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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물돌이동[하회(河回)] 주변을 거닐다

by 낮달2018 2019.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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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서원과 겸암정사 - 류운룡의 자취를 더듬으며

▲ 화천서원의 문루인 지산루. 예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돌기둥도 그리 경박해 보이진 않는다.

병산서원에서 나오던 길을 곧장 풍천으로 향했다. 부용대 아래 겸암정사에 들르고 싶어서였다. 화천서원(花川書院)을 거쳐 화산 부용대 너머 겸암정사로 가는 길을 택했다. 병산서원이 서애 류성룡(1542~1607)을 모신 서원이라면, 풍천면 광덕리(하회마을 건너편 마을)에는 서애의 형님인 겸암(謙菴) 류운룡(1539∼1601)을 배향한 화천서원이 있다.

 

1786년(정종 10)에 류운룡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병산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라는 점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훼철 이후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가 100여 년간 서당으로 이어져 오던 이 서원은 1996년 묘우(廟宇)와 문루, 동서재와 전사청(典祀廳) 등을 갖추어 복원되었다.

 

강(이 강이 낙동강 상류로 바로 화천이다) 건너 하회의 양진당(養眞堂)은 바로 겸암의 종택이며 풍산 류씨의 종가다. 겸암은 아우 성룡과 함께 퇴계 문하에서 수학했다. 음사(蔭仕)로 벼슬길로 나아갔지만, 출사와 퇴사를 거듭하였다. 물론 어머니의 신병, 어버이 봉양이 주된 이유다. 겸암의 잦은 퇴사(退仕) 덕분에 세 살 아래의 아우 서애가 집 걱정을 잊고 정사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사는 늘 승자의 편이고, 삶도 마찬가지다. 항렬과 가족의 위계 따위와는 상관없이 힘의 균형은 부와 권력(벼슬)의 크기에 비례해 기울어진다. 형제였지만, 영의정을 지낸 아우에 가려 겸암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서슬 푸른 대원군의 서원철폐령도 넘지 못할 만큼 서애와 풍산 류씨가 이룩한 성채는 높고 단단했다. 그러나 겸암을 모신 화천서원이 끝내 철폐되고 만 것은 그의 이름이 가진 한계였을지 모른다.

 

복원한 지 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건물들의 빛깔과 만듦새가 경박하지 않다. 문루인 지산루(地山樓)의 1층 대리석 돌기둥이 눈에 거슬리지만 못 보아줄 정도는 아니다. 여섯 짝의 분합문(分閤門 : 문을 열고 들어 올려서 서까래에 달린 걸이에 거는 문, 들어열개문)을 들어 올린 널찍한 대청이 시원하고, 검은빛이 도는 돌로 쌓은 축대가 예사롭지 않아서 여러 건물 중에서 단연 그윽한 깊이를 보여준다.

▲ 화천서원의 강당인 숭교당(崇敎堂). 분합문과 돌 축대가 예사롭지 않다.

서원에 딸린 살림집 입구에선 중년의 주인장이 창호지를 새로 바르려는지 문짝을 청소하고 있었고, 지산루의 널찍한 마루에는 주인 아낙이 검은콩을 펴 말리고 있었다. 콩이 좋아 보이네요. 살림하는 아낙들은 서로 통하는 게 많다. 아내가 넌지시 수작을 건네더니 금방 콩 한 되의 흥정이 이루어졌다. 약을 치지 않아서 모양이 곱지는 않지만 아주 실하다는 아낙의 자랑은 사실인 듯하다.

 

사당인 경덕사 뒤편의 산길을 10여 분 오르면 화산(花山) 부용대에 이른다. 부용대는 하회마을을 마주 보고 있는 절벽이다. 과거, 음력 7월 보름이면 이 대 아래서 시회(詩會)와 함께 유명한 선유(船遊) 줄불놀이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 강상류화(江上流花)는 하회별신굿과 함께 이 고장의 오랜 민간전승 놀이다.

▲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하회마을. 초가지붕의 질감 탓인지 마치 가상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용대에선 하회(河回, 물돌이)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저기 병산 앞에서부터 산밑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온 물굽이가 부용대 앞을 지나 동쪽 면에 부딪혀 돌아서 흐르는 것이다. 물론 잘 정비되어서겠지만 부용대에서 굽어보는 하회마을은 이 유서 깊은 동네가 숱한 나그네를 끌어모으는 이유를 넉넉하게 증명해 준다.

 

건너편 백사장에 잇닿은 솔밭이 만송정 숲이다. 이 소나무 군락은 450여 년 전 겸암이 마을 서쪽의 약한 지기(地氣)를 보완하기 위해 심은 일종의 비보림(裨補林)인데 역사·문화·경관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아 최근,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했다. 이 숲은 바람을 막는 방풍림과 모래를 막는 방사림 그리고 홍수 때는 낙동강의 범람까지 막아주는 방수림의 역할까지 맡고 있다.

▲ 겸암정사. 겸암정(謙巖亭) 현판은 퇴계가 썼다고 한다. 뒤에 살림집을 두고 있다.

부용대를 넘어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겸암이 학문 연구와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겸암정사가 있다. 이 당호는 퇴계가 겸암의 학문적 자질과 성실에 감복하여 지어준 이름인데, 겸암은 이를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한다. 명종 22년(1567)에 지었다는 이 정사는 높은 절벽 위에 남향으로 세워진 집인데 한창 보수 중이었다. 삽살개와 진돗개가 지키고 있는 어지러운 마당 한쪽에 겸암의 시 한 수가 새겨진 돌비가 있다.

 

받들어 차운함

가파른 암벽 붉은 벼랑은 아득하고 깊은데
구름안개 사라지니 천 길이나 푸르구나.
중천에 달은 밝고 산은 고요하고 적적한데
나는 듯이 뛰어올라 소리 높이 읊었네.

▲ 겸암정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왼편의 솔숲이 만송정 숲이다.

겸암이 이 정사를 지은 것은 스물여섯 살 때. 나룻배로만이 마을과 이어지는 이 외진 정사에서 겸암은 글을 읽었고, 일곱 해가 지나서야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아우 서애가 출사한 후 무려 9년 후였으니 입신의 순서부터 형제는 달랐던 셈이다.

 

정사의 누마루에 오르니 난간 너머 댓잎이 푸르다. 나뭇가지 사이로 화천의 하얀 모래톱과 만송정 숲이 아련하게 멀어 보인다. 십여 년 만의 방문이어서인가, 정사 뒷문 저쪽으로 이어지다 막히는 길에 수북했던 낙엽의 기억이 거짓말 같다. 기억은 단절되거나 왜곡되면서 나이를 먹어가는가.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데 시장기가 몰려왔다. 나이 먹어도 정직한 것은 몸이 침묵으로 일러주는 진실이다.

▲ 겸암정에서 굽어본 화산의 숲과 화천(花川). 가을빛이 완연하다.

 

 

2006. 12. 6. 낮달

 

 

물돌이동(河回) 주변을 거닐다

화천서원과 겸암정사-류운룡의 자취를 더듬으며

www.ohmynews.com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처음으로 송고한 기사다. 블로그를 처음 열고, 이런저런 일상을 기록하던 시기였다. 별로 망설이지 않고 시민기자로 등록한 뒤, 블로그에 쓴 글을 송고했는데, 바로 기사가 되었다. 독자를 상정하지 않고 쓴 글이라는 게 언뜻 드러나는 글이다.

 

이때, 3년 전에 마련한 똑딱이 카메라 올림푸스 C750UZ로 사진을 많이 찍고 다녔다. 화소도 낮고 본격 디에스엘아르(DSLR) 카메라에 비기면 좀 빠지는 편인데, 나름대로는 열심히 구도를 잡고 촬영을 했다. 아쉬운 점은 많아도 무언가 아련하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2019.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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