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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 ‘문명 : 야만’을 넘어서

by 낮달2018 2019.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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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고기 -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KARA) 의 개 식용 반대 버스 광고 ⓒ KARA

지난 주말 <한겨레> ‘토요판’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10면과 11면에 걸친 이 특집의 제목은 동네 개들, 오피니언 리더에게 묻다 다. 평균적인 한국인이라면 이 기사가 무얼 다루었는지는 물을 필요가 없겠다. 맞다. 제목이야 다분히 점잔을 뺐지만, 내용은 아주 단순한 질문, ‘개고기 먹나, 안 먹나?’와 ‘개고기 관련 법제화’에 대한 의견이다.

 

애당초 이 특집은 대선 주자들의 ‘개고기 정책’을 묻기 위해 기획되었지만, 이들이 대부분 의견을 밝히는 데 난색을 보이자, ‘꿩 대신 닭’에게 의견을 물은 것이다. 설문에 답한 이는 모두 아홉, 소설가(이경자), 대학교수(조국·진중권·박노자, 김두식), 야구인(김시진), 종교인(김인국), 희극인(김원효), 잡지발행인(김규항) 등이다. 박노자는 귀화한 러시아인이니 ‘오피니언 리더’의 표본으로는 썩 괜찮은 조합이다.

 

<한겨레> 토요판 특집 ‘동네 개들…’

 

질문은 단순하지만, 편집자가 밝힌 대로 ‘개고기는 인본주의와 탈인본주의, 민족주의와 보편주의 등 특수와 보편이 충돌하는 지점’이고 ‘논리로만 풀리는 문제도 아니’다. 자리에 누워서 설렁설렁 기사를 읽으면서 내 의견은 어디쯤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 개고기 관련 연표 ⓒ <한겨레>

나는 어릴 적부터 개고기를 먹으며 자랐다. 따로 절에 가는 어른도 없는 전형적인 유교 가정이어서 그걸 꺼릴 만한 어떤 이유도 없었다. 우리는 주로 여름에 개장으로 끓여 먹었다. 개장국 속에 든 살코기의 섬유질과 아버지께서 마당에서 그을린 껍데기의 오돌오돌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개고기도 일상적으로 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선 주로 할머니나 아버지의 떨어진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개고기를 먹었다. 소는 농가의 재산으로 함부로 잡아먹을 수 있는 가축이 아니었고, 돼지나 닭은 그보다 수월했지만 역시 일상적으로 먹을 수 있는 고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고기는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골 사람들의 영양과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개고기를 여러 가지 양념, 채소와 함께 고아 끓인 국’을 개장국(-醬-)이라 했는데, 개고기 대신 쓴 것은 ‘육개장’, 닭고기를 쓴 것은 ‘닭개장’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이다.

 

집에선 늘 개를 기른 건 아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 꽤 덩치가 큰 누렁이를 길렀다. 요즘처럼 집안에 들여서 기르는 ‘반려견’은 물론 아니어서 녀석은 한데서 밥찌꺼기나 얻어먹고 살았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가축들을 만지고 하는 걸 꺼려서 녀석을 멀찍이 바라보기만 했다. 기억에 없지만 아마 그 개는 집에서 잡아먹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개장국으로 녀석을 먹었을 것이다.

 

“즐기진 않지만 먹는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집에서 기른 조그만 잡종 개 한 마리에 대한 기억은 꽤 선명하다. 이 녀석은 어디선가 극약을 잘못 먹고 헐떡거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힘겹게 헐떡이고 있는 녀석을 바라볼 수만 없어서 아버지의 충고를 따라 비눗물을 만들어 입을 벌리고 그걸 떠먹여 주었지만 결국 녀석은 뱃속의 것을 게워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아마 그게 내 삶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아닌 짐승에게 느낀 연민의 전부가 아닌가 싶다. 죽어가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그냥 바라볼 수 없었던 게 내가 느꼈던 ‘동물 사랑’의 전부였던 것 같다. 그날 저녁 밥상에 개장국이 올랐는데,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잡념을 떨치듯 그걸 먹다가 언짢아서 이내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 식용파들. 왼쪽부터 이경자, 조국, 김인국, 김원효. ⓒ <한겨레>수록 사진 편집

나는 개고기를 잘 먹는 편이다. 그러나 그걸 ‘맛있다’고 여기긴 하지만 일부러 찾아다니면서까지 그걸 즐기는 편은 아니다. 가끔은 맑고 담백한 ‘개장국’(나는 ‘개장국’을 ‘보신탕’으로 부르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승만이 명명했다는 ‘보신탕’이라는 이름은 타인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지은 ‘숨김’의 이름이기 때문이다.)을 한 그릇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일부러 그걸 먹으러 길을 나서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른바 ‘보신탕’ 붐이 있던 1980년대 중반에 교직에 몸을 담았다. 1988년 3월에 고향 인근으로 학교를 옮겼는데 올림픽을 앞두고 읍 지역에도 보신탕집의 영업 제한이 시작되었다. 문전성시를 이루던 보신탕집 하나는 시가지를 벗어난 면 지역으로 옮아갔다고 했다.

 

그때, 개고기를 먹는 즐거움을 빼앗긴 이들 가운데 유독 기억나는 이는 지역의 천주교 수도원의 신부와 수사들이다. 특히 지역 본당 주임이었던 독일인 신부 한 분이 그걸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즐겨 먹지는 않지만, 어저께도 먹었다는 옥천성당의 김인국 신부처럼 유독 기독교 쪽에 개고기를 즐기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90년대 중반에 복직하면서 경북 북부지방으로 옮아왔는데 거기선 보신탕이 여전히 인기였다. 동료들과 함께 개고깃집을 드나들었지만 나는 그걸 별로 즐기지는 못했다. 잘은 몰라도 북부지방의 조리법이 다른지 내가 어렸을 때 먹던 개장국의 풍미가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채식을 즐기고 ‘육 고기’를 멀리하는 어머니가 유일하게 잘 드시는 게 ‘개장국’과 개고기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옛 개고기 맛을 보여 드리려고 인근 유명 개고깃집을 돌아다녔는데 어머니는 썩 입에 맞지 않아 하시는 듯했다.

▲ 비 식용파들. 왼쪽부터 진중권, 박노자, 김두식, 김시진 ⓒ <한겨레> 수록 사진 편집

그 지역에선 해마다 사월 초파일이면 개신교 신자들이 모여서 복달임으로 개를 잡아 하루를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우연히 그걸 알게 되면서 나는 개고기 식용 문화에 대한 일종의 저항감을 난생처음으로 느꼈다. 불교에서 ‘불살생’은 계율이고 ‘개고기’도 금기로 여기는 풍속이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부처님 오신 날’에 기독인들이 개를 잡아먹는 것이 타 종교에 대한 의도적 능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월드컵을 앞두고 프랑스 여배우의 도발적 요구에 맞서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문화의 상대성에 대한 균형 감각을 잃은 이들 강대국의 오만한 관점은 우리의 식생활 문화를 ‘야만’이라고 규정해 버렸고 이에 대한 ‘거족적(?) 분노’가 그것을 간단히 제압했다. 정작, 이 논쟁이 생명의 관점, 동물보호나 동물의 존엄성에 관한 논의로는 발전하지 못한 이유다.

 

그리고 십수 년이 훌쩍 흐르면서 상황은 조금 다르게 전개되었다. 2000년대 이후 동물보호 운동이 대중들의 호응을 얻으며 크게 발전했다. ‘개’든 ‘개고기’든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애완’을 ‘반려’로 바꾸어냈고, ‘먹는’ 문제를 ‘생활’의 문제로 바라보게 했던 것 같다.

 

<한겨레>는 ‘인천의 장수동 개 지옥 사건’을 그 전기로 소개하고 있는데 나는 그 사건이 어떤 거였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나는 오히려 어느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한 심층 보도 프로그램을 통해 ‘개고기’의 유통과 관리실태를 확인하면서 꽤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개 식용’과 무관하게 ‘야만’적이었고 잔혹했다.

 

나는 인간의 입을 즐겁게 하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개가 길러지는지를 상상하지 못했다. 게이지에 갇힌 개들의 불이 번득이는 눈빛과 그들의 억눌린 울음소리, 시장 길바닥에서 간단없이 치러지는 도살과정 따위를 지켜보면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내 기호가 ‘야만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 저런 고기를 내가 먹었다고?

 

개고기, ‘문명 : 야만’을 넘어서

 

단순히 비위생적인 유통이나 비인간적인 관리 실태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더는 예전처럼 개고기를 먹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몇 해가 흘렀고 나는 그동안 한 번도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나도 그랬지만 주변의 아무도 개고기를 먹자고 하지 않았다. 시간은 이제 반대편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듯했다.

 

<오마이뉴스> 블로그를 통하여 수의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올곧게 세워나가고 있는 생태주의자, ‘해를그리며’님을 만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평화와 생명이 함께하는 동물병원’을 운영하면서 동물보호단체 KARA와 함께 정기적으로 유기견 보호소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이다.

 

꾸준하면서도 진지한 그의 실천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이 오래된 식습관으로부터 시나브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것을 내면화하지는 못했다. 이성은 분명한 선택을 내리고 있지만 오십 년 넘게 거기 어떤 문제의식도 갖지 못하고 살아온 정서는 여전히 오랜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심정적으로는 ‘맘이 안 편해서’ 개고기를 끊었다는 김규항에 가깝지만, 그의 강단을 따를 만큼 개와 개고기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숙성되지 못했다. 먹다가 끊었다는 김규항, 진중권이나 먹기는 하지만 일부러 찾지는 않는다는 조국, 김인국, 김두식의 의견은 민족주의를 넘어선 ‘개고기 논쟁’의 현주소를 애매하게 드러내 준다.

 

“요샌 주변에 별로 먹는 사람도 없고 아무래도 소나 닭에 비교해 접근성도 떨어지고… 찜찜하기도 하고……. 현재의 공장식 축산 시스템으로 볼 때 개고기가 더 야만적이라 볼 근거는 없습니다.” (김규항)

“돈 주고 사 먹는 정도는 아니고 손위 어른이나 선배들이 가자 하면 굳이 싫다며 다른 곳 가진 않아요.” (조국)

“…… 한쪽은 문명이고 한쪽은 야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잘못됐죠.” (진중권)

“일부러 가진 않아요. 기회 되면 가는 거죠.” “먹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근데 요즘은 개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인국)

“즐기진 않지만 누가 억지로 가자고 하면 피하진 않습니다.” (김두식)

 

이 누천년에 걸쳐서 연면히 이어져 온 식생활 문화는 이제 ‘민족주의’와 ‘문명 : 야만’이라는 익숙한 논점은 넘어섰다. 남은 것은 생명의 관점, 이제 그것을 추인하라고 시나브로 압력을 넣는 건 시대다. 이 보편의 논리를 거역할 힘이 예전처럼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법제화’ 의견에서 김시진과 진중권을 제외한 여섯 명 모두가 ‘양성화·위생관리’ 쪽에 손을 든 것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개고기 식용’에 관한 한 ‘식용 금지’라는 극약 처방보다는 ‘인식의 변화’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게 옳다고 여기는 듯하고.

 

내 의견? 김인국 신부는 그렇게 말했다. “의견 없어요. 근데 이중적이에요. 상에 올라오는 거면 위생적인 관리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럼 또 미안하고….” 그의 의견 언저리에 내 의견도 있다. 법적 강제로 식용을 금하는 건 분명 아닌 것 같은데, 저 끔찍한 도축 시스템을 위생 관리한다고? 그래서 얼마나 달라질까?

 

성주 초전 장터에 가면 살코기를 잘게 찢어서 넣은 개장, 이른바 ‘실개장’을 담백하게 끓여주는 할머니가 있었다. 20여 년 전의 일이니 노인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을 터다. 그러나 나는 성주 근처를 지날 때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끓여주었던 실개장 맛을 희미하게 떠올리며 아련한 향수에 잠기곤 한다. 그러니까 여기쯤인 셈이다. 이 오래된 이슈 앞에 내가 선 자리가.

 

2012. 7. 17. 낮달

 

▲ 청와대 앞에서 개 식용 종식 시위를 하고 있는 카라.

이 글을 쓴 지 7년이 지났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변화한 것 같다. 전국 최대의 개 시장인 성남 모란시장에서 개 도축 시설이 철거되었고, 부산의 구포시장에서도 개 시장이 사라졌다. 이제 전국에 개 도살이 이루어지는 시장은 대구 칠성시장과 경주 안강시장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구미로 옮아와 살면서 어렸을 적의 맛을 그대로 낸 개장국을 만났다. 어울려 서너 차례, 기력이 달려선지 자꾸 구미가 당겨서 서너 번 그 집을 드나들었다. 개장 맛은 만족스럽지만, 비좁고 냄새나는 집을 드나드는 게 마뜩잖았다. 자연 발걸음이 멀어져, 언제쯤 갔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지난 7월 초순에 옛날 성주의 실개장을 같이 즐겼던 벗이 ‘탕’이나 한 그릇 하자 하여 반야월의 어느 식당에서 개장국을 먹었다. 입에 별로 맞지 않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녁에 배탈이 났다. 구미의 개장국이 간절히 생각났다. 그러나 그게 다다.

이제 20대 젊은이들은 더는 개를 먹지 않는다. 반려견을 기르는 인구가 천만이 넘었다니 이제 개는 식용에서 반려동물로 제대로 넘어온 셈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의 변화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와 ‘문명 : 야만’이라는 익숙한 논점을 넘어서 우리는 이제 21세기 한복판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내일(8월 11일)은 말복이다. 옛날 같으면 보신탕을 찾는 발걸음이 잦아지는 날인데, 요즘은 삼계탕집이 바빠지거나, 대개는 수박 등 여름 과일을 먹는 거로 보내는 날로 바뀌었다. 오래 이어져 온 '복날 개 패듯'이란 속담도 이제 잊히게 될지도 모른다.


                                                                                         2019.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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