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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공검지(恭儉池), 그 논 습지의 연꽃

by 낮달2018 2019.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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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저수지 상주 ‘공갈못’

▲ 삼한 시대에 조성된 저수지 상주 공검지는 올 6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보호 논 습지로 지정되었다.

상주 공검지(恭儉池)를 다녀온 건 지난 13일, 8월의 마지막 연휴였다. 그리고 두 주가 훌쩍 흘렀다. 무더위 속에 바다나 산이 아니라 굳이 내륙으로 들어간 것은 공검지의 연꽃을 보고 싶어서였다. 지역 텔레비전 방송의 배경 화면에서 만난 거대한 연꽃 단지에 나는 단번에 꽂혔는데 그게 공검지였다.

 

삼한 시대의 저수지 ‘상주 공검지’

 

안동에서 상주까지는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가는 길에 예천군 용궁면의 산택지(山澤池) 연꽃공원에도 들렀다. 약 4천 평 부지에 자생 연꽃이 피는 연못 산택지는 말하자면 이번 외출의 덤이었다. 사진 찍기에 도움이 되긴 했지만, 연못 안에 세운 팔각정과 거기 이어진 나무다리 따위의 인공 시설물이 ‘옥에 티’였다.

 

공검지가 있는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에 닿은 것은 얼추 정오가 가까워서였다. 넓적한 자연석에 새긴 ‘공갈못 노래비’를 지나자 저수지 어귀의 길가에 커다란 돌비가 서 있었다. 거기 새겨진 ‘농경문화의 발상지’라는 글귀가 조금 낯설고 생뚱맞아 보였다.

 

대체로 사람들은 ‘상주 공검지’를 교과서를 통해서 배운다. 제천의 의림지, 밀양 수산제, 김제 벽골제와 함께 원삼국 시대에 벼농사를 짓기 위해 조성된 저수지로 말이다. 어림잡아도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이다. 이는 경상도 상주지방에서 벼농사의 역사가 또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 함창 농지개량조합에서 세운 '공갈못 옛터' 비

 

그렇다면 이 지역에 붙인 ‘농경문화의 발상지’라는 글귀가 ‘오버’는 아니다. 인공의 덧칠이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푸근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쓸쓸해 뵈는 저수지 둑에 서면 그런 생각은 굳어질 수밖에 없다. 연꽃으로 펼쳐진 저수지의 규모는 생각보다 훨씬 큰 것이다.

 

중국 ‘서호(西湖)’에 비겼던 공검지의 연꽃

 

축조 당시의 규모는 기록에 없다. 그러나 명종 25년(1195)에 옛 규모를 따라 중수한 이후의 모습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둑의 길이 860보(약 430m), 둘레 1만6천6백47 척(약 8.8km)으로 전하고 있으니 애당초 공검지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 규모의 저수지를 조성한 게 1400여 년 전이다. 삼한 시대의 저수지는 축조 연대에 대한 이설들이 꽤 있다. 그러나 공검지가 6, 7세기의 축조물이라는 건 2009년 복원사업 공사 중에 출토된 유물로 증명된 바 있다. 수문으로 추정되는 목 부재(유구)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서기 560년에서 780년대의 유물임이 밝혀진 것이다.

 

오늘날처럼 굴착기와 대형 트럭 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루어졌을 그 시대의 저수지 공사는 국가 단위의 대역사였을 터이다. 인공 저수지의 존재는 피나 조, 수수 따위에서 벼농사로 발전한 당대의 농경이 수리·관개 등의 치수(治水) 단계로 넘어가는 시기였음의 방증이니 이곳을 ‘농경문화의 발상지’라 명명하는 건 무리는 아니다.

 

1400년이란 세월이 말하듯 현재 공검지의 모습은 예전의 그것은 아니다. 공검지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논을 만들려고 저수지의 둑을 터서 폐허가 되어 그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공검지가 오늘의 모습인 수심 3.4m의 연못으로 조성된 것은 1993년에 벌인 확장공사의 결과인 것이다.

 

예부터 공검지는 연꽃이 풍성하여 꽃이 만발하면 중국의 전당호(錢塘湖, 지금의 서호)와 견줄 만하다고 하였다. 고려 명종 대에 공검지를 중수(1195)한 이후에 애창되었으리라고 추정되는 상주 민요 ‘공갈못 연밥 따는 노래’, 이른바 ‘채련요(採蓮謠)’는 바로 공검지에 가득한 연밥을 수확하면서 널리 부른 민중들의 노래다.

 

전반부 4행은 연밥 따는 처자의 아름다움에 반한 남성의 순박한 구애다. 사내는 ‘연밥 줄밥’을 따주겠다면서 ‘큰 아가’에게 ‘자기 품에 잠자 달라’거나 ‘백년언약’을 맺어 달라, ‘세간살이’를 같이 하자고 유혹한다. 후반 2행은 구애를 받은 처자의 소박한 응답이다.

 

처자는 사내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연밥 따는 일이 늦어간다’는 현실적 우려로 그것을 슬그머니 물리친다. 아주 짧은 시구에 담긴 민중들의 은근한 사랑의 정서는 천 년의 시간을 넘은 뒷사람에게 미소를 머금게 한다.

▲ 상주 공검지에 새로 연을 심은 것은 2007년부터. 110여 년 만에 20여종의 연이 심어진 것이다.

공검지에 새로 연을 심은 것은 2007년 4월 25일이라고 한다. 구한말 저수지를 메운 후 거의 110여 년 만에 20여 종(현재 46여 종)의 연이 심어진 것이다. 그리고 5년, 지금 공검지에는 온 저수지 가득 연꽃이 빼곡하다. 백련에서 홍련까지 갖가지 빛깔의 연꽃이 만발한 공검지는 이제 적지 않은 습지대가 되었다.

 

공검지, 우리나라 최초의 ‘논 습지’로 지정

 

그래서 올 6월에 공검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논 습지(0.264㎢) 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올해 안 람사르 등록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는 공검지 논 습지는 멸종위기 동물인 말똥가리와 원앙, 황조롱이 등 천연기념물 7종을 비롯해 식물 79종, 포유류 11종, 조류 63종, 파충류와 양서류 11종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저수지 입구에 함창 농지개량조합에서 세운 ‘공갈못 옛터’라는 돌비가 서 있다. 그 뒤로 펼쳐지는 저수지 저쪽으로는 아스라한 연꽃의 물결이다. 곧고 벋은 둑길로 천천히 걷는데 온몸을 익혀 버릴 듯한 따가운 햇볕에 숨이 막힌다. 그나마 인공의 손길이 덜 미친 황톳길과 제멋대로 자란 연꽃 바다는 매우 편안하게 어울린다.

 

산택지의 연꽃과 공검지의 그것이 다른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인공 시설물으로 덧칠한 산택지의 연꽃은 화사한 데 반해 무성하게 웃자란 공검지의 연꽃 바다는 야생의 내음이 강하다. 산택지의 팔각정으로 이어진 데크로 시공한 다리보다 마치 잘라 놓은 오렌지 단면처럼 저수지를 구획한 황톳길이 훨씬 인간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것이다.

 

정작 제대로 된 사진을 찍어내지 못한 것은 숨 쉬는 것조차 거북하게 하는 달아오른 햇살이었다. 주말 새벽에 사진쟁이들이 들끓는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나는 사진 건지기를 포기하고 되는 대로 셔터를 누르며 저수지를 빠져나왔다. 몇몇 사진은 필터 조작이 잘못되어 제 색상을 잃기도 했다. 아마추어를 면치 못하는 이유는 쌔고 쌘 것이다.

 

"왜 하필이면 공갈못이유?"

 

아내의 물음에 대한 내 응답은 잘못이었다. 나는 ‘공갈’의 ‘갈’이 ‘칼’의 고어고, 이를 한자로 쓰면서 ‘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공검지가 ‘공갈못’의 한자 차자표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검’은 ‘칼[검(劍)]’이 아니라 ‘검소할 검(儉)’인 것이다.

 

공검지를 가리키는 이름은 여러 갈래다. 한자어 이름은 크게 두 종류로 ‘공건계’와 ‘공검계’로 나뉘는데 전자는 주로 저수지 축조 방법과 관련이 있고 후자는 이름과 관련된 표기로 본다. 또 다르게는 ‘공갈’을 ‘큰물’, 또는 ‘큰물이 갈라지는 곳’의 뜻으로 새기기도 한다.

 

그러나 민간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공갈’이란 아이를 묻고 둑을 쌓았다는 설이다. 예부터 거대 토목공사인 성 쌓기·둑쌓기·다리 놓기 등을 할 때 사람을 물속이나 흙 속에 파묻었다는 ‘인주(人柱)’ 설화가 전해져 온다. 산 사람을 바치는 인신공희의 풍습이 토목구조물의 안전과 견고함을 보장하리라는 믿음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원래 거대 토목공사는 인명의 희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옛사람들은 그 희생을 줄이기 위해 인주를 바치는 공력으로 토목공사의 완수를 기원한 셈이다. 그것은 마치 인당수를 지나는 뱃사람들이 심청을 그 풍랑의 바다에 바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공갈이를 묻어서든, 축조방법이나 지역의 이름과 관련된 명명이든 공검지가 1400년의 역사 속에 이 땅을 살다간 사람들의 삶을 오롯이 담고 있음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직 사람의 힘, 그 근력과 의지로 땅을 파내고 거기 물을 가둔 옛사람들의 땀은 가히 ‘농업혁명’을 가져왔으리라.

▲ 8월 31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다 연행되는 전국농민회 이광석 회장. ⓒ 민중의 소리

‘곡창’ 상주와 한미 FTA

 

천혜의 날씨와 토양은 물론이거니와 수리·관개를 통해 농업 생산물의 비약적 증산을 꾀하고 이를 이룬 인간의 의지가 상주 땅을 삼남의 곡창지대로 만든 것이다. 상주가 쌀과 누에, 곶감 등 ‘삼백(三白)’의 고장이 된 것은 거슬러 오르면 천 년도 전 선인들이 흘린 피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2011년 현재, 상주들에 시방 익어가고 있는 벼는 개방농정과 한미 FTA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의 틈바구니에서 씁쓸하게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어제는 농민들이 한미 FTA 외교통상위원회 상정 시도에 반대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가 무산되면서 이광석 전농 의장 등이 연행되기도 했다.

 

농민들의 절규는 노동자의 절규를 닮았다. ‘해고가 살인’이듯 ‘한미 FTA도 살인’인 것이다.

 

 

2011. 9.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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