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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삶 ·세월 ·노래

남과 북의 두 ‘여정’, 혹은 사랑

by 낮달2018 2018.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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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삼지연관현악단 김옥주가 부른 ‘여정’

▲ 북한 삼지연관현악단의 실질적 보컬리더라는 김옥주의 노래 「여정」은 사랑의 본질을 환기해 준다.

남과 북의 두 ‘여정’

 

 평창 동계 올림픽 때 남쪽을 찾은 북측 예술단 서울 공연(2018.2.11.) 이야기는 그들이 돌아가고 난 2월 말께에 한 차례 했다. 나는 그들이 부르는 이남 노래를 들으며 12년 전, 금강산을 찾았을 때를 떠올렸고, 그 아련한 기억의 울림에 한동안 젖기도 했다. [관련 글 : 2006년 금강산, 그리고 2018년 서울]

 

 거기서 북한 가수 김옥주가 부른  ‘여정’에 대한 느낌도 짤막하게 밝혔었다. 김옥주의 노래를 듣기 전에 나는 남쪽 가수 가운데 왁스라는 이가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그의 얼굴은 물론, 그의 노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여정’의 곡조에 끌렸겠지만, 사실은 애절하고 다소 신파조인 가사에 더 끌렸던 것 같다. 나는 인터넷 검색으로  ‘여정’의 가사를 내려받았다. 눈으로 가사를 읽으며 정작 나는 가사보다는 제목인 여정이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보통 여정이라면 여행할 때 느끼게 되는 외로움이나 시름 따위의 감정을 뜻하는 여정(旅情)’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가사를 살펴보면 그거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나는 여자의 정[女情]’마음속 깊이 아직 남아 있는 정이나 생각[餘情]’ 가운데 하나일 거라고 우정 생각하기로 했다.

 

노랫말이 전하는 정보를 정리하면 화자는 사랑을 잃은 이다. 그것도 오래전이어서 그의 소식도 모르는 상태. 화자는 불빛이 흐느끼는 밤에 그를 생각하고, 자신의 사랑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나이를 헤아리면서 견뎌온 세월, 외로움의 눈물을 흘린다.

 

고상하거나 유치하거나, 그러나 사랑의 본질은 같다

 

그리고 생각한다. 자신들이 미치도록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사랑이 식기 전에 그를 보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급기야 화자는 단 한 번만 내게 돌아와달라고 애원한다. 자신의 눈물이 마르기 전에, 사랑이 식기 전에. 그러나 가려가든 오지 마라는 것만은 꼭 기억해 달라고 한다. 그는 다시 사랑을 잃는 아픔에 빠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어떤 특정한 형태나 빛깔로 정의할 수 없다. 숨 쉬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형색의 사랑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때로 세련된 모양새이기도 하고, 더러는 치기 어린 모습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보이거나 드러나는 모습일 뿐, 그것이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어떤 사랑은 세련되고 고상하며, 또 어떤 사랑은 유치 찬란한가. 글쎄, 난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랑은 그 주인공들이 맞닥뜨린 상황과 장면 속에서 다 나름의 진실과 진정성을 얻으면서 비로소 사랑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사랑이 어떤 모습을 하든, 어떤 빛깔과 향기를 갖든, 사랑은 황홀한 기쁨이거나 고통의 심연이고, 참혹한 상실이고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다. 그것은 무한한 관용이고, 고통스러운 질투이고,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다.

 

 ‘여정’은 왁스가 부른 원곡을 비롯하여 여러 가수의 판(버전)이 있다. 서문탁, 강인한, 강지민, 권인하, 등이 부른  ‘여정’을 무심히 들어보았지만 역시 누구 노래가 제일 낫다고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무릇 모든 가수의 노래란 나름의 빛깔과 내음이 있는 까닭이다.

▲ 이름만 알고 있었던 가수 왁스의 음색은 맑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여정'은 훨씬 담담하고 원숙했다.

왁스의 노래는 좀 맑았다. 글쎄, 그의 노래는 이별과 사랑을 훨씬 담담하게 고백하는 듯했다. 창법이 그래서인지, 나이 들면서 원숙해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나머지 남녀 가수들의 노래도 나쁘지 않았다. 서문탁과 강인한의 노래는 음색이 특이해서였을까, 오히려 그게 노랫말이 전하는 정서에 몰입하는 걸 방해하는 듯도 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나는  ‘여정’을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의 실질적 보컬 리더라는 김옥주의 목소리로 다시 들었다. 다시 새롭게 피어나는 감흥으로 나는 거푸 그의 노래를 들었다. 그의 창법이 트로트여서 그랬을까. 나는 들을 때마다 그가 애절하게 뇌는 노랫말에 몰입할 수 있었다.

 

대체 미치도록사랑하는 것은 어떤 걸까. 아무도 그걸 정의하지 못해도 모든 연인은 미치도록 사랑을 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좌절한다. ‘무던히도 참아야 하는 이유도 사랑에서 비롯한다. 김옥주의 여정은 그런 사랑의 감정을 명징하게 환기해 주었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 북한 가수다. 잘은 모르되, 개인의 취향에 따라 노래하거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사회주의 음악의 목표에 따른 활동을 과업으로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의 트로트 창법이 북에서도 용인되는 것인지, 자본주의 남한의 대중가요를 부르는 과정에서 익힌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김옥주의 노래가 환기해 주는 사랑, 혹은 정서적 동질감

 

그러나 그가 부르는  ‘여정’의 소절 소절마다 노랫말이 전하는 애상의 절절한 정서가 배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트로트 창법이라 해도 그의 노래는 김연자나 주현미처럼 간드러지진 않은 대신 다른 가수가 부르는 것보다 훨씬 깊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미자의 노래, 동백 아가씨그리움을 가슴마다는 이미자가 불러야 제격이다. 주현미나 김연자가 부르는 순간, 그것은 우리가 기왕의 알던 노래와 다른 노래가 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게 이미자의 가치고 브랜드며, 그의 노래에 깃들인 아우라가 아니던가.

 

원곡을 부른 가수 왁스의  ‘여정’보다 김옥주의  ‘여정’이 내게 더 탐탁하게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분단 상황이 낳은 정서 탓일 수도 있다. 사회주의 이북 가수가 부르는 자본주의 이남 노래에서 우리는 남북이 시방도 실낱처럼 이어가고 있는 정서적 동질감을 애써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동영상 삼지연 관현악단이 부른 남한 가요 종합 모음을 실행해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목과 어깨, 그리고 팔뚝을 드러낸 긴 드레스를 입은 여가수들이 보여주는 우아한 춤사위를 눈여겨보면서 나는 그게 이른바 사회주의적 절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여정’의 노랫말을 곰곰 되씹으며 대중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잃어버린 어떤 감정의 편린들, 그게 사랑인지 추억인지를 곰곰 생각할까. 사랑을 떠나보낸 어느 젊은 날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삶의 길목을 새삼 되돌아볼까. 김옥주가 환기해 주는 사랑의 본질을 떠올리며 다시 그의 노래  ‘여정’의 단추를 누른다.

 

 

2018. 7.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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