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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삶 ·세월 ·노래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by 낮달2018 2019.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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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철의 노래 ‘꽃다지’를 들으며

▲ 9월의 교정. 가을은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찾아왔나. 꽃은 벌써 시들고 있는 중이다.

맥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2학기 개학을 하면서부터다. 낯익은 자리에 다시 서긴 했는데, 어쩐지 그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불현듯 정처를 잃어 버렸다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무언가에 마음을 붙이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그게 홀연히 사라진 것 같았다고나 할까.

 

대체 나는 무얼 바라고 지내왔던가. 내가 기다렸던 것은 이름뿐인 여름방학이었고, 마지막 남은 일주일의 휴식이었던 것일까. 방학 끝 무렵, 벗들과 함께 보낸 거제도에서의 2박 3일이 그나마 애틋한 시간으로 떠오른다.

 

오전엔 수업을 하고 오후엔 쉬던 방학 생활에 몸이 너무 편했던가. 다시 하루 5~6시간의 수업에 적응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방학내 선선하더니 개학과 함께 반짝 더위가 찾아왔고, 다시 황망한 여름의 끝이다.

 

수업도, 책읽기와 글쓰기도 심드렁해졌다.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는 때가 많아졌다. 막상 섣부른 잡념 따위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습관적으로 출근하면서, 수업을 하고 제 시간에 퇴근하면서 우정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사는 게 왜 이리 재미가 없나…….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즐겁고 발랄하다. 무시로 아이들은 깔깔대고 화들짝 폭소를 터뜨리고, 때로 시무룩해졌다가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된다. 너희들은 좋겠다. 즐거워서……. 나는 아무 재미가 없구나……. 아이들은 특유의 정감어린 시선으로 교사를 근심스럽게 응시한다.

 

늦여름, 악을 쓰듯 매미가 울어댄다. 가끔씩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 앉아 있으면 매미소리는 마치 점령군처럼 실내로 밀려들어오는 것 같다.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은 이 계절의 순환을 환기해 준다. 시절이 하 수상하든 말든, 계절은 어김없이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뉴스 보기가 두렵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 이상 흰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정치·사회·경제·문화……, 여러 분야에서 시나브로 지난 세월의 흔적이 세탁되고 있는 중이다. 이미 세상은 완벽하게 30년 전의 권위주의 시대로 퇴행해 버린 것이다.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위협받고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는 마치 잃어버린 연인처럼 애처롭다. ‘성장’의 길목에 그건 ‘호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거의 낡은 잣대로 미래를 재단하고 있는 형국이다.

 

바야흐로 우리 사회는 명백한 계급 대립 시대를 맞은 것처럼 보인다. 80년대식 표현으로 하면 ‘한줌도 안 되는 무리들이 이 땅의 모든 권력을 움켜쥐고 나머지 모두의 삶을 뒤흔드는’……. 최후의 판관 역할을 맡아야 할 사법부마저도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하나씩 확인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니 더 무엇을 말하랴.

 

언제부턴가 가끔 입버릇처럼 민중가요 ‘꽃다지’의 첫 소절을 자꾸 흥얼거린다. ‘외로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작업장 언덕길에 핀 꽃다지…….’ 그러다가 오늘은 ‘진보넷’에서 1990년 인천민중문화예술운동이 만든 ‘꽃다지’를 들어본다.

선이 굵은 여성의 목소리다. 매끄럽지 않은 그 목소리에 실린 힘과 진정성 때문인가. 한동안 입맛 벙긋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이건 또 뭐야. ‘나 오늘밤 캄캄한 창살 안에 몸 뒤척일 힘조차 없어라’. 아, 나는 ‘작업장’을 노동의 현장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작업장은 징역 사는 이들의 노역장이었구나…….

 

 아하, 나는 지금 저도 몰래 가을을 타고 있는 셈인가.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다. 헤드셋을 끼고 있지 않았다면 이웃 동료들에게 내 우스꽝스런 모습을 들켰을지 모르겠다. 용산 참사 추모문화제는 강제 해산당하고, 쌍용차 노동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한 진보논객은 몇 군데 대학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세상은 계절의 순환과 무관하게 흘러간다.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나는 ‘꽃다지’를 거듭 듣고 또 듣는다.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는 구절의 뜻이 별나게 마음에 닿아오는 것이다. 그렇다, 그립더라도 뒤돌아보지 말자. 정말 뒤돌아보지 말자.

 

 

2009. 9. 3. 낮달

 

 

이 글은 이명박 정부 2년차 가을에 쓴 글이다. 가을을 타고 있기도 했고, 용산참사와 쌍용차 노동자 이야기에 얽힌 어지러운 뉴스에 마음이 흔들렸던가 보았다. 그 마음이 읽는이에게도 전해졌는가. 어느 독자는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고 나는 거기에 큰 위로를 받았다.

 

나무 2009/09/04 05:24

선생님의 '뒤돌아보지 말자' 라는 그 마음이 가슴으로 스며 옵니다.

가을 들녘의 스산한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습니다.

먼 곳에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힘 내십시오...

 

‘꽃다지’의 작곡자 김호철의 ‘파업가 30주년 헌정 음반’이 나왔다. ‘노동의 소리’'에서 판매 중이다. 헌정 음반의 '꽃다지'는 인천민중문화예술운동에서 만든 '꽃다지'와 느낌이 다르다. '어느 것이 좋다'를 떠나서 조금씩 다른 감정의 결을 노래한다. [관련 글 :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이 노래가 서른 살이 됐다]

 

그러고 보니 이때로부터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나는 학교를 떠났고, 김호철은 헌정음반을 냈다. 그와 내가 공유했던 세상, 그 노동과 투쟁의 시간을 무심히 되돌아본다.

 

2019.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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