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탑’을 찾아서 ② 임하리의 탑들
[관련 글] 허물어진 절터에 마주 선 돌탑과 서당
작든 크든 탑이 있는 마을의 이름자에는 ‘탑’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의성군 금성면의 국보 제77호 의성 탑리 오층석탑이 서 있는 동네는 ‘탑리(塔里)’이고, 보물 제57호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이 있는 마을은 말 그대로 ‘탑을 지은 마을’, 조탑리(造塔里)다.
그러나 한두 기도 아닌 네 기의 탑을 품고 있는 마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는 그냥 임하리니 그 이름에서 탑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반변천이 흐르는 강가에 있다고 하여 임하(臨河)라는 이름을 얻었다. 임하리는 임하면 내앞마을(천전리)에서 임하댐으로 가다 강을 건너면 이르는 마을이다.
임하1리에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탑 네 기가 전한다. 이 석탑들은 형식으로 미루어 시대적으로 선후 관계를 갖는데 한 마을에 네 기의 석탑이 분포하고 있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석탑 간의 거리는 가깝게는 약 250m, 멀리는 400m가량 떨어져 있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현내(縣內)니 임하현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옛 안동 읍지 영가지(永嘉誌)에는 임하현 동쪽에 원림관사(元林關寺), 대사(大寺)라는 절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하현 치소(治所)의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임하리 동쪽에 있는 동 삼층석탑은 앞의 절 이름과 관련이 있는 거로 추정한다.
원래 안동지역은 불교 문화가 매우 발달한 곳이라 한다. 현재의 안동 시내에도 많은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임하리는 안동시의 동쪽 관문 격이니 여기 큰 절집이 있었을 것이라는 건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금은 폐교된 임하동부초등학교 앞 논에 서 있는 임하리 동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105호)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돌탑으로 높이는 4.27m이다. 그리 크지 않은 탑인 데다가 몸돌에 비해 짧은 지붕돌의 처마가 짧아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아이처럼 보인다.
체감률도 적어서 언뜻 안동지방 전탑의 느낌마저 풍긴다. 남쪽 면 초층 몸돌 복판에는 봉림사지 삼층석탑과 같은 형태의 네모난 문비(門扉:문이나 창의 한 짝)와 자물쇠 모양을 새겼다. 3층 지붕 위 상륜부는 복발석(覆鉢石)으로 보이는 석재 하나만 남았는데 뭔가 마무리가 덜 된 것처럼 허전하다.
논 가운데 보호 철책에 둘러싸여 탑은 호젓하게 서 있다. 지붕돌에 돌이끼가 잔뜩 끼어 있지만, 탑은 수백 년의 시간 따위와는 무관해 보인다. 논 여기저기 선 전봇대 사이를 가로지르는 전깃줄에 나란히 앉은 참새들의 지저귐에도 탑은 무연하기만 하다.
임하리 중앙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66호)은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탑으로 높이는 1.6m이다. 현재 위층 기단 갑석과 2층 지붕돌까지만 남아 있고 3층 몸돌 이상은 모두 소실되었다. 기단부도 소실된 것을 보수했다.
임하리 삼층석탑에서 느꼈던 답답함은 비교적 짧지 않게 뺀 추녀로 이룬 완만한 경사 덕분에 상쇄되는 듯하다. 낮고 조그만 탑인데도 가벼운 반전을 보여주는 지붕돌과 위층 갑석의 불균형 때문에 묘한 안정감을 연출한다.
탑은 한참 익어가는 볏논과 수확을 거의 끝낸 고추밭 사이에 서 있다. 위층 갑석 때문에 마치 모자를 돌려쓰고 있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 같기도 하다. 초층 몸돌에 비겨 급격하게 준 2층 몸돌의 높이 탓인가, 잃어버린 삼층을 상상하는 게 쉽지 않다.
임하리 십이지 삼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106호)은 마을 논 가운데 있는 3기의 탑 중 서쪽 끝에 있는 자그마한 탑이다.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2층 지붕돌까지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모두 없어졌다.
임하리 마을에 있는 탑들이 대개 큰 볼품이 없는 편이지만 이 탑의 경우는 어쩐지 서글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붕돌의 처마가 짧은 데다가 2층 이상의 몸돌이 죄 사라져 버린 탓이다. 앞서 소개한 두 기의 삼층석탑과 이 탑을 가르는 것은 12지(支)다.
아래층 기단 면석(面石)의 감실(龕室)에 춤추는 십이지상(十二支像)을 부조해 돌려놓은 것이다. 면석에 팔부신중을 새긴 탑으로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이, 인왕상을 새긴 곳은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이나 십이지상을 새긴 예는 없다고 한다.
이 탑은 ‘작으면서도 조각 장식이 아름답고 각부의 비례가 정제된 탑’으로 평가받는다. 1965년 해체 복원 당시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어 있으며, 같은 해에 주변 민가에서 동제 여래입상 1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마을 초입에서 만난 초로의 농부는 젊은 시절 경지정리를 할 적에 기왓조각들이 숱하게 나와서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임하리 오층석탑과 중앙 삼층석탑 부근에서는 당초문(唐草文) 와당을 비롯한 신라 또는 고려시대의 기왓조각이나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니 모두가 탑을 품고 있었던 절집의 흔적들이리라.
임하리의 마지막 탑은 ‘한절골’이라 불리는 마을 맨 위쪽 야산 중턱에 서 있는 임하리 오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제180호)이다. 한절골이란 이 마을에 옛날 큰절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니 앞서 이야기한 원림사를 말하는 것으로 짐작한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이 탑의 높이는 5.5m. 안동지역의 석탑으로서는 비교적 높은 편이다. 상륜부는 전체가 없어졌다. 주변에 머리 부분이 없어진 불상이 방치되어 있다. 탑 앞에 서면 임하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탑신부의 폭에 비해 기단부 폭은 상대적으로 좁다. 그러니 당연히 탑은 실제보다 훨씬 날씬하고 높아 보인다. 임하리에 선 4기의 탑 가운데 가장 안정된 형태다. 2층에서 5층까지의 체감률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초층에서 2층으로의 체감은 거의 절반이나 준 형태다.
탑 전체는 지붕돌이 대체로 두꺼운 편이고 처마도 짧아 전체 높이에 비하여 둔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가 없어 뭉툭한 오층 지붕돌이 마치 부풀어 오른 빵처럼 보이는 것도 수더분한 느낌을 더한다. 산기슭에 선 꽤 높은 탑인데도 주변의 풍광과 어그러지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그런 탑의 인상 때문인 듯하다.
탑 주변에는 주춧돌이나 연화대좌, 석불 등이 흩어져 있어 여기 매우 큰 절집이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게 한다. 전문가들은 동 삼층석탑과 함께 오층석탑 주변의 땅 밑에는 상당한 절의 기초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이 더 훼손되기 전에 발굴 조사되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 능선 위의 삼국시대 고분들과 함께 정비되는 게 좋겠지만 글쎄, 늘 예산이 뒷받침이 없으니 공염불에 그치는 수밖에 없다.
탑은 워낙 오랜 시간 마을과 함께 살아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따로 그걸 불탑으로 느끼기보다는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다못해 탑돌이라도 이루어질 듯하지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탑이야 원래 거기 있었던 거고, 우리야 유교식으로 제사 지내는 사람이니까…….”
길가에서 만난 주민은 그렇게 덤덤하게 말했다. 오래 유교적 범절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에게 불탑은 그냥 거기 선 바위나 나무 같은 존재였던 것이었을 뿐이었다.
성리학의 고장답게 임하리에는 번듯한 유명 반가가 세 군데나 있다. 안동 권씨 이우당 종택과 조선 숙종 때 대사간과 대사성을 지낸 김방걸(1623~1695)의 형과 아들이 각각 살던 집인 ‘양동댁’과 ‘오류헌’이 그것이다. 이우당 종택은 원래 이 마을에 붙박이로 내려온 반가지만, 양동댁과 오류헌은 각각 임하면 지례리에 있다가 임하댐 수몰로 이리로 옮겨왔다.
임하리 동 삼층석탑과 중앙 삼층석탑 사이에 있는 이우당(二愚堂) 종택(경북 민속자료 제49호)은 안동 권씨 이우당 권환(1580~1651)이 인조 18년(1640)에 지은 집이다. 사랑채는 영조 49년(1773)에 정침(正寢)을 수리하면서 지은 팔작지붕 집이다. 마을의 모든 건물은 북향인데 이 집만 북동향이다.
기단을 높게 쌓고 건물 주위로 난간을 둘렀는데 그러잖아도 날아갈 듯한 팔작집이 다소 위압적이다. 워낙 높은 집이어서 집에 오르는 계단을 자연석으로 꾸며 놓았는데 어쩐지 건물 전체와 외돌아진 느낌이다. 후손인 듯한 사람과 잠깐 얘기를 나누었는데, 어디 없이 관리의 문제가 심각한 듯했다. 집을 지키는 이는 고령의 안노인인 것이다.
이우당 종택과 반대 방향, 즉 임하댐 쪽의 덩그런 언덕에 양동댁(경북 민속자료 제58호)이 있다. 지촌 김방걸의 중형 김방형이 살던 집으로 1663년(현종 4)에 지었다. 후에 수산 김병종(1871~1931)의 집으로 바뀌었다. 여러 차례 중수하였으며, 본채와 사당, 외양간이 남아 있다.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안채로 통하는 문 옆에 사랑채가 높은 축대 위에 서 있다. 툇마루에 난간을 둘렀고, 수산재(秀山齋)라는 현판이 붙었다. 이 건물은 처마에 함석 물받이를 덧대는 등 전체적으로 손을 많이 봐 오래 묵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덜하다.
사랑채를 돌면 오른편 담장 끝에 중문 너머에 사당이다. 담 밖의 감나무에 달려 익어가는 감 몇 알, 사당 처마에 덧댄 함석 물받이의 붉은빛이 인상적이었다. 안채에는 부러 들어가지 않았다. 전통가옥을 아는 것도 아닌 사람이 공연히 주인을 성가시게 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었는데, 그게 별로 마뜩잖은 느낌이었다.
오류헌(五柳軒)은 김방걸의 셋째 아들 김원중이 천곡에 분가하면서 1678년(숙종 4)에 건립한 집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84호로 한절골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 대문간 등이 ㅁ자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의 정침은 여러 차례 보수하였으나 옛날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사랑채는 1920년경에 개축하였다. 이 사랑채의 당호(堂號)가 오류헌이다.
솟을대문이 덩그렇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마당은 양동댁보다 더 잘 가꾸어진 잔디밭이다. 사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인가, 날아갈 듯한 사랑채 앞에 커다란 비치 파라솔이 놓였고 대문에서부터 안채와 사랑채로 이어지는 통로엔 보도블록을 깔아 놓았다. 잔디밭과 보도블록, 그리고 비치 파라솔의 조합은 일종의 왜색의 느낌마저 풍긴다.
안채 구들 골을 청소할 수 있도록 한 구조, 사랑채에 줄을 당겨서 오르내리도록 한 승강식 감실, 물이 새지 않을 정도로 조밀하게 짠 마루 등이 이 집의 특징이라지만 후일을 기약하고 오류헌을 나선다. 솟을대문 양옆으로는 흙담이 가지런했다.
임하리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 임하댐 쪽으로 오르면 호계서원(虎溪書院)을 만난다. 임하댐 놀이 공원,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 등이 마련된 댐 아래 둔덕에 자리한 이 서원은 경북유형문화재 35호다. 서원철폐령 때 없어졌다가 7년 뒤에 강당만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이 서원은 조선 선조 6년(1573)에 월곡면 도곡동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처음에는 퇴계의 위패만 모셨으나 광해군 12년(1620)에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숙종 2년(1676)에 임금으로부터 ‘호계’라는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1973년 이곳으로 옮겨 다시 지었다.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이다. 평면상으로는 일자 집인데, 지붕의 양쪽 끝이 정면을 보고 있는 ㄷ자형의 매우 특이한 형태이다. 해마다 1번씩의 당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현재 퇴계는 도산서원, 학봉은 임천서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각각 위패가 옮아갔다.
대문이 잠겨 있어서 담 너머로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었다. 마당과 주변에 풀이 자욱하다. 차를 돌려 임하댐으로 오른다. 임하댐은 1992년 5월 완공된 다목적 댐이다. 댐 관리사무소와 임하댐 홍보관, 댐 준공 기념 건축물과 소공원 등이 곳곳에 있다.
맞은편 깎아지른 중턱에 흙의 속살을 드러낸 채 이어지는 산과 흰 구름 몇 점이 떠 있는 하늘과 어우러진 임하호는 맑고 깨끗해 보였다. 한때 탁도가 높아서 흙탕물이었던 시절에 비하면 옥수가 따로 없다. 선착장에는 묶어 둔 배 한 척이 외로웠다.
이 조그만 소도시 안동엔 댐이 두 개나 있다. 낙동강과 반변천이라는 풍부한 수원을 가진 덕분인 모양이다. 소양호를 가진 춘천은 ‘호반의 도시’라는데 두 개의 댐을 거느린 안동은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두 개의 댐 덕분에 안동이 얻은 건 안개다. 가을철로 접어들면서 안개는 이 도시 인근을 포위해 버린다. 그것은 한밤의 하늘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가 아침이 되면 지상에 시나브로 내려오는 것이다.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길, 다리 건너 탑의 마을 임하리에 날이 저물고 있었다.
2007. 10.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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