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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허물어진 절터에 마주 선 돌탑과 서당

by 낮달2018 2019.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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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탑’을 찾아서 ① 봉림사지 삼층석탑

▲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산 중턱에 서 있는 봉림사지(鳳林寺址) 삼층석탑

[관련 글] 탑의 마을, 안동 임하리(臨河里)

 

안동지역의 탑을 다룬 기사 ‘저 혼자 서 있는 탑들’을 쓴 건 지난 1월 초이다. 내친김에 주변의 예천, 영양, 의성 지역의 탑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나 안동에는 여전히 미처 얘기하지 못한 탑이 제법 많다.

 

사람들에게 잊히고 있는 탑을 찬찬히 다 돌아보자고 작정했지만, 지금껏 고작 몇 기의 탑을 더 찾아보는 데 그치고 있다. ‘나머지 탑’이라는, 좀 거시기한 이름을 붙인 까닭은 이 탑들이 그 중요도나 가치가 다른 탑들에 미치지 못해 시도 지정문화재거나 문화재 자료여서다.

 

문화재를 위계와 등급으로 매기는 것은 매정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 중요도에 따라 분류하지 않을 수는 없을 듯하다. 문화재 중 으뜸은 국가 지정문화재인데, 국보, 보물, 중요 무형문화재,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 민속자료 등이 포함된다. 그다음이 시도 지정문화재, 문화재 자료의 순이다.

▲ 3층 지붕돌이 없어 마치 이층탑처럼 보이는 봉림사지 삼층석탑.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산 중턱에 있다.

안동시 서후면 성곡리 산 중턱에 서 있는 봉림사지(鳳林寺址) 삼층석탑은 경북 문화재 자료 제69호다. 문화재 자료는 ‘시도지사가 국가 지정문화재 또는 시도 지정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은 문화재 중 향토문화 보존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시도 조례에 따라 지정한 문화재’이니 이 탑은 시도 지정문화재에도 들지 못할 만큼만 ‘중요한’ 탑인 셈이다.

 

나중에 확인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탑들의 만듦새나 규모 따위에 비한다면 봉림사지 탑은 매우 단정한 구조를 보여 결코 여느 탑에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자료에 머무는 까닭은 나는 알 길도 설명할 길도 없다.

 

특히 나머지 탑들이 대체로 절집과의 연관 없이 저 혼자 서 있지만, 이 탑은 그 연원이 봉림사라는 절로 알려져 있으니 이는 이 탑만이 가진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체로 이러한 탑들은 지역 주민들에게조차 ‘잊힌 탑’이다. 주변에 사는 사람들을 빼면 정작 이런 탑의 존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이다.

▲ 봉림정사. 경당 장흥효( 1564-1633)가 후진을 가르치던 서당 자리에 후손이 세운 건물이다.
▲ 황량한 겨울 풍경 속에 석탑이 외롭다.
▲ 봉림정사의 담장.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잡초가 우거졌다.

성곡리는 도시락 배달 덕분에 여러 해 동안 드나든 마을이다. 마을 오른쪽 뒤편에 봉림사지가 있다는 것은 알았고, 두 번에 걸쳐 탑을 찾았지만 허탕이었다. 주민들 대부분이 들에 나가 인적 없는 대낮의 시골 마을에서 길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세 번째 탐색 길에서야 겨우 봉림사터를 찾을 수 있었다.

 

새로 시멘트 포장을 마친 좁고 가파른 산 중턱 길을 한 5분쯤 오르면 오래된 고가 한 채가 우거진 수풀 너머에 나타나고, 그 앞에 관리인이 사는 듯한 스레트 건물 앞에 나지막한 돌탑 하나가 서 있다. 배롱나무의 붉고 화사한 꽃 너머로 팔작지붕을 치켜 올린 고가가 곧 봉림정사(鳳林精舍)다.

 

이 땅의 탑 모두가 그렇듯 낮은 철책으로 둘러싸인 탑 앞에 선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이 탑은 이중기단의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3.35m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하층 기단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초층 옥신에는 문비(門扉)와 자물쇠가 새겨져 있다. 3층의 옥개석은 없어졌고 옥개의 받침은 초층·2층이 각각 4단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위에 앙화(仰花)와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본래 이 터에는 봉림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봉림사는 조선 전기에 이미 폐사가 된 듯하다. 이 탑은 봉림사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마을에 살던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가 이 터에서 여묘(廬墓)살이를 하다가 후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길렀다. 뒤에 경당의 6대손인 장구봉에 이르러 봉림정사를 지었다.”

 

이 탑은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이나 몸돌[옥신(屋身), 탑신(塔身)]도 온전한데, 한 가지 흠은 마지막 3층의 옥개석(지붕돌)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 보았을 땐, 어정쩡한 2층(물론 2층탑은 없다)으로 보이기도 한다.

 

안정감을 갖춘, 매우 단정한 구조이면서 뭔가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초층 몸돌의 높이에 비해 2층 몸돌의 높이가 급격히 반으로 줄고 있어 이른바 체감율(遞減率)이 큰 탓이다. 탑의 높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이니 그 비율이 더욱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다.

▲ 초층 탑신에 새겨진 문비와 빗장(자물쇠).

문비(門扉)란 목조건물이나 건축물 내부를 통행하기 위한 출입시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탑과 부도에 등장하는데 사리 신앙이라는 사상적 배경으로 설명된다. 즉, 석재로 조성된 탑신에 공간성을 투시하여 내부공간의 존재를 암시하고, 사리가 봉안되었음을 강력히 알리기 위해 표현되었다. 아울러 빗장[자물쇠]의 표현은 외부로부터 사리를 보호하겠다는 의미가 더욱 강조되어 나타난 것이라 한다.

 

없어진 절집이나 탑과는 아무 관계 없이 거기다 서당을 지었다는 장흥효(張興孝, 1564∼1633)는 고려의 창업주 왕건을 도운 안동의 토호 삼태사(안동 김, 권, 장씨)의 한 사람인 장정필의 후손이다. 호는 경당(敬堂). 관직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영남학파의 발전 및 후진 양성에 힘썼다.

 

경당은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에게 배웠다. 퇴계의 학통을 이은 이 아홉 사람 중에 드는, 만만찮은 학문적 족적을 남긴 이다. 그는 생원이나 진사시험에조차 합격하지 않은 그야말로 처사(處士)로 일생을 살았다.

▲ 경당 장흥효가 후진을 가르쳤다는 광풍정. 서후면 금계리에 있다.

경당의 후진들에 대한 강학은 광풍정(光風亭)과 경광서당(鏡光書堂), 그리고 이 봉림정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그는 무남독녀 정부인(貞夫人) 장씨(1598~1680)를 재령인(載寧人) 이시명에게 출가시켰다. 사위 역시 퇴계의 학통을 이은 아홉 학자 중 한 사람이다.

 

‘힘들여 공부하지 않아도 뜻을 통달’할 만큼 총명했던 이 여인은 열아홉에 혼인해서 딸 둘과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성리학자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이 그 아들이다.

 

▲ 경당의 문집인 <경당집>(1818목판본)과 정부인 장씨가 지은 <음식디미방>(표지는 규곤시의방)

17세기를 살았던 총명했던 이 여인은 1997년 자신의 까마득한 후손인 작가 이문열의 부름을 받아 바야흐로 싹을 내리고 있는 여성주의에 대적할 수호천사로 등장하게 되는데,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 논쟁을 유발한 이문열의 장편소설 <선택>을 통해서였다.

 

동료 여교사의 ‘구역질 나는 작품’이라는 평가가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의 세계관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 그가 말하는 ‘자유’나 ‘보수’도 본래의 의미가 아니라, 왜곡되고 변질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까닭이다.

 

비판적인 의견을 거칠게 정리해 보면, 이문열이 말하는 ‘선택’은 현모양처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것의 가치, 사회공헌도, 아름다움만을 부각하면서 은근히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한 ‘선택’의 위험과 불안정을 강조할 뿐이라는 것이다. 소설 각 장 앞머리에 장씨 부인을 화자로 등장시켜 들려주는 말들은 그대로 이 작품의 주제이자 작가의 메시지다.

 

작가는 19세 때 학문의 길을 버리고(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올곧게 학자의 길을 갔을까? 그 시대에!) 아내와 어머니의 길을 선택한 정부인 장 씨는 전처소생을 포함 7형제를 훌륭하게 키우며 또 다른 성취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고 말하면서 우리 사회가 뒤늦게나마 주목하고 있는 ‘여성주의’를 적의로 가득 찬 시선으로 흘겨보고 있다.

 

페미니즘의 시각이 아니더라도 아내와 어머니의 길과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실현을 동류의 선택 항으로 바라보려는 것은 마초(macho)의 관점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위험한 시선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가 송경아가 주저 없이 그를 ‘최악’으로 꼽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리라.

▲ 봉림정사 처마에 지난 초파일에 썼던 듯한 연등이 죽 걸려 있다. 퇴계 학맥을 이은 고명한 성리학자의 유적에 연등이 걸리는 변화는 무엇일까.

각설, 관리인이 사는 듯한 슬레이트 건물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지만, 봉림정사 주변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잡풀이 우거진, 이끼 낀 담장 옆에 비스듬히 선 배롱나무의 붉고 화사한 꽃 빛이 오히려 애잔해 보였다. 정사 현판 아래 가로지른 들보 아래에는 줄을 치고 화려한 연등을 죽 걸어 놓았다.

 

고매한 성리학자의 후예들이 지은 정사에 부처님의 은혜를 기리는 등을 달게 한 것은 세월일까 아니면 시대의 변화일까. 푸르게 빛났지만, 여전히 8월의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2007. 9.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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