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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의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 일본’, 그리고 요시다 쇼인

by 낮달2018 2019.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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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 아베 신조가 ‘정신적 지주’로 섬기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

▲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강변하고 있다. ⓒ SBS

일본 내각과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마침내 '백색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함으로써 ‘경제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세계 시장의 우려와 한국의 조치 철회 요구를 모르쇠하면서 그는 예정된 드라이브를 이어가고 있다. 그와 내각 강경파들은 비약적으로 성장한 한국 산업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면서 한국의 정치적 굴복을 받아내겠다는 의도를 노골화한 것이다.

 

아베의 정치적 목표,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 일본’

 

참의원 선거를 겨냥했든, 개헌을 겨냥했든 아베의 의도는 하나로 귀결된다. 일본 최장수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 일본’을 만드는 게 아베의 정치적 목표다. 군사적으로 집단 자위권을 추진하는 그의 정치관에서 과거사 인식 문제는 당연히 설 자리가 없다.

 

1978년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의 합사 이후에 일왕 히로히토조차 참배를 중단한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아베는 공공연히 여러 차례 공물을 바치고 참배한다. 그는 1차 아베 내각 (2006~2007) 시절,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못한 것에 대해 ‘통한의 극치’라고 밝힐 만큼 야스쿠니신사에 집착했다.

▲ 도쿄의 야스쿠니신사. 이 신사에 대한 집착은 아베 신조의 제국주의적 역사관과 정치적 멘탈리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야스쿠니신사는 그의 제국주의적 역사관과 정치적 멘탈리티를 뭉뚱그리고 있는 상징처럼 보인다. 야스쿠니신사는 전사자를 위령해 현창(顯彰)하고 신으로 승격한 조슈 번(長州藩 : 현 야마구치현)의 신토(神道) 행사를 중앙에 옮긴 것이다.

 

그리고 그 조슈 번에는 아베가 정신적 지주로 섬기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있다. 쇼인은 조슈현 출신으로 근·현대적 의미의 일본 우익 사상의 창시자이면서 현대 일본의 정·재계를 장악하고 있는 조슈벌(長州閥)의 아버지다.

 

요시다의 본명은 노리카타(矩方), 쇼인은 아호다.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숙부의 양자로 자랐다. 에도(江戶)에서 사상사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에게 서양 학문을 배웠는데, 미국의 페리(Perry)가 흑선(黑船)으로 일본에 상륙하여 개국을 요구한 것을 계기로 도쿠가와 바쿠(幕府)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존왕양이'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 일본 우익의 창시자 요시다 쇼인의 동상. 쇼카손주쿠 안 요시다 쇼인 신사에 있다.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 양성

▲요시다 쇼인이 연 사설 학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일본은 2015년 세계유산 안에 이를 슬그머니 끼워넣었다.

쇼인은 숙부 다마키 분노신(玉木文之進)이 설립한 야마구치현의 사설 학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인수하여 1857년 자택에서 쇼카손주쿠의 숙장(塾長)으로 취임하였다. 쇼카순주쿠는 2년도 되지 않아 폐쇄되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존왕양이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이후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다. 조선총독부의 첫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도,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도 쇼인의 조슈(長州) 인맥이다. 또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한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의 주역인 가쓰라 다로(桂太郎)도 마찬가지다.

▲ 조슈의 인맥들. 왼쪽부터 3인은 조선 통감과 총독을 지냈고, 가쓰라 다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이었다.

1858년, 쇼인은 존왕양이를 주창하다 바쿠(幕府)의 고관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고, 이듬해인 안세이(安政) 6년 사형을 선고받고 참수되었다. 그의 시체는 벌거벗겨져 나무통에 넣어진 채로 아무렇게나 매장되었으나, 후에 격분한 제자들이 바쿠에서 시체를 빼앗고 예를 갖추어 이장했다.

 

요시다 쇼인은 존왕양이를 위해서라면 직접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행동파였다. 그는 죽음이 임박해서도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일본혼)’를 외쳤다고 한다. 저서에 『맹자(孟子)』를 실천적으로 해석한 『강맹차기(講孟箚記)』가 있다.

 

쇼인은 서른 나이에 처형되었지만, 신념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행동주의자의 면모와,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과 ‘존왕양이론’만으로도 일본 근대 우익의 비조로 기려지는 데 모자람이 없다. 그는 또 이른바 ‘메이지(明治) 일본’의 설계자였다.

 

쇼인은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 등을 주창해 일본 제국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에 이어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을 주도했다. 요시다 쇼인은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천황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한 존왕양이론자였다.

▲ 복합공간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안에 있는 요시다 쇼인 신사.

에도(江戶) 시대 말기 바쿠(幕府)를 타도하고 외세를 배격하고자 한, 요시다 쇼인의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정치적 주장으로 이용된 것이 정한론(征韓論)이다. 정한론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이 제기한 ‘조선을 무력으로 정벌한다’는 침략적 팽창론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시발점, '정한론'

 

단순한 침략 전쟁에 대한 논의 같지만, 이 주장에는 무력 침공으로 조선의 자원을 약탈하여 일본의 국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메이지 유신에 대한 국내 반발 세력을 무마하여 일본 국내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정한론이 대두된 것은,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하여 일본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책이나 성장의 방법으로서였다. 초기 정한론에 반대하던 이들 또한 근대화가 일정하게 진행된 이후에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고려, 진행하였으니 정한론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쇼인은 죽었지만, 그가 설계하고 그의 문하들이 만들어낸 메이지 일본이 20세기 제국주의 일본의 바탕이 되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의 우익들이 요시다 쇼인을 신격화하는 이유다. 평화헌법 이전의 군사 강국 일본을 그리워하는 아베 역시, 쇼인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고백한다. [관련 글 : 일본의 과거’ ‘소환’-새 지폐 도안인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선정]

 

일본의 우익단체 중에는 그의 이름과 쇼카손주쿠의 ‘쇼(松)’자를 따서 그를 기리는 쇼콘주쿠(松魂塾)라는 학당으로 그의 학맥이 계승되리만큼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쇼카손주쿠 안에는 요시다를 모신 신사(神社)가 세워져 성역화되어 있다.

 

‘정한론 산실’인 쇼인의 사설학당도 세계 유산 등재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이루어진 것은 2015년이다. 일본이 등재 신청한 규슈(九州)와 야마구치(山口)현에 있는 중화학 산업시설 23곳 가운데 최소 7곳은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가 발생한 곳, 한국 정부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환기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반대했다. [관련 글 :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한 대법원 배상 판결과 메이지(明治)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그러나 등재는 성서됐고, 이 과정에서 외교부는 ‘조선인 강제 노역’ 사실을 포함하게 한 점을 ‘성과’라 밝혔다. 뒤에 조선인의 ‘강제 노역’ 사실은 ‘등재 결정문’이나 ‘주석(foot note)’에 ‘직접 표현’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실제로 ‘강제 노역’은 ‘주석의 레퍼런스(reference, 참고)’에 일본 측 발언 형식으로 반영된 것에 그쳤다.

 

더구나 이는 곧 아베 신조 총리의 자부심에 가득 찬 메시지 발표, 외무상의 ‘강제노동’을 부정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등재에 줄곧 반대하다 ‘강제 노역’ 사실은 등재과정에 포함하게 하였다고 자랑한 외교부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이었다.

 

그러나 더 민망한 일은 하나 더 있었다. 외교부의 자화자찬에 가려져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한론(征韓論)’의 산실이었던 야마구치현의 사설 학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게 알려진 것이다. 일본이 근대 우익의 비조인 요시다 쇼인이 세웠던 쇼카손주쿠를 세계유산으로 슬그머니 끼워 넣은 것은 과거에 저지른 침략의 역사를 왜곡해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냐고 분석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패전 74년, 일본이 과거를 ‘소환’하면서도 전쟁 범죄를 ‘부정’하는 이유

 

야마구치현 출신의 아베 신조는 요시다 쇼인의 숭배자고, 쇼인의 학당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길러냈다. 아베의 고조부인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는 쇼인의 문하로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 일본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조선 정부 내각을 강제로 친일내각으로 개편하였는데 청나라가 이를 인정하지 않아 뒤에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쇼인의 조슈 인맥은 20세기 이후 한반도 침략에 주역으로 대거 등장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하여 조선 총독 데라우치와 하세가와, 그리고 가쓰라 다로가 그들이다. 2014년 1월 요시다 쇼인의 신사에 참배한 아베는 그들을 낳은 영웅의 시대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2019년, 전후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베의 사고는 요시다 쇼인의 시대에 머물고 있는지 모른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돌이다. 우리는 국권을 빼앗겼던 근대사를 되돌아보며 일본 제국주의가 짓밟은 역사를 성찰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피해 배상 소송에서 우리 대법원이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면서 시작된 갈등은 결국, 아베 정부의 경제보복으로 이어진 것이다.

 

160년 전에 죽은 요시다 쇼인의 망령이 여전히 일본열도를 떠도는 가운데, 아베는 일제가 저지른 끔찍한 전쟁범죄를 부정하면서 정당한 배상 요구에 ‘적반하장’으로 맞선 것이다. 싸움의 승패가 아베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또, 이 싸움으로 아베의 일본이 아무리 부정하고자 하더라도 역사적 진실마저 지울 수 없다는 걸 명백히 증명해 줄 것이다.

 

 

2019. 8.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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