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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광복 65돌] 낡은 사진 속의 독립투사들

by 낮달2018 2019.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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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근대 안동> 책자 속에서 만나는 독립 투사들

▲ 독립운동 주역들. 김동삼, 김남수, 김재봉, 이육사, 이준태 등의 모습이 보인다.  ⓒ <근대안동>

사진으로 보는 ‘근대 안동’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태극기를 달았다. 하늘은 잔뜩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베란다의 국기봉 꽂이에 태극기를 꽂으며 보니 우리 동에 아직 국기를 단 집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저녁에 관리실에서 국기 게양을 알리는 방송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날씨를 재고 있었는지 모른다.

 

8시 반이 넘자, 천둥소리가 울리고 번개를 번쩍이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태극기는 깜빡 잊고 있었는데 아내가 걷어서 말린다고 창문턱에다 펴 놓았다. 비는 마치 양동이로 퍼붓듯이 기운차게 내린다. 장마를 잘 넘긴다고 하였더니 뒤늦은 장마가 오히려 드세다.

 

오늘은 광복 65돌이고 오는 29일이면 경술국치 100돌이다. 며칠 전에는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담화를 발표해 한국인들의 뜻에 ‘반(反)하여’ 식민지배가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또 불법적으로 가져간 ‘조선 왕실의궤’ 등 귀중 도서의 인도를 약속했다. 이 담화에 대해서는 ‘무라야마 담화’보다 진일보한 면이 있긴 하나 여전히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게 중평인 듯하다.

 

안동대학교 박물관이 연 ‘제8회 특별전시회’의 도록으로 펴낸 『사진으로 보는 근대 안동』을 펼쳐 본다. ‘독립운동과 주역들’이라는 항목으로 스물일곱 쪽의 사진이 실려 있다. 낯익은 석주 이상룡 일가, 일송 김동삼, 권오설, 김남수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3·1운동과 6·10만세 당시에 투옥되었던 지사들의 사진(대부분 수인번호가 찍힌 사진이다.)이 이어진다.

▲ 해방 직후 출옥한 조선 회복연구단원들의 기념촬영. ⓒ 근대안동

안동 농림학교 학생들의 ‘조선 회복연구단’

 

눈길을 끄는 사진 중에 까까머리 청년들이 모여 찍은 ‘조선 회복연구단’의 단체 사진 1장과 김지섭 의사의 사진 몇 장이 있다. ‘조선 회복연구단’? 낯선 조직이어서 인터넷에 검색했더니 안동농림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징병제 실시 등 식민교육을 강화하자 당시 안동 농림학교 학생들이 이에 조직적으로 저항하였으니 이른바 ‘안동 농림학교 항일 의거’다.

▲ 안동 농림학교 학생들의 항일기념비

농림학교 학생들이라 하지만 요즘처럼 철딱서니 없는 어린아이들이 아니다. 이들은 군영(軍營)이 되어버린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항공특공대와 신풍대(이른바 가미가제)에 끌려가기도 했다. 군인칙유를 암송하지 못하거나 일본어를 쓰지 않으면 처벌받았고 전교생이 대구와 영양의 군사기지 또는 부여 신궁 건설에 동원되기도 했다.

 

1943년 2월 9회생 전원이 대구 80연대에 가서 신체검사를 마치고 3월에 김형규와 김재규가 신풍대로 출병하게 되어 송별연이 벌어졌다. 이들이 ‘봉선화’, ‘나그네 설움’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하여 이십여 명이 정학을 당하였다.

 

1944년 10월, 일본을 위해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조국을 위해 떳떳이 목숨을 버리겠노라면서 권영동·윤동일·황병기·이준택·이갑용·김오섭·장인덕·김우현·이승태 등이 비밀결사를 조직하니 이 단체가 조선 회복연구단이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 쟁취’, ‘신사참배 반대’, ‘일제 식민지교육 반대’ 등의 기본방침을 정하고 헌병대와 경찰서 기습 등의 적극적 대일투쟁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 일을 앞두고 단원 60여 명이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좌절되었다. 체포된 이들 중 40여 명은 단순가담자로 석방되었으나 나머지 20여 명은 실형을 살게 된다.

 

사진은 1945년 8월 17일, 석방된 이들 단원이 성서신학원에 모여 찍은 기념사진이다. 까까머리에 갖가지 복식이 섞여 있어 해방 당시의 모습을 역력히 보여준다. 이들에게 조국은, 조국의 해방은 얼마만 한 감격이었을까. 이들의 항거를 기려 안동 농림학교(현재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교정에는 항일기념비가 세워졌다.

 

니주바시 투탄 의거의 김지섭 의사

 

▲ 김지섭 (1885~1928) 의사

김지섭(1885~1928) 의사는 ‘동경 니주바시(二重橋) 투탄 의거’의 주인공이다. 1923년 의열단에서 제공한 폭탄 3개와 권총 한 자루를 지니고 김지섭은 석탄 운반선의 석탄무더기 속에서 12일간이나 악전고투한 끝에 일본에 상륙한다.

 

그는 단신으로 일본 제국의회에 들어가 정부위원석에다 폭탄을 던져 일제 고관대작들을 폭살하려 했으나 제국의회가 무기 연기됨에 따라 계획을 수정, 일인들이 성역으로 숭상하는 일 황궁에 폭탄을 던지기로 한다. 1924년 1월 5일 밤, 김지섭은 황궁 앞 니주바시 사쿠라다 문(門)에 접근해 세 차례에 걸쳐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은 모두 불발하고 그는 체포된다.

 

폭탄의 불발원인은 12일간이나 습기 찬 배 밑에 있었던 탓에 폭탄에 녹이 슬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의거는 실패했으나 이 의거는 일제의 조야에 큰 충격을 던졌다. 그는 9개월간에 걸친 경찰과 검찰 조사, 그리고 예심 과정에서 끝까지 의거의 진상을 밝히지 않았다.

 

▲ 김지섭 의사와 부인

김지섭은 거사 9개월 뒤인 1924년 9월에 동경 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는 일제 재판관에게 무죄면 무죄, 사형이면 사형이지 무기징역이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여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25년의 공소 판결 역시 무기징역으로 확정되었다.

 

그는 일제의 재판과정에서 시종일관 당당하고 의연하였다. 그는 ‘세계 평화’를 위한 거사였다고 주장하고 총독 정치의 악랄성과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착취와 동포 생활의 빈곤을 들어 일제의 학정을 통박했다.

 

“이번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 정치에 도취되고 있는 일본 관민을 각성시키고 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한국 사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선언서에서도 명시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

 

그는 무기징역이 확정되자 그날부터 단식투쟁을 벌였다.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1928년 2월 24일 지바형무소에서 해방을 기원하며 순국했다. 향년 44세. 조국 독립에 바친 그의 삶에 대한 조국의 응답은 1962년에 수여된 ‘건국훈장 대통령장’이었다. 낙동강 강변의 정자 영호루 옆에는 선생의 기념비가 낙동강을 굽어보며 서 있다.

▲ 김지섭 의사  ⓒ  <근대안동>
▲ 김지섭 의사와 벗들 ⓒ <근대안동>
▲  안동 영호루 옆에 세워져 있는 김지섭 선생기념비

도록에 실린 선생의 사진은 모두 석 장이다. 한 장은 양복을 입고 찍은 독사진인데,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의 모습은 너무 얌전해서 일제의 심장 근처에서 폭탄을 던진 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친구들과 함께 찍은 다른 사진에서는 그는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흰 조선옷을 입었다.

 

마지막 한 장은 김지섭 의사가 부인과 함께 찍은 것이다. 조선옷을 입은 부인은 얌전하게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았고 그는 예복인 듯한 코트를 입고 오른편에 섰다. 사진의 설명은 부인과 찍었다는 게 다다. 이 사진은 그가 조국을 떠나면서 찍은 것일까.

 

젊은 아내 옆에서 의젓하게 서 있는 이 청년은 아내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던졌다. 그가 순국한 지 꼭 17년이 지나서야 조국은 해방되었다. 그리고 조국이 그의 삶을 기억하게 기린 것은 다시 17년이 지나서였다.

 

문득 역사의 격랑 속에 살아간 젊은이들과 그들의 꿈과 사랑을 생각해 보면서 예순다섯 돌 8·15, 광복절을 보낸다.

 

 

2010. 8.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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