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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란 무엇인가, 전역병의 ‘통과의례’- ‘재소집’의 악몽

by 낮달2018 2019.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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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복무, 70년대 병영의 추억

▲ 집단강하. 공수기본교육의 마지막 주에는 모두 4회에 걸쳐 강하훈련이 이어졌다 .

①  ‘악몽’의 통과의례-새로 입대하라고?

 

군대를 다녀온 평균치의 한국 남자라면 으레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가 있다. 그것은 현역을 마치고 예비역이 되는 날부터 시작되어 오랫동안 그의 안면을 어지럽히는 ‘재소집’의 악몽이다. 그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떠나온 병영이다. 그런데 ‘재소집’이라니!

 

악몽의 전개 양상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재소집은 영장이 아니라 현역 군인에 의해 통보되며, 말미 없이 바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거기 맞서 당사자는 울며불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자신이 현역을, 그것도 만기로 마친 사람이란 걸 눈물로 호소한다. 물론 이 호소는 간단히 무시되며 주변에 자신의 전역을 증명해줄 어떤 증거도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꿈은 종료된다.

 

그 악몽의 뒤끝은 그러나 행복하다. 악몽의 끔찍함을 상쇄해 주는 것은 그게 ‘꿈’이라는 벅찬 확인이다. 그것은 동시에 자신이 치러낸 병역이 얼마나 끔찍했던 시간이었던가를 환기해 준다. 이러한 악몽은 짧으면 수년에서 길면 십수 년간 이어진다. 그 기간의 차는 현역 복무의 강도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 내가 근무한 귀성부대 휘장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고, 또 그에 관한 공식적 기록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이 그 악몽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십 년쯤은 족히 걸리는 듯하다. 그것은 현역 복무의 강도와도 일정한 비례 관계에 있을 터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다 되지는 않는다. 군 복무에 관한 판단과 평가란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내가 그 재수집의 악몽에서 벗어난 것은 40대 중반쯤이었던 것 같다. 스물다섯에 전역했으니 거의 스무 해 가까이 나는 그 오래된 기억에 매여 있었던 셈이다. 대체로 그 꿈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거나 외부적 자극에 대한 갈등이 고조될 때 찾아온 것 같다. 땀을 흥건히 흘리며 그런 꿈에서 깨어날 때면 나는 내가 심리적으로 쇠약해져 있다는 걸 깨우치곤 했다.

 

두 버전, ‘공수교육 재입교’

 

내가 겪은 ‘재소집 악몽’은 두 개의 버전이 있다. 하나는 모든 예비역이 겪는 버전이니 새삼스러울 게 없다. 문제는 나머지 하나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공수교육’ 재입교 버전이라는 데 있다. 불운하게도 나는 신병 기본훈련을 받은 뒤, 특전사령부에 차출되어 공수병으로 근무했다.

 

나는 1977년 5월 13일 입대하여 1980년 2월 7일에 만기 전역했다. 정확히 일주일이 빠지는 33개월 동안 나는 현역으로 복무한 것이다. 나는 논산훈련소에서 보낸 6주간의 신병훈련, 특수전사령부에서의 공수기본교육과 특수전 교육을 뺀 나머지 시간은 인천시 부평구 소재 ‘귀성부대’에서 근무했다.

 

특전사 산하의 공수여단에서 근무한 것은 순전히 줄을 잘못 서서였다. 논산에서 배출될 때, 우리는 ‘재경(在京) 부대’로 전속된다고 하여 은근히 기대했지만, 막상 우리가 도착한 곳은 특전사령부였다. 지금도 불거져 있는 정수리의 혹이 만들어진 데가 거기 보충대였다. 불과 사나흘 머무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이른바 ‘대가리 박아’ 벌을 받았던 것이다.

 

▲ 막 타워(Mock Tower), 또는 34피트 타워

잠시 자대로 갔다가 다시 사령부 특전교육대에서 나는 공수기본교육(4주)과 특수전 교육(6주)을 받았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던 그해 7월, 한 달 내내 우리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교장을 뒹굴어야 했다. 가장 훈련 강도가 센 교육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듯 공수기본교육은 인내의 한계를 넘나드는 것이었다.

 

아침에 팬티 한 장에 전투복을 걸치고 교장에 나와 오전 1교시를 마치면 병사들의 상의는 흐른 땀이 말라붙은 소금이 허옇게 묻어났다. 교장에서는 걷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삼보 이상은 뛰어야 했다. 걸핏하면 피티(PT) 체조로 골병을 들였는데 우리는 ‘팔 벌려 높이뛰기’ 1천 개쯤은 기본으로 소화했다.

 

10분간 휴식은 용변을 보고 수돗가에 몰려 물을 먹는 것으로도 모자랐다. 교장에서 해산하면 구보로 휴식장으로 갔다가 다시 수돗가로 모였는데 우리는 알 철모를 들고 길게 줄을 서야 했다. 수돗가에 몽둥이를 들고 버티고 선 조교들 앞에서 찻숟가락 가득 소금을 떠 입안에 털어 넣어야 철모에 수돗물 받는 게 허가되었다.

 

타는 듯한 갈증을 다스리려 물을 마시러 온 병사들에게 소금을 먼저 먹이는 경우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면 적지 않은 수의 병사들이 훈련 중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접지 훈련(낙하산을 타고 착지하는 훈련), 막 타워(Mock Tower) 훈련 등을 거쳐 제4주는 강하훈련이었다. 주간 3차례, 야간 1차례의 강하를 마치고 우리는 사령부 브라스 밴드가 연주하는 ‘최후전선 백팔십 리’를 들으며 가슴에다 낙하산 기본휘장(윙 Wing)을 달았고, 비로소 공수병이 되었다.

 

모두 네 차례의 강하와 함께, 아무런 사고 없이 교육을 마치게 되었다는 안도감은 황홀했다. 그건 마치 착시처럼 지난 4주 동안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무화해 버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폭풍 구보도, 지옥문이라 불린 모형문, 송풍 훈련도 마치 아득한 시절의 삽화처럼 떠오르게 만들었다. 모든 고통과 불행의 기억은 짧고 안도와 해방의 기쁨은 긴 것이다.

▲ 산악강하. 수송기에서 뛰어내리면 바로 낙하산이 펴진다 .

그러나 그 착시는 공수교육 재입교라는 악몽으로 재현될 때 완벽하게 해체되었다. 나는 울면서, 내가 공수 168기 수료자라는 걸 절규하곤 했는데, 하필 그럴 때마다 그걸 증언해 줄 사람은 왜 아무도 없었는지……. 그런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마다 나는 내가 재소집 따위와 무관한 ‘민간인’ 신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군대, 젊은 날의 상흔

 

통과제의가 되어 버린 재소집의 악몽은 군 복무 기간이 신체와 정신이 두루 건강한 한국 청년들에게 일종의 상흔이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거기 무슨 ‘신성한 국방의 의무’나 ‘내 나라 내 민족, 내 가족을 지킨다’는 거룩한 자부심 따위는 없다.

 

모두가 그렇지 않았겠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병역 의무다. 내로라하는 상류계급의 아들들이 ‘신의 아들’로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 숱한 ‘인간의 아들’들이 그들의 의무를 대체하고, 더러는 사고로 더러는 실수로 목숨을 잃는 덕분에 대한민국은 건재한 것이다.

 

젊은이들이 군 복무 경험이 상처가 되는 것은 그곳이 폐쇄된 공간으로서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을 부정하는 억압적인 집단인 까닭이다. 거기는 오직 ‘수직적 명령’과 ‘복종’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 ‘까라면 까야 하는’ 맹목의 질서만이 강요되는 곳이다.

 

요즘 군대는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 근본적 성격이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여전히 병영에서의 자살과 타살 소식이 흔치 않게 들려오는 까닭도 거기 있는 것이다. 분단 조국에 태어난 이 땅의 젊은이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의무’의 형식으로 일정 기간 자신의 독립된 삶을 유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삶의 한 시기에 쉬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② 오월의 원죄, 공수부대

▲ 1980년 5월, 광주. 거기 투입된 군대가 우리 부대가 아니었다는 게 위안이 되는가. 영화 <화려한 휴가>의 스틸.

앞서 밝힌 대로 나는 내 의사와 무관하게 우연히 ‘공수부대’로 차출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공수교육과 특수전 교육을 받고 이른바 ‘공수병’이 되었다. 정기적으로 강하훈련, 해상침투훈련, 천리행군 등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나는 다행히 한 번도 시위진압이나 민간인을 통제하기 위한 작전에 투입된 적이 없다. 나는 1980년 2월에 전역했고, 이 땅의 비극적 현대사, 광주민중항쟁은 그로부터 석 달 뒤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팔자에 없는 공수특전대로 배속된 게 내 불운이었다면 광주항쟁 이전에 만기 전역할 수 있었던 것은 씁쓸하지만 내가 누린 행운이었다고 말해도 좋다.

 

광주에 대한 원죄 의식

 

1978년 천리행군 도중에 우리 대대는 긴급 전문을 받고 귀환했다. 당시 나라 사정이 어떠했는지 사병들은 아무도 몰랐다. 전투 중대는 물론 행정병들마저 ‘폭동진압’ 훈련에 동원되었지만, 그 훈련은 한 일주일 후쯤에 종료되었다.

 

이듬해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정부장 김재규에게 살해되던 때, 우리 대대는 천리행군 중이었다. 대대 행정병 중 가장 선임이었고, 인사과 필수요원이었던 나는 10여 명의 전역 대기병들과 함께 부대에 잔류해 있었다.  [관련 글 :  1979년 오늘-중앙정보부장은 절대권력의 심장을 쏘았다]

 

저녁 9시께 비상 사이렌이 울렸고 잠시 후에 퇴근했던 인사장교가 숨이 턱에 닿아서 나타났다. 무슨 일이니? 부평 로터리에 여단 병력이 바리바리 출동하고 있는데……. 우리 대대를 제외한 세 개 대대 전 병력이 출동했고 우리 잔류병은 밤새도록 8개 초소를 운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밤새 말뚝 보초를 서고 교대해 들어온 오전 8시께 후임병이 말했다. 박통이 죽었답니다. 나는 별다른 감회가 없었다. 우선 자리에 들어 눈을 붙이고 싶다는 욕구가 더 컸기 때문이다. 독재자의 죽음으로 비로소 그의 유산인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릴 테지만 정작 사병들에게는 일거에 외출·외박·휴가 일체가 중단된 것이 더 뼈아팠다.

 

전역을 앞두고 가능하면 늦게 찾아 먹으리라고 일부러 마지막 정기휴가를 유보하고 있었던 나는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휴가를 찾아 먹지도 못하고 전역마저 늦추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실제로 병사들 사이를 떠돌아다녔다.

 

12월, 휴가가 재개되자 나는 일착으로 휴가를 떠났다. 12월 14일 정기휴가를 마치고 귀대했을 때야 나는 이틀 전에 12·12 쿠데타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당일 밤에 우리 여단은 서울로 출동하다가 부천 근처에서 회군했다고 했다. 쿠데타군을 진압하고자 우리 여단을 출동시킨 육군 수뇌부가 중도 회군명령을 내린 것은 아군 간의 교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걸 안 것은 물론 훨씬 이후의 일이다. [관련 글 : 12·12 쿠데타, 그리고 30년…]

 

이듬해 2월 7일 나는 만기 전역했다. 귀향해서 한 달 뒤에 대학에 복학했고, 복학한 지 석 달이 채 안 돼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계엄령과 함께 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나는 나중에 우연히 만난 후임병을 통해 그 5월에 우리 대대는 서울 시내 소재 대학에 진주했고, 경찰과 합동으로 우범자 색출작업을 잔인하게 수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광주에 출동한 공수여단은 내가 근무한 부대는 아니었다. 그걸 앞서 말한 것 같이 '행운'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 역사적 사건은 나의 알리바이로 끝날 수 없는 비극, 우리 현대사의 참혹한 상처인 것이다. 개인의 부재나 면책에 앞서 그 아픈 현대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인 까닭이다.

 

광주를, 그리고 호남 사람들을 바라보는 영남 사람들에겐 일종의 원죄의식이 있다. 영남에 살고 있다는 것 말고 어떤 책임도 없지만, 자신이 가해자의 일부라는 부채의식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가끔 공수부대에서 근무한 내 전력이 일종의 원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공수교육을 받고 기본휘장을 가슴에 달면서 공수병이 느끼는 일종의 명예감이 있다. 자의가 아닐지라도 어려운 과정과 고통을 이겨낸 성취감이 주는 울림이란 남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걸 입 밖에 내는 건 쉽지 않다. 사람들에게 아픈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는 훨씬 가까운 것이다.

▲ 집단강하. 복무 기간 동안 내가 참여한 강하는 10회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덧, 전역한 지 삼십 년이 가까워졌고, 예비군은 물론 민방위대까지 끝낸 스산한 50대의 중턱에 나는 서 있다. 문득 떠오른 젊음의 한 시절을 유쾌하게만 회상할 수 없는 이 시대는 참, 얼마나 쓸쓸한가. 가뭇한 기억 속에서 나는 C-123 수송기에서 낙하산에 의지해 지상 3천 피트의 허공에 몸을 날리던 때를 설렘으로 떠올리곤 한다.

 

 

2009. 6.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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