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희가 부른 박인환의 즉흥시 ‘세월이 가면’
얼마 전 김수영을 가르치면서 1950년대 <후반기> 동인 활동을 같이 했던 박인환(1926~1956)을 잠깐 소개한 적이 있다. 그의 시 <목마와 숙녀>와 <세월이 가면>을 읽어주었고, 그가 보여준 댄디즘과 1950년대의 분위기를 잠깐 언급하기도 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목마와 숙녀>로 박인환과 만났다. 중학교 3학년, 한림(翰林)출판사에서 간행한 하얀 색 하드커버의 <한국의 영원한 명시>, 그 세로쓰기 시집에서 만난 그 시를 나는 금방 외워버렸다. 지금도 더듬지 않고 그 시를 외울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 때의 흐려지지 않은 총기(聰氣) 덕분이다.
<목마와 숙녀>가 무엇을 노래한 시였던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장황한 서술 속에 자리한 ‘문학’과 ‘인생’ 따위의 낱말들에 열여섯 문학소년은 매료되어 버렸던 것이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무엇이 외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와 같은 시구에 흠뻑 빠져 있었던 시기였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1882~1941)’가 무슨 버지니아 주쯤에 사는 늑대인 줄 알았다. 그이가 영국의 소설가라는 사실을 깨우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나서였다. 시는커녕, 산문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던 치기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수려한 외모의 댄디보이였던 박인환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좀 그랬다. 정작 <목마와 숙녀>나 <세월이 가면>과 같은 몇 편의 시와 일화로 50년대를 수놓았던 전설의 시인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태 전에 미발표 시 몇 편이 발표되면서 그 평가도 한 고비를 넘긴 듯하다.
미발표 시 7편 중에서 현실 비판 및 반제국주의적 시편들이 눈에 띄면서 그의 시를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고 한다. 미군정기에 쓰인 시 <인천항>은 박인환의 ‘낯선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성조기 펄럭이는 ‘가난한 조선의 프로필’]
그러나 여전히 박인환 시는 <세월이 가면>에서 빚어지는 울림으로 쉬 기억된다. 세월이 앗아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는 이 시에 묻어나는 것은 회고와 허무의 정서다. 이러한 박인환을 가리켜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다”며 경멸했던 이는 그의 가장 절친한 벗 김수영이었다던가.
박인환과 막역했던 작가 이봉구가 쓴 <명동백작>에 따르면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이 죽기 얼마 전에 쓴 시다. 1956년 이른 봄, 장소는 폐허의 명동, 어느 대폿집이다. 박인환은 이진섭, 송지영, 가수 나애심 등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면서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지만 그녀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를 넘겨다보고 있던 이진섭도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중에 ‘명동백작’ 이봉구와 함께 합석한 테너 임만섭이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하자, 부근을 지나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냈다.
이봉구는 이 불후의 ‘명동 샹송’이 탄생하던 때를 “명동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라고 회상하곤 했는데, 박인환의 부음이 전해지자 ‘세월이 가면’이 명동 거리를 채우며 울려 퍼졌다고 하니 이는 문학이 한 시대와 만나던 시절의 따뜻한 풍경이다.
아침부터 여름비가 내리고 있다. 가문 땅에 내리는 비는 축복이다. 이렇게 축축한 날이면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이 주는 울림이 제격이다. 가수 박인희가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반세기를 넘어 1950년대, 폐허의 수도에 어지러웠던 데카당스(Décadence: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전파된 퇴폐적인 경향 또는 예술운동)를 생각한다.
2008. 5. 28.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삶 ·세월 ·노래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이 노래가 서른 살이 됐다 (2) | 2019.01.24 |
---|---|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2) | 2019.01.22 |
노래, 오래된 기억들 (0) | 2019.01.09 |
그 노래의 울림, 멕시코 민요 제비 (0) | 2018.12.30 |
남과 북의 두 ‘여정’, 혹은 사랑 (0) | 2018.12.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