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강제동원에 대한 대법원 배상 판결과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일본 기업 신일철주금에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내렸다. 1941~1943년 일본제철소에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네 명이 2005년 우리 법원에 소장을 제출한 지 13년 8개월 만이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 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신일철주금이 가해 기업인 구 일본제철과 법적으로 동일한 회사인지에 대해 “원심과 같이 법적으로 동일한 기업으로 인정된다”며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이 사건은 이들 피해자들이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일본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시작됐다. 오사카지방재판소는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신 일본제철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고 이는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대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11월에는 법원이 미쓰비시중공업에 강제징용 피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하게 되면서 일본 정부와 해당 기업들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놓기 시작했다. 일본 외상은 대법원판결 직후 성명을 내 “이번 판결은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일한 간의 우호 협력 관계의 법적 기초를 근본부터 뒤집는 것으로, 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해당 기업들도 유감을 밝히고 손해 배상을 이행하지 않자,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신일철주금의 한국 내 자산 압류 절차에 들어간 게 올 1월이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3월에는 법원이 미쓰비시 특허권 등 한국 내 재산 압류 결정을 내렸다.
4월 들면서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 기업들을 상대로 추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대상은 기존에 배상 책임이 인정됐던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후지코시·미쓰비시에 더해 일본코크스공업(옛 미쓰이광산)도 포함됐다. 코크스공업은 일제강점기 미이케 탄광을 운영하며 조선인들을 강제 동원한 기업으로 알려진 회사다.
이들 기업은 모두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해 조선인 노무자를 강제노역에 동원한 전범 기업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 기업들을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기업 유산으로 이해한다. 2015년에 일본이 이 유산들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를 신청한 것이다.
아래의 글은 2015년 7월 그러한 일본의 의도를 비판한 글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계기 전시 개최 계획안’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2015. 6. 17.) PDF를 요약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2015년 유네스코는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Sites of Japan’s Meiji Industrial Revolution: Iron and Steel, Shipbuilding and Coal Mining)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였다.
2019. 4. 5.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일본이 신청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유력해졌다고 한다. 세계유산위원회 산하 민간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는 일본이 신청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적합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 시설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면서 일본은 “서양의 기술이 일본 문화와 융합해 급속한 산업국가가 형성된 과정을 시계열적(視系列的)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서양기술을 적극적으로 개량해 일본의 필요와 전통에 적합하게 만들어, 불과 50년 만에 본격적인 산업화를 달성했다”는 의미를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규슈(九州)와 야마구치(山口)현에 있는 중화학 산업시설 23곳 가운데 최소 7곳은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가 발생한 곳이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환기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반대해왔으나 등재는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 전범 기업 시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반대를 위한 독일 현지 특별 전시회”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 가치>를 개최한다고 한다. 연구소가 공개한 ‘자료’를 통해 예의 유산 몇 곳과 조선인 강제노동의 역사를 살펴본다.
1. 후쿠오카(福岡)현 기타큐슈(北九州)의 야하타(八幡)제철소
일본 근대 기업은 19세기 이래 일본 제국주의 팽창과 더불어 성장했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으로부터 당시 일본의 4년 치 예산과 맞먹는 액수의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았다. 일본은 배상금의 80%는 군비 확장에 썼고, 나머지 20%는 야하타제철소 건설과 철도, 전신·전화사업에 투자했다.
관영 야하타제철소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뒷받침하는 군수산업으로 육성되었다. 전쟁터가 된 한반도와 전쟁의 희생양이 된 조선 민중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었다.
침략전쟁의 확대로 철의 수요가 늘자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약 6천 명 이상의 노동자를 강제 동원했다. 1945년 패전까지 이렇게 생산된 철강으로 일제는 군함과 어뢰, 전투기 등을 제작했다.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거짓말로 끌고 가 노예처럼 부린 것’에 대해 신일철주금(新日鉄住金, 관영 야하타제철소 후신)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지금도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해당 기업들은 지금까지도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문제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 후쿠오카(福岡)현 오무타(大牟田)시 미이케(三池)탄광
규슈는 홋카이도 다음으로 일본에서 가장 탄광이 많은 지역이다. 미쓰이 재벌 성장의 기반이 된 미이케 탄광은 한때 일본 석탄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손꼽히는 탄전(炭田)인데 조선인과 중국인 징용자가 많았던 곳으로 유명했다.
미쓰이는 1889년 미이케 탄광을 인수하여 운영했다. 미쓰이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독점 자본 그룹으로 성장했다. 러일전쟁 때에는 부족한 생산량을 충당하기 위해 미이케 탄광 전용 감옥을 설치, 죄수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옷을 입히지 않고 족쇄를 채운 상태로 채탄 할당량을 채우게 했다.
미쓰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다양한 산업에 걸쳐 사업을 벌여 거대 재벌로 부상하였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일본인 노동자가 전쟁에 동원되자 부족해진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일제는 식민지 조선인을 조직적으로 동원했다.
탄광은 조선인 노무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작업장이었다. 탄광은 노동 강도가 극심하고 사망률이 가장 높은 작업장이었기 때문이다. 1938∼1945년 일본 본토에 끌려간 조선인의 약 45%가 탄광에 배치됐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미이케 탄광만 9,300명에 이르렀다.
이 지역의 환경은 ‘석탄 3만 톤을 팔 때마다 사망자가 한 사람씩 나온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열악했다. 특히 조선인은 죄수를 대신하는 노예와 다름없었다. 이제 그 미이케 탄광이 역사를 가리고 ‘일본의 산업화’라 포장되어 ‘세계 문화유산’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조선 현지에 직접 가서 사람들을 데려왔다. 여러 번 가서 총 4000명을 데려왔다. 말이 데려온 것이지 실제로는 잡아 온 것이다. 갈 때마다 지역 면장, 일본 헌병 등 힘 있는 사람들에게 돈과 선물을 건네주고 협조를 받았다.
면 단위 시골 마을에 낮에 가면 남자들은 다 도망가 있었다. 그래서 밤에 갔다. 헌병과 함께 어떤 집에 침입하니 젊은 남자가 부인과 함께 잠자리에 있었다. 다가가서 일본도를 들이대고 잡아 왔다. 길에서 지나가는 조선인을 잡아 트럭에 싣기도 했다.”
- 미이케탄광 인사과장으로 일했던 도미타 와타루(1918년생, 2010년 국민일보 인터뷰)
3. 미쓰비시(三菱) 나가사키(長崎) 조선소와 전함 무사시(武藏)
미쓰비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 확대와 함께 성장한 대표적인 독점 재벌이다. 그 유착은 ‘미쓰비시가 있는 곳에 전쟁이 있다’는 말을 낳았을 정도였다. 미쓰비시의 광업과 중공업은 전쟁 수행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지속하는 동안 미쓰비시 조선소에서는 군함 82척과 어뢰 1만 7천 개가 생산되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전함의 자랑’ 무사시를 비롯해 진주만 기습에 사용된 어뢰도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나가사키는 전쟁의 주동력이었던 미쓰비시 군수산업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미쓰비시 계열 탄광에는 일찍부터 저임금의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전쟁의 확대와 함께 미쓰비시는 각지에서 자원을 수탈해 현지 민중을 혹사했다.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만 약 6,0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연행되어 노예 노동을 강요당했다.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에도 강제 동원된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현장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이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미쓰비시는 여전히 이를 조사할 생각이 없다. 다만 전체 피폭자의 10%가 조선인 희생자였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메이지 시대부터 원폭투하가 이루어지던 날(1945.8.9.)까지 나가사키는 무기 생산의 도시였다. 원폭투하 6일 후인 8월 15일 일본제국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지금도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는 해상자위대의 이지스함이 건조 중이다.
일본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세계 최고의 전함 무사시’를 건조한 나가사키 조선소의 일부 시설을 등재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조선소 시설을 등재하여 일본은 전함 무사시를 건조한 1938년,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4. 지옥 섬, 하시마(端島) 해저 탄광
나가사키 항구에서 약 23km 떨어져 있는 섬, 군함처럼 생겨 일명 ‘군함도’라고 불린 하시마는 섬 전체가 탄광으로, 바닷속 곳곳으로 갱도를 파내어 수백 미터씩 내려간 해저 탄광이다. 1890년, 하시마 옆에 있던 다카시마(高島) 탄광을 운영하던 미쓰비시가 이곳을 인수해 확장했다.
이 작은 섬에 무려 5,300명이나 되는 인구가 거주하였다. 1916년에 건립된 콘크리트 아파트에는 일본인 광부와 직원이 살았고, 쇠창살이 쳐진 허름한 건물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수용되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10m 높이의 탑도 있었다.
하시마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작업장이었다. 육지와 철저하게 고립된 이 섬에서 징용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잔인한 폭력 속에 사투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들에게 하시마가 ‘지옥의 섬’으로 통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해저 탄광은 막장 바닥에 물이 차 습기가 많아서 작업이 매우 힘들다. 규슈 지역 탄광은 막장 높이가 아주 낮아 거의 눕다시피 해 탄을 파야 했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이런 자세로 탄을 파야 했던 노무자들의 고통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43년에서 45년 사이 500~800명의 조선인이 하시마 탄광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화장(火葬)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만 50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 정부도 기업도 하시마에 동원된 조선인이 몇 명인지, 몇 명이나 사망했는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화장 관련 자료에 따르면 하시마 탄광 사망자 가운데 사고사가 절반을 넘으며, 나머지 사망원인은 질식, 외상, 압사, 익사, 변사 등이다.
일부 생존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시내 복구 작업에 투입되어 피폭 피해까지 입어야 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을 대상으로 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이 지금 진행되고 있지만 미쓰비시는 청구권협정으로 원고의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지옥 섬에서 이루어진 일본의 산업화를 기리기 전에 거기 갇혀 혹사당한 조선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은 반드시 기록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식민지 조선인 강제동원의 실상
1931년 만주침략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이후 식민지 조선을 물적으로도 인적으로도 총동원할 체제를 정비, 강화해갔다. 국내에서는 646만 명을 넘는 조선인이,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 광범위한 지역에는 72만 명 이상이 노무자로, 36만 명 이상이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이는 당시 조선인 인구 3~4명 중에 1명이 강제 동원된 것이었다. 여성들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군의 폭력에 희생되어야 했다.
1939년부터 시작된 노무 동원은 부족했던 노동력의 확보를 목적으로 일본 국가와 기업이 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실행한 것이었다. 일본은 주로 마을 내에서 발언권이 없는 하층민을 ‘인질적 약탈, 납치’ 등 폭력적 방법으로 강제 동원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탄광, 광산, 토목공사현장, 군수공장으로 끌려가 폭력적 감시 아래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일본인보다 낮은 임금, 가혹한 환경에서 극심한 민족차별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원된 조선인의 희생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전후보상 문제
미쓰비시와 미쓰이 계열 전국의 탄광과 광산에 연행된 조선인은 6만 명이 훨씬 넘는다. 중국인도 9,000명 넘게 강제 연행당해 노예 노동에 시달렸다. 미쓰비시, 미쓰이와 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의 전신)이 이러한 강제노동의 중심 기업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의 사죄와 배상을 추구해 왔다.
100건에 가까운 전후보상 소송이 진행되었지만 원폭 피해자 일부 소송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각당했다. 일본 정부는 충분한 진상조사도 하지 않았고, 배상에 대해서도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한일협정을 통한 해결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총체적인 배상이 아니었다. ‘일본의 국가 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 행위나 식민지 지배하에 직결한 불법 행위의 보상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에서는 미해결되었다’는 한국 대법원판결을 통해 일본의 보상이 불충분했으며, 일본 기업에 보상 책임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강제동원 노동자에게 지급되지 않은 급여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고, 사망자의 유골 또한 방치되고 있다. 지금도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 신일철주금 등 전범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 시민들이 강제동원의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그러나 일본 정부의 몫인, 강제 동원되어 희생된 ‘조선인에 대한 추도’는 일본의 시민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현재 일본 각지에는 희생당한 조선인을 추도하고 그 역사를 교훈으로 삼기 위해 피해자와 시민들이 함께 세운 비석과 안내판이 300기가량 있다. 큐슈, 야마구치 지역 ‘산업시설’ 주변에도 지금까지 20기를 넘는 비석이 세워졌다.
그중 하나가 2013년 2월, 일본 시민단체에 의해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 니시키와(西岐波) 해변 근처에 세워진 추도비다.
1942년 2월 3일 니시키와 해변에 있던 조세이(長生) 해저탄광에서 일어난 수몰 사고로 갱도에 갇혀 목숨을 잃은 183명의 희생자를 추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183명의 희생자 중 70%에 달하는 136명이 식민지 조선인이었다.
모든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비석의 추도문에는, 일본이 국책으로서 석탄 증산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고, 희생된 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토지와 재산을 잃게 된 사람들과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었고, 그러한 역사를 반성하며 다시는 다른 민족을 짓밟는 포악한 권력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는 내용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담겨 있다.
그러나 일본이 추진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서는 이러한 역사와 기억은 찾아볼 수 없다. 누구를, 왜,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원점(原點)이다.
참고 영상 ☞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의 진실”
2015. 7. 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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