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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거’ ‘소환’-새 지폐 도안인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선정

by 낮달2018 2019.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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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새 1만 엔권의 도안 인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선정

▲ 일본 재무성이공개한 새 1만 엔권지폐의 견본 ⓒ 연합뉴스

일본이 새 1만 엔권의 새 도안 인물로 제일국립은행(국립의 의미는 국법에 따라 설립되었다는 것으로 실제 민간은행)과 도쿄증권거래소 등 500여 개 기업을 설립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1840~1931)를 선정했다고 한다. 현행 1만 엔권의 주인공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

 

후쿠자와도 갑신정변의 주역을 지원하는 등 한국과 만만찮은 인연이 있었지만, 시부사와는 그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시부사와는 1878년에 부산에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은행) 지점을 설립하고 이후 금융과 화폐 분야에서 일본 정부를 대리해 조선에서 여러 가지 특권을 확보했다.

 

1901년 대한제국은 금본위제도 채택과 외국 돈의 유통 금지를 골자로 하는 자주적 화폐 조례를 공포했다. 그런데도 조선에 진출해 있던 제일은행은 대한제국 정부에 통용이 금지될 일본 은화 대신 한국에서 사용할 돈을 찍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대한제국은 이를 거부했으나 시부사와는 일본 대장성(大蔵省)으로부터 사실상 은행권인 어음의 발행 허가를 받아 1902년 조선에서 최초의 은행권 지폐인 제일은행권 3(1·5·10원권)을 발행했다. 조선에서 일본 엔화와 등가로 통용된 이 은행권의 주인공은 시부사와 자신이었다. 비록 조선정부가 발행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 최초의 지폐에 일본인이 도안 인물이 된 연유다.

 

이 제일은행권이 유통되자 일본에 맞서 청나라 상인들도 비슷한 어음을 시장에 내놓았고, 이는 곧 대한제국의 신용경제를 흔들어댔다.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대한제국 정부는 제일은행권과 청나라 어음의 유통금지령을 내렸지만, 군함 3척을 동원한 일본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은행권이 강제로 준() 법정화폐의 지위를 차지했음에도 막상 그 사용량이 크게 늘지 않은 것은 민간의 저항 덕분이었다. 보부상 단체와 인천지역 등에서 강력한 제일은행권 배격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대한제국이 적어도 러일전쟁 이전까지 화폐 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한편 시부사와는 1898년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경부선 부설권을 획득한 뒤 철도 공사 시작을 앞두고 경부선의 궤간 선정에 관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 인물이다. 일본 군부는 일본과 같이 협궤(狹軌)로 건설하자고 주장했지만, 당시 경부철도주식회사 사장이었던 시부사와는 표준궤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대륙진출을 위해서는 중국과 유럽이 쓰고 있는 표준궤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군부는 중국 침략의 교두보인 조선의 궤간(軌間)이 중국과 달라서는 안 된다는 시부사와 주장을 받아들여 경부선이 표준궤로 건설되었다. 그는 사업가였지만, 기실 일본 제국주의의 확장에 이바지한, 정치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시부사와를 최고액권 지폐의 도안 인물로 선정하겠다는 아베 정부의 의도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일본 정부가 과거 한반도 침략의 역사를 대변하는 인물인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새 1만 엔권 지폐 도안 인물로 선정하려는 것은 과거사를 부정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역사 수정주의가 반영됐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2015, 일본이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정한론(征韓論)’ 산실도 세계유산에 끼워 넣은 것도 같이 이유에서다. 일본은 여전히 퇴행적으로 과거를 끊임없이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2019. 4. 11.

 

일본, ‘정한론산실도 세계유산에 끼워 넣었다

▲ 요시다 쇼인이 연 사설 학당 쇼카손주쿠. 일본은 이번 세계유산 안에 이를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

한국의 반대 등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가 성과로 자랑한 강제 노역사실은 등재 결정문이나 주석(foot note))’직접 표현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주석의 참고에 반영된 강제 노역

 

일제가 조선인에게 강요한 강제 노역이 고작 주석의 레퍼런스(reference, 참고)’에 일본 측 발언 형식으로 반영된 것이니 그걸 외교적 승리라 부르기엔 민망한 노릇이다. 더구나 이 사실이 곧 일본 총리의 자부심에 가득 찬 메시지 발표, 외무상이 강제노동을 부정하는 태도로 이어졌으니 뒤통수를 맞았다는 표현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더 민망한 일은 따로 있었다. 외교부의 자화자찬에 가려져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은 가운데 정한론(征韓論)’의 산실이었던 야마구치현의 사설 학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게 그것이다.

 

쇼카손주쿠는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정한론과 대동아공영론 등을 주창해 일본 제국주의에 영향을 미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는데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에 이어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을 주도했다.

 

정한론은 1868년 메이지 유신 때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등이 제기한 조선을 무력으로 정벌한다는 침략적 팽창론이다. 단순한 침략 전쟁에 대한 논의 같지만, 이 주장에는 무력 침공으로 조선의 자원을 약탈하여 일본의 국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메이지 유신에 대한 국내 반발 세력을 무마하여 일본 국내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정한론은 일본 에도(江戶) 시대 말기 막부(幕府)를 타도하고 외세를 배격하고자 한, 요시다 쇼인의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의 정치적 주장으로도 이용되었다. 요시다 쇼인은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 천황 아래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을 주창한 존왕양이론자였다.

 

▲ '정한론'을 주창한 사이고 다카모리

정한론이 대두된 것은,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하여 일본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책이나 성장의 방법으로서였다.

 

초기 정한론에 반대하던 이들 또한 근대화가 일정하게 진행된 이후에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고려, 진행하였으니 정한론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시다 쇼인(1830~1859)의 본명은 노리카타(矩方), 쇼인은 아호다. 일본 조슈(長州)[현 야마구치(山口)] 출생이며, 근현대적 의미의 일본 우익 사상의 창시자이면서 현대 일본의 정재계를 장악하고 있는 조슈벌(長州閥)의 아버지다.

 

그는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숙부의 양자로 자랐다. 에도(江戸, 도쿄)에서 사상사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에게 서양 학문을 배웠는데, 미국의 페리(Perry)가 흑선(黑船)으로 일본에 상륙하여 개국을 요구한 것을 계기로 도쿠가와 막부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존왕양이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숙부 분노 신(玉木文之進)이 설립한 쇼카손주쿠를 인수하여 1857년 자택에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의 숙장(塾長)으로 취임하였다. 쇼카손주쿠는 2년도 되지 않아 폐쇄되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존왕양이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이후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게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총독부의 첫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도 쇼인의 조슈(長州) 인맥이다. 또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한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의 주역인 가쓰라 다로(桂太郎)도 마찬가지다

▲ 조슈의 인맥들. 왼쪽부터 3인은 조선 통감과 총독을 역임했고 가쓰라 다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주인공이다.

1858, 쇼인은 존왕양이를 주창하다 바쿠(幕府)의 고관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고, 이듬해인 안세이(安政) 6년 사형을 선고받고 참수되었다. 그의 시체는 벌거벗겨져 나무통에 넣어진 채로 아무렇게나 매장되었으나, 후에 격분한 제자들이 바쿠에서 시체를 빼앗고 예를 갖추어 이장했다.

 

요시다 쇼인은 존왕양이를 위해서라면 직접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던 행동파였다. 그는 죽음이 임박해서도 야마토 다마시(大和魂·일본혼)’를 외쳤다고 한다. 저서에 <맹자(孟子)>를 실천적으로 해석한 <강맹차기(講孟箚記>가 있다.

 

쇼인은 서른 나이에 처형되었지만, 신념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행동주의자의 면모와,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존왕양이론만으로도 일본 근대 우익의 비조(鼻祖)로 기려지는 데 모자람이 없다.

 

아베뿐 아니라, 일본의 우익단체 중에는 그의 이름과 쇼카손주쿠의 ()’자를 따서 그를 기리는 쇼콘주쿠(松魂塾)라는 학당으로 그의 학맥이 계승되리만큼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쇼카손주쿠 안에는 요시다를 모신 신사(神社)가 세워져 성역화되어 있다.

▲ 복합공간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안에 있는 요시다 쇼인 신사.

쇼카손주쿠 등재는 역사 왜곡군국주의 회귀’?

 

일본이 근대 우익의 비조인 요시다 쇼인이 세웠던 쇼카손주쿠를 세계유산으로 슬그머니 끼워 넣은 것은 일본 정부가 과거에 저지른 침략의 역사를 왜곡해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냐고 분석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도 이번 세계유산위원회 과정에서 정부는 쇼카손주쿠를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외교부 대변인이 쇼카손주쿠를 처음 언급한 것은 세계유산 등재가 결정되고 난 뒤에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였다는 것이다.

 

외교부 대변인은 “(쇼카손주쿠를) 설립한 요시다 쇼인이 메이지 유신의 이론적 뒷받침을 한 인물이고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유신과 제국주의의 주도세력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고 답하였으니 우리 정부가 이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정부는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에 대한 강제 노역 표기에 대한 부분은 합의했지만, 쇼카손주쿠에 대해서는 일본 측의 해명을 전혀 듣지 못한 채 이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동의했다. 외교부에서는 국제사회에 이해와 공감을 얻는다는 측면에서 (쇼카손주쿠는) 유산 문제로 대응하기보다 다른 차원으로 검토하는 것이 낫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도종환 의원에 따르면 국회에서 이와 관련한 문제를 충분히 환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쇼카손주쿠와 관련한 의견을 일본 측에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이 신청한 대로 산업혁명 유산은 쇼카손주쿠를 포함하여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버린 것이다.

 

패전 70, 일본은 왜 과거를 소환하나

 

야마구치현 출신의 아베 신조는 요시다 쇼인의 숭배자고, 쇼인의 학당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을 길러냈다. 쇼인의 조슈 인맥은 20세기 이후 한반도 침략에 주역으로 대거 등장한다. 아베는 20141월 요시다 쇼인의 신사에 참배했다.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불문가지다. [관련 글 : 아베 신조의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 일본’, 그리고 요시다 쇼인]

 

올해는 해방 70년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국권을 빼앗겼던 근대사는 희미해져 가는데, 정작 그 식민지 종주국은 목하 그 과거를 새롭게 소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침략과 억압의 역사에다 문화유산의 포장을 덧칠하고 있다. 일본은 노회한 프론데 우리 정부는 마치 순진한 아마추어 같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2015. 7.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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