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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사라진 모래톱, 낙동강 제1경 상주 경천대(擎天臺)

by 낮달2018 2019.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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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제1경,  모순형용의 ‘녹색성장’, 그 민낯

▲ 상주 경천대는 깎아지른 절벽과 푸른 강물, 모래톱이 어우러진 낙동강 제1경이었다. 2009년  6월  ⓒ 초석

지난 주말 상주 경천대에 다녀왔다. 토요일 아침, 뭔가 허전해서 어디라도 다녀올까 했더니 아내가 군말 없이 따라나서 준 것이다. 경천대로 떠난 것은 얼마 전 거기 나들이를 다녀온 동료들의 얘기를 듣고서였다.

 

내가 경천대를 처음 찾은 것은 1990년께였고 마지막으로 거길 다녀온 것은 1995년이었다. 거기서 베풀어진 백일장에 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이다. 5월 말이었던 듯한데, 오르는 산길에 무르익고 있었던 밤꽃 향기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20년 만에 찾은 경천대

 

경천대와 이어진 무슨 옛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굳이 경천대로 떠난 것은 4대강 사업 뒤에 경천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낙동강 줄기에서 벌어진 이 사업 이후 내가 자란 동네 앞에는 샛강과 모래톱이 사라졌다. 모르긴 해도 경천대에서 내려다보는 강 건너 백사장의 운명도 짐작할 만하긴 했다.

▲  촬영장 가는 산길 .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 전망대로 오르는 길.  양옆에 돌담을 쌓았고 나무를 가로질러 층계를 지었으나 바닥은 맨땅이었다.
▲  경천대 전망대 .  맨 위층에서는 경천대와 인근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으나 이미 모래톱은 사라지고 없었다 .

경천대 주차장에 닿았을 때는 11시가 성큼 지나 있었다. 20년 전과 달리 경천대는 꼼짝없는 관광지로 바뀌어 있었다. 널찍한 주차장과 편의시설에서부터 단지의 시설물들은 전형적인 관광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 나무 계단과 길섶의 돌담도 어디서 본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그나마 통나무를 가로질러 지은 계단 바닥이 맨땅인 점은 마음에 들었다. 5분쯤 계단 길을 오르자 날렵한 산마루에 전망대 건물이 나타났다. 전망대 맨 위층에서 내려다보는 강은 예전의 그 강이었다. 그러나 뭔가 허전한 느낌이 있다. 그게 모래톱이 사라져 버려서라는 걸 이내 깨닫는다.

▲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경천대. 파란 강물과 모래톱이 맑고 아름답다. 2009년 6월.  ⓒ 초석(아래 2009년 사진은 모두 같음)
▲ 경천대에서 내려다본 낙동강.  초석이 찍은  2009년  6월(위)과 2015년(아래)의 풍경. 모래밭은 사라져 버렸다.
▲ 경천대에서 바라본 낙동강 상류 쪽 풍경. 2009년(위)과  2015년(아래)의 풍경이 전혀 다르다. 백사장은 흔적만 남았다.
▲ 모래톱이 어우러진 예전 풍경은 유장한 낙동강 7백 리를 실감케 했었다. 2009년(위)과 2015년(아래). 백사장은 모두 어디로갔나.
▲ 경천대 아래 속이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과 모래톱. 물은 깊어지고 모래톱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2009년(위)과 2015년(아래).

모래톱이 연출하는 것은 단지 강변의 경관만이 아니다. 모래는 물을 정화하는 자연 필터의 역할을 하고 내부의 미생물로 유기물을 분해해 준다. 또 모래톱은 하천에서 유량 변동의 충격을 완화해 주는 조절자 구실을 한다. 홍수 때는 강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고, 갈수기에는 수분 손실을 줄이는 것이다.

 

사라져 버린 하천의 ‘콩팥’, 모래톱

 

하천 환경의 ‘콩팥’ 구실을 하는 모래톱은 생명의 강을 유지하고 인근 생태계를 풍요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 모래톱은 습지와 자갈밭을 자연스레 이어주며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곳이다. 모래사장은 동물이 먹이를 얻는 곳이며 이들의 휴식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4대강 사업을 통해 모래톱은 준설되었다. 건설회사 사장 출신의 전직 대통령은 거기 유람선을 띄우는 운하를 꿈꾸었지만, 여론의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 대신 그는 여차하면 배를 띄울 수 있도록 거기 강물을 가두었다. 그래서 강에 쓸모없는 수량만 넘치면서 고여 있고, 더러는 썩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깊어진 수심 때문에 강가는 땅과 물의 경계가 명확해 보인다. 강변 너머는 벼가 파랗게 자라고 있는 논이 펼쳐지고, 강가에 낚시꾼 몇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심히 강을 내려다보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강이 잃어버린 모래톱을 따로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 4대강 사업 이후, 모래톱이 사라져 여유와 유장한 아름다움을 잃은 낙동강 물길.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 천의봉 너덜샘에서 발원하여 부산 을숙도 낙동강 하구언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1,300리 물길이다. 조선시대에 경상도 각 읍의 세곡(稅穀)은 낙동강 물길로 상주까지 운반된 뒤, 다시 육로로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 가흥창(可興倉)에 수납했다.

 

상주, ‘낙동강 700리’의 중심

 

이 세곡의 집산지가 된 곳이 낙동 나루다. 상주시 낙동면과 의성군 단밀면을 잇는 낙동 나루는 조선시대에 원산, 강경, 포항과 함께 4대 수산물 집산지였을 만큼 큰 나루였다. 부산에서 상주 낙동 나루까지의 거리가 7백 리여서 ‘낙동강 700리’라는 말이 생겼으니 상주는 낙동강 수로의 중심이었던 셈이다.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낙동강 강변의 건너편의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낙동강 제1경’으로 불리는 경천대(擎天臺)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과 울창한 소나무 숲을 거느린 경천대는 부여 낙화암, 충주 탄금대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절경의 하나다.

▲ 경천대 아래 풍경. 왼쪽 등성이가 경천대, 오른쪽 정자가 무정(無雩亭)이다.
▲ 당대의 석학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 선생이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던 무우정(無雩亭).

1645년 이전에는 하늘이 스스로 만들었다 하여 ‘자천대(自天臺)’라 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으로 ‘경천대(擎天臺)’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 충의공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이 경천대 남쪽 용소(龍沼)에서 용마(龍馬) 한 마리를 얻어 훈련 시켰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경천대 아래엔 당대의 석학이었던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가 은거하며 학문을 닦았던 무우정(無雩亭)이 있다. 그는 병자호란 뒤 경천대에다가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는 여덟 글자를 새겨 명나라를 숭상하는 뜻을 표방하였다.

 

우담은 포의(布衣)의 몸으로,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을 8년간이나 모시다가 돌아왔다. 당시 경천대를 떠날 때 그가 읊은 한글 가사가 바로 ‘봉산곡(鳳山曲)’이다. 이 노래는 일명 ‘천대별곡(天臺別曲)’이라고도 하는데 101구로 된 충신연주(忠臣戀主)의 노래다.

 

“가노라 옥주봉(玉柱峯)아, 있거라 경천대(擎天臺)야,
요양만리(遼陽萬里) 길히, 머더야 언마 멀며,
북관일주년(北館一周年)이 오래다 한랴마난….”

▲ 경천대 산길에서 만난 다람쥐. 요즘 관광지에 서식하는 짐승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다.

무우정을 지나 나무다리를 건너면 2001년 MBC가 방영한 드라마 <상도(商道)> 촬영 세트장이 있다. 촬영장이라 하지만 생각보다 규모가 작고 단출하다. 다시 입구로 돌아 나올 때, 길가 비탈에서 다람쥐 한 마리를 만났다. 요즘 다람쥐는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가. 계속 셔터를 눌러대는데도 녀석은 오불관언이었다.

 

사당, 돌탑, 왕릉, 그리고 서원

 

경천대 인근 사벌면 금흔리에 정기룡 장군의 사당 충의사(忠毅祠)가 있다. 정기룡은 태어난 곳은 경남 하동이지만 스무 살 때 상주로 이주했다. 임진년 왜란 때에 함락된 상주성을 화공법(火攻法)으로 탈환하는 등 숱한 전공을 세워 이듬해 상주 목사가 되었다.

 

정유재란 때도 60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올랐다. 1622년 61세를 일기로 경남 통영의 진중에서 병사했는데 유언에 따라 이곳 상주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충의. 묘소와 신도비가 근처에 있다.

▲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정기룡 장군의 사당 충의사. ⓒ 한국관광공사
▲ 보물 제117호 화달리 삼층석탑. 통일신라 시대.
▲ 사벌왕릉. 이 근방에 성읍(城邑) 국가 시대부터 사벌국이 있었으나 신라에 멸망 당하였다.

인근 화달리에 보물 제117호 화달리 삼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화강암 석탑으로 원래 5기의 석탑이 있었는데 도남서원 창건 때 네 기가 헐려 초석과 계단으로 쓰면서 지금은 한 기(基)만 남았다. 여기 언제 가람이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돌탑 다섯 기가 있었다는 기록만으로도 절집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단층 기단에 3층 탑신부로 된 탑의 상륜부는 노반석 등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9세기 신라 하대의 작품으로 추정하는데, 기단 위에 목이 떨어진 석불좌상이 얹혀 있다. 탑이 다섯 기나 있었다는데 정작 절집의 자취는 남아 있지 않고 사벌왕릉의 사당인 숭의각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석탑 옆에 사벌왕릉(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5호)이 있다. 원래 이 근방에 성읍(城邑) 국가 시대부터 사벌국이 있었는데 신라 첨해왕 때 멸망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사벌왕릉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왕자인 사벌대군 언창의 묘소로 비정하고 상산 박씨 문중에서 보호하고 있다. 신도비는 1954년에 건립되었고 왕릉을 수호하기 위한 재사가 석탑 너머에 있다.

▲ 영남의 수(首) 서원이라는 도남서원(道南書院).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담 너머로 찍은 사진이다.

상주보 인근의 도남서원(道南書院)은 굳게 잠겨 있었다. 이 서원은 1606년 정경세(1563~1633) 등이 영남 5현인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을 제향하기 위해 세웠고 뒤에 노수신, 류성룡, 정경세, 이준이 추가 배향되었다. 1676년(숙종 2년) 사액 되었으나 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2년부터 차례로 복원되었다.

▲ 오리섬의 변화. 원래 모습(위: 부산시민운동본부), 2010년(가운데 : 경향신문), 현재(상주시) 모습.

‘경천섬’이 된 ‘오리섬’, 모순형용의 ‘녹색성장, 그 민낯

 

서원 앞, 경천대 하류의 ‘오리섬’은 철새들이 머물면서 번식한 조그만 하중도(河中島)였다. 섬 주변에 넓게 발달한 모래톱이 아름다웠다고 했다. 그러나 오리섬은 상주보 건설과 함께 ‘경천섬’이 되었다. 섬 주변의 모래는 삽날에 찢겨 나가고 ‘생태공원’이 들어섰다.

 

예전에는 모래톱을 걸어서 들어갈 수 있었던 섬은, 이제 요란스럽게 꾸민 커다란 쇠 다리를 건너야 한다. 하얗게 빛나던 모래 대신에 섬에는 잘 구획된 길 주변에 듬성듬성 심어진 나무와 풀숲이 꾸며졌다. 그게 이 나라 토건족들이 꿈꾸었던 21세기, 모순 형용의 ‘녹색 성장’, 그 개발의 민낯이다.

 

 

2015. 7.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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