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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삶 ·세월 ·노래

노래, 오래된 기억들

by 낮달2018 2019.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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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의 열망을 하나로 묶어준 노래들

▲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1992, 장산곶매)의 한 장면. 전교조 사태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다.

 

지난해 어느 활동가의 장례식에서였다. 의식 가운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순서가 있었다. 무심코 시작했는데, 한때는 입만 떼면 부르던 그 노래가 갑자기 너무 낯설게 다가오고 있음을 나는 알았다. 설마, 하면서도 나는 노래의 중간쯤에서 이미 가사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던 것이다.

 

변혁의 열망을 하나로 묶어준 노래들

 

바보처럼 소리 없이 입만 벌리다가 노래 말미께서 간신히 그 익숙했던 노래를 따라잡았다. 의례가 끝났을 때 나는 갑자기 내가 그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 날부터 집회에 가는 날보다 가지 않는 날이 많아지고, 그예 집회와는 무관한 일상에 푹 파묻히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시위와 집회 현장을 달군 것은 변혁의 열망으로 모인 사람들만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마저 하나로 묶어준 ‘노래’가 아니었나 싶다. 이른바 이들 ‘민중가요’는 뜨거운 연대를 확인해주면서 동시에 때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확신으로, 두려움을 넘어 벅찬 용기로 다가왔던 듯하다.

 

▲ '80년대 한국사회의 피 묻은 순수의 상징' 윤선애

88년도였던가, 사학 재단의 비교육적 학교 운영과 횡포 앞에 분노해 일어선 어느 사립 여학교 학생들의 농성장을 격려 방문했을 때 교사들이 불러주던 ‘상록수’의 낮고 힘찬 가락을 나는 잊지 못한다. 해직 시절 어느 해, 탑골공원의 약식집회에서 어떤 여교사가 육성으로 불러주던 ‘누가 내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도 잊지 못한다.

 

그 청아한 고음의 젊은 여교사가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맑은 목소리는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그것은 일상의 무력감과 보이지 않는 전망 때문에 비틀거리던 자신에게 비수같이 날카로운 깨달음과 뿌옇던 눈앞의 안개를 개운하게 걷어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저께 무심히 인터넷을 기웃거리다가 만난 노래가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다. 전교조 문화국에서 낸 테이프에 실린 이 윤선애의 노래는 아마 창립 이듬해인 90년께 발표된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윤선애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다. ‘80년대 시위 군중을 압도했던 조그마한 여학생’이라는 소개도 낯설다. 글쎄, 어떤 집회에서 그녀를, 그 목소리를 만났던가?

 

음악평론가 강헌은 그의 목소리를 “80년대 한국 사회의 피 묻은 순수의 상징”이라 했고, ‘메아리’와 ‘새벽’, ‘노찾사’ 등과의 인연은 가끔 귀동냥으로 들은 듯하다. 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노래로 ‘저 평등의 땅에’도 있다는데, 글쎄 그것도 긴가민가 싶다. ‘낭만 아줌마’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정보도 난생처음이다.

 

그 청아한 목소리…,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90년이라면 여전히 탄압의 서슬이 푸르던 때다. 경찰의 정보망을 피해 안개를 피워놓고 엉뚱한 장소에서 교사대회를 열고 집회마다 최루탄을 덮어쓰던 때였는데 그때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노래한 곡이 바로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다.

 

첫발의 어려움과 시련을 곧이곧대로 제목으로 삼았다.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울듯’ 시작은 언제로 외롭고 슬프다. 그래서 ‘시작하는 사람들의 눈물은 미래를 바라보는 망원경’이다. 눈물 속에 바라보는 미래, 그러나 거기서 피는 것은 진실이다.

 

‘앞을 보라 당당히 가자’는 가슴 벅찬 선언이다. ‘자유는 그 꽃을 향한 미소’다. 그래서 노래한다. ‘가자 승리 위해’. 서로를 돕고 어깨 겯는 이들은 ‘함께 가는 길벗’이니 이 험한 세상, 무엇이 두려우랴. 잘 끼지 않는 헤드셋을 끼고 윤선애의 목소리로 그 노래를 듣는다.

 

어느 새 길목까지 봄. 다시 새 학년도의 시작이다. 시작은 눈물이 아니더라도 갈 길은 멀다. 새 정부의 ‘묻지 마’ 좌충우돌 정책의 유탄은 고스란히 아이들이나 학부모의 어깨를 짓누를 터이다. ‘시작은 눈물로’라는 노래의 울림이 남다른 까닭이다. 소리를 조금 높이고 노래를 되풀이해 듣는 마음은 울적할 수밖에 없다.

 

 

2008. 3.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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