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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벌초 이야기(1) 다시 벌초의 계절이다

by 낮달2018 2019.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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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벌초의 계절

▲ 솔뫼의 문중 산에 있는 고가. 복원한 집인 듯한데 현판이 붙어 있지 않은 옛집이다.

벌초 시즌이다. 좀 이르게 서둔 이들은 벌초를 마쳤을 게고, 미룬 사람은 다음 주말도 바쁠 터이다. 아마 지난 주말부터 전국의 묘지를 품은 산마다 예초기 소리가 진동했을 게다. 벌초하다 다치거나 벌에 쏘여 경을 친 사람들 기사가 가끔 보도되기도 하지만, 그들의 불운은 스쳐가는 후일담에 그칠 뿐이다. 벌초는 마땅히 ‘산 사람’, 후손들의 의무인 것이다.

 

지난 일요일에 벌초를 다녀왔다. 늘 동행했던 아들 녀석 없이 혼자 떠나는 길은 좀 서글펐다. 1시간쯤 후에 목적지에 닿았다. 내 본관인 인동(仁同)은 칠곡군이었다가 나중에 구미가 공단으로 도시화하면서 거기 편입된 동네다. 인동 황상동에는 지금 우리 작은집 일가가 모여 살고 있다. 원래는 내 고향 윗동네에서 살았지만, 거기도 공단이 들어서면서 인동으로 집단 이주한 것이다.

 

선친은 2대 독자셨다. 당연히 삼촌이 없으니 사촌도 없고, 그 윗대의 조부께서도 독자셨으니 선친에게도 사촌이 없다. 자연 현재 친가 쪽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혈족은 아버지의 6촌, 그러니까 내겐 7촌이 되는 재종숙(再從叔)이시다.

 

올해 여든이 되신 이 아재는 이제 산소를 돌보는 일에서 놓여나셨다. 대신 부산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 맏이에게 그 역을 지워버린 것이다. 이 맏이가 나와는 8촌 형제가 되는데 해마다 저희 사촌 3형제가 벌초에 나온다.

 

벌초를 함께 하는 집안 형제로 실질적으로 벌초를 이끄는 친구는 내게 꼭 10촌이 되는 동생이다. 나보다 세 살 아래의 이 친구는 매사에 맵고 짠 데다 인동에서 사는 집안 형제 중 제일 연장자다 보니 자연 벌초 길라잡이가 되었다.

▲ 길도 없는 산을 길을 내어가면서 다녀야 한다 . ( 위 ) 군데군데 쓰러진 나무도 넘어야 한다 .( 아래 )

‘솔뫼’라고 부르는 길쭉한 산자락에 윗대 선조들의 산소 모두 7기가 듬성듬성 흩어져 있다. 가는 길이 따로 있는 산이 아니니 자연 동물적 감각에 의지해 산소를 찾는 수밖에 없는데 이 친구는 한 번도 우리를 헛걸음시키지 않는다. 부산 동생이 그를 ‘움직이는 내비게이션’이라 기리는 게 절대 지나치지 않다.

 

여느 해처럼 그의 인도로 산을 오르내리며 모두 일곱 기의 산소에 벌초를 마치니 정오가 지났다. 처음엔 흐리던 날이 이내 쨍쨍하게 빛을 내면서 드러난 살갗에 내리는 햇볕이 따갑다. 풀로 우거진 산에 길을 내어가며 이동하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우리 문중 종산(宗山)이니 군데군데 제대로 꾸민 윗대 산소를 만난다.

 

좌판과 비석은 물론이거니와 망주석까지 갖추어 놓았는데도 벌초 전이라 주변에 풀이 무성하니 오히려 나지막한 무명의 무덤들보다 오히려 더 서글퍼 보인다. 자연히 논평이 빠질 수 없다.

▲ 해마다 만나는 이웃 무덤 . 비석과 망주석이 잡풀 속에 외롭다 .

“해마다 이렇네요. 이래 누구 산소라고 표시까지 있는데 벌초가 늦거나 빼 먹으면 욕도 실하게 먹을걸요.”
“그러게. 원래 산소를 꾸미는 건 조상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자손들이 내로라하는 표시거든. 욕먹는 건 정한 이치지.”

 

해마다 벌초하러 다니면서 나누는 대화는 거기가 거기다.

 

“명당이 따로 있나. 자손들 벌초하기 좋게 낮은 산 중턱에다 쓰면 거기가 명당이지. ”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다닐 거야?”
“…….”
“…….”

 

이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일찍 세상을 버린 형님 덕분에 아직 벌초하러 다니고 있긴 하지만, 사실 지차(之次)인 내게 이 의무는 가외 부담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의 무게를 맏이만큼 느끼지 못하는 것도 지차라는 지위 때문인지도 모른다.

▲ 벌초를 끝낸 예초기 두 대가 쉬고 있다 . 이 기계가 없으면 벌초는 한결 더 고될 수밖에 없다 .
▲ 벌초 전후. 무성한 잡풀을 깎아내야 봉분이 드러난다.

나는 지금이라도 이 전래의 의무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기 좋은 말로 납골당을 만들고 거기 모든 윗대 산소를 모은다고 하지만 그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나는 농조로 가끔 벌초 길에서 동생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어때, 아재(집안의 마지막 어른이신 내 재종숙) 돌아가시면 고만 이 벌초, 모두 내버리자. 그게 옳지 않겠나?”
“그래도, 형님. 어떻게 내버립니까. 나중에 다른 도리가 없으면 몰라도…….”

▲ 벌초하고 있는 집안 아우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은 결국 맏이들이다. 그들은 이 유구한 전통과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신의 존재 조건을 아주 어릴 적부터 깨친 친구들인 것이다. 거기 비하면 나는 깃털처럼 가볍다. 아버지 대까지 죽 참여해 왔던 대동보(족보)를 나는 신청하지 않았고, 최근에 시행된 ‘전자 족보’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글쎄, 그렇다. 우리 가계를 아는 건 나쁘지 않겠지만 그걸 굳이 수십만 원을 들여 두꺼운 몇 권의 책에 올려야 하는 까닭을 나는 알 수 없다. 인동 장문의 종파(중리파) 36대손이라는 것 외에 나는 별로 우리 성씨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이른바 ‘뿌리론’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그것이 굳이 족보와 같은 형태를 통해서 기려져야 하는지는 회의적이다.

 

작은집의 맏이는 아재의 말씀을 정리해 온 종이를 꺼내 오늘 작업할 산소가 어느 분의 유택인가를 간단히 짚었다. 사십 대 중반인데도 이 친구는 벌써 장남의 풍모를 갖추고 있는 것일까. 그는 우리 집안이 현재 대종손 집안과 갈라진 11대조부터 산소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단지 관성에 따라 벌초를 할 뿐이지, 나는 10대조든 5대조든 그 혈연의 역사를 재구성하거나 그걸 상상할 능력이 없다. 벌초 길 마지막에 찾게 될 할머니와 부모님만이 내게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조상일 뿐이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묘사(墓祀)’라고도 부르는 ‘시제(時祭)’를 버린 지 10년이 가까워진다. 20대의 한 시절엔 내가 아재를 모시고 버스와 도보로 이 산자락을 오르내리며 약식의 시제를 치렀지만, 세월 앞에 장사는 없다. 어느 날,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동생이 그렇게 여쭈었단다.

 

“아재. 그만 묘사를 따로 모시지 말고, 벌초할 때 산소에 술 한 잔 올리고 절하고 오겠습니다.”

 

아재께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기운이 예전 같지 않으니 노구를 이끌고 묘사를 다닐 수도, 그렇다고 벌초에 참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동생은 술 한 잔 올리고 절하고 오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형식이어서 일부러 챙기지 않는 한 제대로 시행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렇게 시제는 생략되었다.

▲ 지난해에는 빗속에 비옷을 입고 벌초를 해야 했다 .

나는 벌초를 버리는(유구한 봉제사의 전통으로 보면 이 ‘버린다’는 표현은 참람하다.) 것도 비슷한 경로로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산을 오르내리며 우리는 폐묘(廢墓)가 된 오래된 무덤을 만난다. 주인을 잃었지만, 거기도 한때는 빛나는 세월과 번성한 일족의 역사가 있었으리라. 어떤 이유에서 폐묘가 됐든 그것은 흙과 거름이 되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니 굳이 안타까워할 일은 없다.

 

“그래, 버릴 수 없다고 치자. 그럼 아이들에게 이걸 물려줄 거야?”
“아이들이……, 물려받으려 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당연하지. 우린 꼼짝없이 매인 몸이지만 아이들이야 다르지. 당장 우리가 더는 산에 다닐 수 없게 되면 아이들은 산소도 제대로 못 찾을걸?”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 세대는 더는 무덤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 내외는 일찌감치 아이들에게 그걸 이야기해 주었다. 산에다 유택을 마련하고 해마다 거기 잔디를 깎고 성묘하는 것으로 조상에 대한 추모와 자손들의 효행을 증명하는 일은 당대에나 가능한 일이다. 한 대(代)만 지나면 그것은 만만찮은 부담과 가외의 일거리도 다가가기 쉽다.

 

“당장 내가 운신하기가 힘들면 어떡하겠나. 외지에 나가 사는 놈을 불러서 벌초를 보내는 일도 한두 해지, 마냥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 돈을 보내고 일꾼을 사서 보내고 하는 것도 일시의 방편일 뿐이지. 결국, 한 해, 두 해 돌보지 못한 무덤은 잡초에 묻혀서 폐묘가 되는 거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쩐지 스산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말 그런 때가 올 것인가. 모두 좀 심란한 표정들이었다. 자신들이 늙어가고 아이들은 자라는 그 매정한 세대교체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개운한 일도 아니기도 하다.

▲솔뫼에서 하산하던 길에 만난 돌감 . 핏빛 단풍이 너무 고왔다 .

인동으로 나와 점심을 먹고 길라잡이를 했던 동생이 빠지고(거기까지가 이 동생과 우리가 함께 모시는 선조들이었다.) 남은 동생들과 고향 뒷산으로 향했다. 좀 깊은 골짜기에 모신 조부모와 동생들 조부모 산소를 거쳐 마지막으로 부모님 묘소를 찾았다.

 

묘소 바로 위에 선친 친구분 묘소가 있었는데, 마침 그 댁의 형님이 아들과 함께 벌초 중이었다. 인사를 나누면서 보니 그 댁 산소는 잡풀 하나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잔디로 가꾸어져 있었다. 왕릉이라도 그보다 더 잘 가꾸지 못할 듯했다. 동생들과 함께 나는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요즘은 아니지만 한 해 내내 매달 올라와서 보살핀 모양이었다.

 

그는 모르긴 몰라도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산소 옆 부분을 좀 쳐내고 묘역을 좀 넓히게. 그는 지난해에 이어 같은 충고를 내게 해 주었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정성껏 예초기로 풀을 깎았다. 뒤편과 왼편 측면으로는 칡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고 봉분 주변으로 잡풀이 많았다. 해마다 초봄에 들러 잡풀을 뽑아야겠다고 마음먹어도 한 번도 실행하지 못한 것이다.

 

어차피 손을 대면 끝이 없다. 남은 산소가 있어서 우리는 깎아낸 풀을 정리하고 묘소 주변을 적당히 정리한 다음 형님께 작별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는 벌써 가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내 부모님 산소. 묘소 왼편과 위쪽에 칡이 무성하고 봉분 위에도 잡풀이 많다 . 저걸 어떡하나 .

그의 눈에 내 부모님의 산소는 초라하고 서글퍼 보일지 모른다. 아니, 자손들의 무성의한 산소 관리가 못마땅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나는 지난해인가 그가 내게 건넨 충고를 무시해 버렸다. 그는 묘역을 넓히고 띠(잔디)를 새로 입힐 것을 권했다. 한 돈 백이면……, 그는 들 비용도 어림잡아 주었다.

 

건성으로 대답은 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적산(敵産)이었다가 해방 후 국가 소유가 된 산자락은 양지발라서 어느덧 동네의 공동묘지가 되어 있었다. 부모님 산소 앞에 서면 아랫동네와 우리가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과 강과 도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내 부모님이 따뜻한 햇볕 아래, 마을과 강과 길을 굽어보며 고향 뒷산에 잠들어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더 큰 묘역이나 더 잘 가꾸어진 잔디, 무거운 돌비 따위가 필요하지는 않다. 안온하게 고향의 풍정을 즐기시면서 부모님께선 흙으로 돌아가시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산소의 벌초를 마치고 동생들과 나는 헤어졌다. 내년 이맘때나 보겠네. 수고하였다. 애쓰셨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치하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그렇다. 명절이라고 따로 내왕하지는 않으니, 우린 내년 이맘때쯤 다시 만날 것이다. 언제까지 이럴 거냐고 다시 서로에게 물으면서도. 우리는 아직 그 ‘언제’가 언제가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2008. 9. 3. 낮달

 

벌초 이야기(2) 다시 벌초를 생각한다

벌초 이야기(3) 연례행사 벌초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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