렁하게 그러나 핀잔을 주듯 되받았다.

 

“어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당신 같으면 어느 쪽이야?”
“그걸 질문이라고 하우? 똑같이 사랑을 지키는 일인데 왜 그 헐벗은 삶을 골라?”
“헐벗었다고? 산속의 삶도 고즈넉하고 평화롭지 않나?”
“평화 좋아하시네. 난 싫어. 어쩌다 주말에 들르는 별장이라면 몰라도.”

 

광한루원을 한 바퀴 돌아나왔다. 누원의 정문에 걸린 현판은 ‘청허부(淸虛府)’였다. 그렇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원은 지상에 건설한 작은 우주, 옥황상제가 사는 달나라 서울인 광한 청허부의 상징인 것이다. 정문을 나섬으로써 우리는 아주 간단히 월궁으로부터 지상으로 귀환했다.

 

 

2016. 3. 16. 낮달

 

[남원의 사랑 ②] 매월당 김시습의 애정 판타지 「만복사저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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