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 만대루의 추억
6·2 지방선거 날, 병산을 다녀왔다. 굳이 ‘병산서원’이라고 하지 않고 ‘병산’이라고 한 까닭은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거기서 아내와 함께 하회마을 길을 탔다. 병산에서 강변과 산을 타고 하회마을로 가는 이 길은 십 리 남짓.
우리는 애당초 길을 되짚어 올 생각이었다. 하회에 닿았을 때 우리는 더위와 허기에 지쳐 있었고 이미 시간도 정오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무 준비 없이 길을 나섰다는 사실을 뉘우치면서 우리는 마을 앞 장터에서 늦은 점심을 들었다.
부득이 딸애를 불러 우리는 병산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서원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후의 햇볕이 따가웠고 나는 만대루에서 잠깐 쉬어 가자고 했다. 우리는 음료수 깡통을 하나씩 들고서 만대루에 올랐다.
만대루는 병산서원의 강당인 입교당 앞에 세운 누각이다. 서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을 지나면 돌계단 너머 이 만만치 않은 규모의 2층 누각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그것도 눈높이에 들어오는 건 만대루의 예스럽고 듬직한 굵은 기둥뿐이다. 이 서원의 건물들은 비스듬한 구릉의 비탈에 일자로 죽 늘어서 있는 것이다.
당연히 복례문에서 바라보면 만대루가 위압적으로 앞을 가로막을 뿐, 정작 이 서원의 중심 건물인 입교당은 대청마루만 간신히 보인다. 만대루의 튼실한 기둥 사이를 지나 다시 돌계단을 오르면 서원의 안마당, 입교당 앞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뒤로 돌면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만대루가 호쾌하게 펼쳐진다.
통나무 계단으로 만대루에 오른다. 널찍한 누마루엔 사람들이 여기저기 계자난간을 등지고 사진을 찍거나 쉬고 있었다. 개방 이후, 만대루는 병산을 찾는 답사객들이 잊지 않고 쉬어 가는 휴식의 공간이 되었다. 원래 ‘휴식과 강학의 복합 공간’인 만대루는 지금도 그중 ‘한 노릇’은 계속하는 셈이다.
만대루, 그 ‘야만의 추억’
지금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세요’라 적힌 통나무를 깎은 계단에 ‘마루로 오르지 맙시다’라는 팻말이 놓여 있었던 때가 있었다. 외져서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데다가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던 때다. 어쩌다 찾는 이들이 먼지 쌓인 마루에 오르며 신발을 벗을 일은 없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저지른 ‘야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내가 처음 병산을 찾은 건 1994년이었다. 그해 예천의 한 시골 학교로 나는 복직했고, 어느 날 동료들과 함께 병산서원에 들렀다. 10월이었던 것 같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땅거미가 내리던 때였는데, 관리인은 서원의 문을 잠그고 출타하고 없었다.
어떡하냐고 쳐다보는 후배 교사들에게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월담하자구. 키 작은 여교사들의 발을 받쳐주고 우리는 서재(西齋) 옆 고직사로 뚫린 중문 옆의 담을 뛰어넘었다. 재바른 친구 하나가 가게에서 4홉들이 소주를 사 왔다. 우리는 무엄하게도 신발을 신은 채로 만대루로 올랐고, 거기서 건어포를 씹으며 소주를 비웠다.
어둠이 발밑까지 시나브로 밀려오는 가운데, 우리는 소리 죽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주 뵈는 어두컴컴한 병산(屛山) 아래 낙동강 강물이 어둠 속에 하얗게 빛을 내고 있던 걸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열여섯 해 전의 일이다. 그때 소주를 함께 마셨던 동료들은 지금 모두 어디서 살고 있나.
대여섯 해 전의 일이다. 다시 만대루를 동료들과 함께 찾은 건. 물론 예전의 그 사람들은 아니다. 열대여섯 명이 함께 한 전교조 분회의 답사 모임이었다. 10년 전과는 달리 저녁 무렵이 아니라 대낮이었다. 이미 만대루가 개방된 때라 우리는 바로 누마루로 올라 자리를 잡았다. 분회원 가운데 음악 교사가 준비한 가야금을 뜯었다.
주변의 답사객들도 숨을 죽이고 가야금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만대루의 계자난간에 기대어 나는 10년 전쯤의 저녁 무렵, 만대루에 내리던 어둠을, 동료들과 함께 마시던 소주 맛을 떠올렸다. 서른아홉, 불혹을 앞두고 학교로 돌아왔는데 거기 잘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던 시절이었다.
이후, 병산서원과 만대루는 지인들이 안동을 찾으면 반드시 들르는 여정의 하나가 되었다. 만대루에 마지막으로 들른 건 2008년 여름이다. 복직하고 두 번째로 부임한 학교에서 이태를 담임으로 만난 아이들과 만남에서다. 그날 찍은 사진들과 기억은 아직도 내게 오롯하게 남아 있다. [관련 글 : 그 아이들과의 10년, 1998에서 2008까지]
아내와 딸애가 마루에서 쉬는 동안 나는 사진기를 들고 연신 마루를 오르내렸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여러 각도에서 만대루를 렌즈에 담았다. 그러나 파일을 정리하면서 미처 담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걸 깨닫고 아쉬워하게 되는 걸 피할 도리는 없으리라.
만대루에선 ‘눕는 건 금기’
만대루를 개방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여전히 교통은 불편하지만, 여가를 즐기고 문화유산 답사가 보편화 되면서 병산을 찾는 이들도 부쩍 늘었고, 서원 관리도 자리를 잡았다. 이제 사람들은 익숙하게 마루에 올라 시간을 보내고, 저 왕조시대의 사대부들이 누렸던 호연지기를 형식으로나마 체험하곤 한다.
아마 하루도 만대루가 비어 있는 날은 없으리라. 사람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자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 쇠락해 가던 마룻장도 생기를 얻었다. 회백색 검박한 마루 빛깔은 관리가 제대로 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비로소 수백 년 세월의 켜를 조금씩 벗겨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만대루에 오를 때마다 거기 큰 대자로 누워 오수를 즐기고 싶어진다. 그러나 만대루에서 그것은 금기다. 만대루 위에 상주하다시피 하는 관리인이 행여 몸을 뉘는 이들을 점잖게 말리고 있다. 하기야 서애 류성룡을 모신, 흥선대원군의 서원 혁파에도 살아남은 이 유서 깊은 서원에서 몸을 뉘는 것은 예가 아니다.
만대루가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란 건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 웅장한 건물은 뒤편의 입교당과 묘우 등 인공적 건물과 앞에 펼쳐진 낙동강과 병산 등 자연 사이에 매개체 구실을 하는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복례문을 거쳐 오르면 ‘위압적’으로 앞을 가로막는다고 했지만, 통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으로 누마루에 올라 잠시만 머물러 보면 이 열네 칸 짜리 홑처마 팔작집이 결코 사람을 위압하는 것이 아니라, 넉넉하게 품어준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이 웅장한 목조 건축물은 아무것도 주장하거나 재지 않는다. 입교당 마루에 앉으면 한 단 아래에 세워진 이 커다란 누각은 눈 아래 수더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비록 그 아래 복례문을 가로막긴 하지만, 지붕 위로, 기둥 너머로 병산의 깎아지른 벼랑과 숲이 익숙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건물을 이루는 부재들이 그 ‘수더분’을 돕는다. 기둥과 보, 도리로 쓰인, 뒤틀리고 굽은 나무의 결은 널따란 마루에 오른 이들을 발길을 잡아매면서 하염없이 주변의 풍광을 바라보게 한다. 만대루 기둥 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7폭 병풍산은 두시(杜詩)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 ‘만대’를 웅변한다.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 만하고,
백곡회심유(白谷會深遊)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이 즐기기 좋구나.
만대루에서 내려와 강변에 선다. 꽤 넓은 백사장 저편에 병산의 녹음에 물든 낙동강이 흐른다. 하얀 양산을 받쳐 든 여인이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병산의 짙푸른 녹음을 싣고 강은 흘러 하회를 거쳐 구담(九潭)으로 흐른다. 그리고 이제 거기선 더는 구담 습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병산을 떠나기 전, 나는 다시 만대루를 되돌아보면서 생각했다. 언제쯤 어둠 살 내리는 만대루에서 저무는 강, 그 하얗게 빛나는 물빛을 바라보면서 소주를 마실 수 있을까. 혼자라도 좋고, 좋은 벗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으리. 나직이 신음하듯 ‘아아, 만대루, 만대루여…….’를 되뇌어도 좋으리.
2010. 6.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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