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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역과 기차, 그리고 세월…

by 낮달2018 2019.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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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과 역 그리고

▲  간이역의 철길 . 2008년  11월 ,  영주 희방사역
▲  2008 년  11 월 ,  희방사역

역(驛)이란 공간이 주는 울림은 만만찮다. 그것은 한 세계를 다른 세계와 이어주는 장소다. 만남보다는 이별이 더 익숙한 공간이기도 하다. 역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 이를테면 대합실과 개찰구, 플랫폼, 철길 따위의 부속 요소들이 함축하고 있는 이미지들과 함께 사람들에게 저마다 달리 다가간다.

 

역, 한 세계를 다른 세계와 이어주는 곳

 

오늘날에는 그 의미가 ‘철도역’으로 축소되었지만, 근대 이전에는 그 의미가 훨씬 드넓었다. 왕조시대에 역은 역마(驛馬)를 갈아타는 곳이었고, 사람과 말, 마차가 머무르는 여관과 차고이기도 했다. 또 역은 통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역은 옛날과는 사뭇 다르다. 그 의미조차 축소되어 ‘철도’라는 특정한 교통수단에서만 쓰는 용어가 된 것이다. 지하철 시대가 열리면서 지하철역이 생기기는 했으나, 지하철과 무관한 지방 사람들에게 여전히 역은 경부선이나 호남선에 있는 그런 공간으로 인식된다.

 

학창시절에 기차 통학을 한 이들에게는 역은 아주 익숙한 공간일 수 있겠다. 중고등학교 때엔 주변에 달리는 기차에 뛰어오르거나 뛰어내리는 모험을 즐긴다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차가 지나지 않는 두메에서 태어난 내게 역은 두렵고 쉬 범접할 수 없는 낯선 공간이었다.

 

난생처음으로 기차를 타게 된 것은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따라 대구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와 거기서 기차를 탔다. 온갖 상품들이 화려하게 진열된 번화한 거리로 나오면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무엇보다 거리를 오가는 인파에 나는 압도당했던 것 같다.

 

시골에서 볼 수 없었던 크고 낯선 양식의 역사(驛舍) 건물 앞에서도 기가 죽었다. 대합실의 높다란 천장과 개찰구에 펀치를 들고 무표정하게 서 있던 제복을 갖춰 입은 역무원들의 모습에서도 나는 겁을 집어먹었다. 그들이 쓴 금테를 두른 높다란 제모(制帽)는 시골뜨기 소년을 위축시킬 만큼 충분히 권위적이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나를 졸게 만든 것은 개찰구를 지나자마자 만나게 된 ‘철창’이었다. 사방이 철창으로 에워싸인 공간에 웬 젊은 사내 하나가 갇혀 있었고, 그 입구를 번쩍번쩍 빛이 나는 헬멧을 쓴 키다리 헌병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사내는 아마 일시 보호 중인 무임 승차자였거나 차내 소란자였을 듯싶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그 풍경은 내가 만날 도회, 그 알지 못하는 세계의 표상 같았다. 나는 어머니의 치마 뒤에 숨기보다는 차라리 미련 없이 오던 길을 되짚어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예의 장면은 내게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알지 못하는 세계의 표상

 

찻간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며 검표하는 차장도 두려웠다. 그들도 역무원과 똑같은 감색 제복에 높다란 제모를 쓰고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출발지에서의 역 순서로 만나게 되는 집찰구에서의 절차도 피하고 싶은 과정이었다. 거기엔 더 크고 삼엄한 분위기가 마치 통과제의처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2008년 11월, 희방사역 어귀

그뿐인가. 버스의 소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기차의 굉음과 상상을 넘는 길이의 열차의 모습도 낯설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귓속을 파고드는 레일 위를 구르는 열차 바퀴의 마찰음은 마치 외계로 가는 긴 여로를 연상시켰다. 그렇게 빨리 달리고 있는데도 연도의 풍경들이 그렇게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도 나는 자꾸만 헷갈렸던 듯싶다.

 

학교를 마치고 생활인이 되기까지 내가 기차를 이용한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생활반경이 철길과 떨어진 대신 버스는 사통팔달로 이어져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래서인가 한동안 기차를 이용할 때마다 나는 엷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나는 그 숱한 객차마다 고작 일이 분의 시간 안에 승객들이 승하차를 마칠 수 있다는 사실이 늘 믿어지지 않았다. 열차는 플랫폼에 섰다가 아무 예고도 없이 출발하는데도 내리거나 타지 못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신기했다. 당연히 나는 기차를 기다리거나, 기차 여행 중 내릴 역이 가까워지면 알 수 없는 조바심으로 전전긍긍하곤 했다. 그런 불안에서 벗어난 게 마흔이 넘어서라고 하면 나는 좀 덜떨어진 사람일까.

 

기차여행으로 만나는 역

 

직업 때문에 이리저리 옮겨 살게 되면서 기차나 역은 좀 가까워졌다. 한 해에 몇 번씩 집회 때문에 서울을 오르내리던 시절에는 기차가 얼마나 생광스러운 교통수단인가를 넉넉히 깨닫기도 했다. 일행과 함께 자리를 만들어 화장실 걱정 없이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것도, 버스 여행과는 다른 묘미를 얻을 수 있는 것도 기차 여행의 장점이다.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는 시인의 등단작이다. 1983년에 간행된 그의 첫 시집 <사평역에서>는 내 서가에서 이미 누렇게 빛이 바랬다. 사평은 보기 좋게 ‘沙平’이란 한자도 가졌지만, 그게 가상의 지명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나는 가끔 사평역이 수원과 평택 사이의 어느 조그만 간이역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곤 한다. 이를 시가 빚어낸 이미지가 실재로 발전하는 실례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안동엔 중앙선 철도가 지난다. 서울특별시 청량리에서 경상북도 경주를 잇는 길이 386.6km 단선철도(일부 복선 전기철도)인 중앙선은 경부선에 이은 대한민국 제2의 종관철도다. 1939년 4월 청량리~양평 구간이 개통되고, 1942년 4월 1일 전 구간이 개통되었으니 나이로 치면 이미 환갑을 넘겼다.

 

한때는 안동 사람들도 이 중앙선을 이용하여 대구나 서울 나들이를 하였지만, 2001년도에 중앙고속도로가 뚫린 이래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우등고속으로 빠르면 두 시간 반에 서울에 닿으니 아무리 빨라도 네 시간 가까이 걸리는 열차를 찾는 이가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중앙고속도로는, 시간경쟁력을 상실한 중앙선 철도 수요의 60% 정도를 앗아갔다고 한다. 중앙선 철도는 복선화로 돌파구를 찾고 있지만 이제 겨우 제천까지 공사가 진행 중일 뿐 더는 구체적 계획이 없으니 예전의 명성을 되찾긴 어려워 보인다.

 

중앙선뿐 아니라, 철도가 쇠락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느 날 완행인 비둘기호가 사라지고, 특급, 급행이라고 했던 통일호도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무궁화호, 새마을호, 그리고 무적(!)의 케이티엑스뿐이다.

 

사라진 것은 완행열차만이 아니다. 싸고 편리하게 시장 나들이를 할 수 있었던 시골 사람들의 발이 없어지면서 인정과 거기 얽힌 풍광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 뜻과는 무관하게 몇 곱절의 요금을 물고 무궁화호의 승객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저께 의성으로 문상을 다녀오다가 벼르고 있었던 단촌역에 들렀다. 단촌(丹村)은 안동과 의성 사이에 있는 중앙선의 작은 역이다. 역사 앞 공터에 차를 세우고 대합실 문을 밀었는데, 어럽쇼, 역사는 굳게 잠겨 있었다. 그제야 문에 써 붙인 종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단촌역 12월 1일부터 여객열차가 정차하지 않습니다. - 의성역장

중앙선 열차가 다니는 안동 인근의 작은 역들은 대부분 여객열차가 서지 않고 ‘운전근무’(열차의 대피, 교행 등 열차 안전운행에 관한 근무)만 하는 역이 되었다. 그러니 산촌에 앉은 역들은 물으나 마나다. 조그만 시골 간이역을 지날 때마다 나는 안도현의 시 <산역(山驛)>을 생각한다.

▲  단촌역.  안동과 의성 사이의 간이역이다 .

안도현은 내 고등학교 문예 동아리 후배다. 내가 5년쯤 선배여서 제대하고 나서 졸업반인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학생 문단에서 이름을 날린 친구다. 그 무렵 동아리에서 만든 팸플릿에 실린 시가 ‘산역’이었다. 이 시는 나중에 그가 등단한 뒤 낸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도 올랐다.

 

시골역의 달콤한 오수

 

나는 그의 시 ‘산역’을 읽을 때마다 1970년대 초반, 내 고교 시절과 그 시절의 공기를 저도 몰래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30년이 훌쩍 지났다. 안도현은 예천 출신이다. 예천 어디쯤 그런 역이 있었을 성싶지는 않다. 그러나 곽재구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시와 이미지를 통해 어느 산촌의 역 하나를 만든 것이다.

 

그 역은 ‘급행열차가 지나가도록 비켜 있어야’ 하고 ‘일렬횡대 측백나무’ 울타리와 ‘빨간 깃대 하나로 우리를 세워놓고 있는/ 우리를 보낼 수도 있는 역장’이, ‘그 제복의/ 생애 같은 전나무’가 서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전설이다. 산역이라면, 눈꽃열차가 서는 봉화의 승부역쯤이 남아 있을 뿐, 급행열차도 없고, ‘역장’도 보이지 않는다.

▲  이하 ( 伊下 ) 역 .  안동에서 영주로 가는 선로의 두 번째 역이다 .
▲  서지 ( 西枝 ) 역 부근 .  지금은 무인역이 되었다 .
▲  이하역에도 여객열차는 서지 않는다 .
▲  2006 년 가을의 간이역 콘서트 .  이하역에서 열렸다 .
▲  이하역 플랫폼 . 8Km 쯤 더 가면 안동역이다 .

안동역에서 영주로 가는 상행선 두 번째 역인 이하(伊下)역도 2007년 6월부터 여객 취급이 중지된 곳이다. 안동시 와룡면 이하리에 있는 이 역에서는 몇 해 전 안상학 시인의 시를 노래하는 ‘간이역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

 

일요일 오후, 이하역을 찾았을 때, 조그만 간이역은 다디단 오수 같은 정적에 빠져 있었다. 그 정적을 깨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발걸음 소리를 줄이며 나는 플랫폼을 어슬렁거렸다. 사위는 적막했고, 그 적막 속의 잿빛 풍경을 헤치고, 어디선가 봄이, 천천히 오고 있는 듯했다. 철도의 굉음으로가 아니라, 기찻길 옆 오막살이, ‘잘도 자는 아기’의 낮고 안온한 숨소리로.

 

 

2009.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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