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을 축하하는 북측 예술단이 두 차례의 공연을 마치고 지난 11일에 북으로 돌아갔다. ‘평창’을 굳이 ‘평양’으로 읽고 싶어 하는 극우단체들이 공연을 따라다니며 반대 집회를 벌였지만 이들은 공연을 관람한 시민들로부터 따뜻한 환영과 함께 큰 박수도 받았다.
삼지연관현악단이 불러준 우리 대중가요
강릉의 첫 공연은 공중파의 녹화 중계로 볼 수 있었지만 서울 공연은 따로 중계가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인터넷 유튜브에는 중계방송 대신 길고 짧은 동영상이 여러 편 올라와 있었다. 나는 그 중 ‘삼지연 관현악단이 부른 남한 가요 종합 모음’이라는 26분짜리 동영상을 내려받았다.
나는 깊숙이 의자에 몸을 파묻고 컴퓨터 모니터로 북한 예술단 공연을 시청했다. 나는 왁스가 불렀다는 ‘여정’이란 노래를 북한 여가수 버전으로 처음 들었다. “사랑했어 사랑했어 우린 미치도록 사랑했었어”라고 하는 노랫말이 애절하게 마음에 닿아왔다.
26분은 금방이었다. 나는 파일을 다시 실행해서 다시 처음부터 동영상을 들여다보았다. 똑같은 내용이건만 볼 때마다 느낌이 새로워서 나는 하염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연주와 노래 속에서 어떤 공감을 찾고 있었던 것일까.
‘녀성 2중창’ ‘제이(J)에게’로 시작해서 ‘홀로 아리랑’으로 끝나는 26분의 공연의 어디쯤이 ‘사회주의’와 ‘혁명’, 그리고 ‘주체사상’과 연관되는지 나는 모른다. 남한의 대중들이 일상적으로 부르던 유행가를 그들은 익숙한 곡조로 불렀다.
거기엔 남한의 가수들이 부르던 것과 같은 ‘꺾임’ 따위는 없었지만 노랫말이 환기하는 정서는 다르지 않았다. 목과 어깨, 그리고 팔뚝을 드러낸 긴 드레스를 입은 여가수들은 우아하게 몸을 흔들며 대중들의 사랑과 이별을 노래했다.
혼자서, 둘이서, 그리고 여럿이서 같은 동작으로 추는 점잖은 춤사위와 함께 자신이 부르는 노랫말의 정서를 표정과 목소리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남의 직업 가수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최소한의 노출로 여민 몸매, 자연스러운 절제를 통해 갈무리하고 있는 격렬한 감정이 말하자면 사회주의와 이어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염없이 동영상을 돌려보면서 나는 10년도 전에 금강산에서 만났던 모란봉 교예단의 서커스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열린 그 공연은 1시간 30분 동안 이어졌고, 공연 내내 나는 마법에 걸린 듯 울음을 삼켜야 했다. [관련 기사 : 2006 겨울과 봄 사이, 금강산 ]
2006년 1월, 금강산의 기억
2006년 1월이었다. 나는 640명의 국어와 역사 교사들과 함께 교육부의 금강산 교원연수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것은 30여 년 동안의 교직 생활에서 내가 나랏돈으로 오른 유일한 ‘나라 밖(?)’ 여행이었다. 난생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금단의 땅에 발을 디디면서 교사들은 조금은 긴장하면서도 새로 만날 북녘의 땅과 사람들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던 것 같다.
북한의 식량 상황이 심각하던 시기여서 교사들은 어쩌면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아우를 찾은 형편 넉넉한 형 같은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 앞에는 가난한 동포들을 업신여기지 않으면서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당위와 저도 몰래 우러나오는 연민의 감정을 추슬러야 하는 과제가 놓여 있었다.
분단 반세기가 넘어서야 이루어지는 민족 내부 교류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복합적인 '불편함'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무례한 틈입자처럼 찾아온 관광객의 모습으로 겨레의 남루한 삶을 목도하고 있다는 자각은 결코 개운한 느낌만은 아니었다.
‘신성하게’ 서 있는 ‘수령님 교시와 흔적’을 뜨악하게 바라보면서, 충분한 방한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초라한 입성의 안내원들 안내를 따라 산을 오르내린 남쪽 관광객들은 새삼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구질구질한 가난이 자신의 여유와 부를 오히려 입증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섣부른 우월감 따위를 말이다.
나는 산을 오르내리며 만난 남녀 안내원 동무들에게 나와 동료들이 두메산골에 기어든 ‘양복쟁이’의 모습으로 비추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자본주의에 대한 그들의 적의와 경멸이 온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우리의 동정과 연민도 그리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먹을 때 친절하게 시중을 들던 제복의 접대원 동무들, 그들의 별로 세련되지 못한 수더분한 촌색시 같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긴장은 제풀에 풀어졌다. 어느 결엔가 우리는 무관한 사이가 된 듯해서 유쾌하게 농을 주고받기도 했다.
문화회관에서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관람한 것은 바로 그날 오후였다. 애당초 그런 구경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들의 이름난 서커스를 굳이 피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과연 그들이 보여준 교예는 놀라웠다. 남쪽의 관광객들은 그들의 놀라운 묘기에 환호하면서 거푸 사진을 찍어댔다.
한 차례 기예를 선보인 단원들은 우아하게 왼팔을 치켜들고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답례했다. 그 자그마한 몸집의 단원들이 짓던 미소, 그들이 보여준 인간의 육체가 표현할 수 있는 극한의 조형미들, 초인적 기예 앞에 환호하며, 손뼉을 쳐대는 관객들 속에서 나는 내내 소리죽여 울었던 것이다.
금강산에서 되새긴 ‘피의 기억’들
나는 금강산에서의 내 눈물을, 내 오열을 설명할 수 없었다. 누구는 그들의 초인적 기예 뒤에 숨은 인고의 시간과 그 고통을 떠올리고, 누구는 개인의 삶을 규정해 내는 체제의 억압을 떠올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편벽한 자본주의적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놀라운 기예와 자랑, 말 없는 긍지와 자부가 그들의 고단하고 남루한 삶을 뛰어넘으려는 눈물겨운 자존으로 이해되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배부른 이남의 관광객들에게 재주를 팔면서도 잃지 않는 그들의 당당함이, 그들의 재주 앞에 과장된 찬사를 바치면서도 시혜자의 연민과 동정을 벗지 못하는 남쪽 사람들의 근시가 가슴 아팠다.
나는 금강산에서의 2박 3일을 떠나면서 우리가 만난 것은 한갓진 겨울 명산이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들의 온기와 체취였다고 정리했다. 금강산 호텔 접대원 함혜영 동무와 삼일포를 함께 걸었던 구조대 청년의 수줍던 미소를 거칠고 공격적인 억양의 말씨 속에 숨어 있는 따뜻한 동포애를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길이 공정하다기보다 치우치고 있다는 점을 나는 인정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의도된 '과잉 친절'과 한겨레라는 핏줄에 기대는 '과장된 감동'이 오히려 다른 체제와 삶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단 60년의 세월이 이 땅에, 겨레들의 가슴에 남긴 증오와 저주의 흉터와 생채기들을 아물게 하고 지우기 위해서는 아직도 얼마든지 더 치우쳐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정치적 통일'에 앞서 저마다 핏줄을 관류하는 ‘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조그마한 해원(解寃)의 씻김굿이라고 보아도 좋을 터라고 말이다.
금강산을 떠나면서 나는 가능하면 빨리 아내와 함께 금강산을 찾으리라고 마음먹었지만, 금강산이 막힌 것은 불과 이태 후인 2008년 7월이었다. 그리고 다시 10년, 보수 정권 9년 만에 남북 관계는 얼어붙었고 교류를 물론 핫라인까지 끊어졌다.[관련 글: 1998년 오늘-금강선 유람선 ‘현대 금강호’ 첫 출항]
북핵이 남북 평화를 위협하는 걸림돌로 다시 등장하면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시간이 또 얼마였던가. 다행히 남북의 화해 협력을 통해 남북 평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문재인 정부가 들인 공이 헛되지 않아서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교류가 새로 시작된 것이다.
보수 세력들의 알레르기 반응에도 불구하고 추첨을 통해 삼지연 관현악단 특별공연 관람권을 얻어 공연을 즐긴 시민들이 공감과 환호의 의미도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도 단순히 공연을 즐긴 것이라기보다는 음악을 나누면서 오랜 단절로 바래어가는 민족의 동질성과 공감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되풀이해 공연 동영상을 돌려보면서 나는 꿈결처럼 저 12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12년 세월은 그들 사회주의 예술단이 이남에 와서 우리 대중가요를 맛깔나게 불러줄 만큼 긴 것이었다. 의상도 춤도 연주 목록도 유연해졌다. 어쨌든 그들도 이 만남으로 공감과 동질성을 확인하려는 점은 다르지 않았다.
비록 이데올로기가 때론 인간적 소통을 방해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소화하는 노랫가락에서 새삼 남북이 공통의 공감대를 가진 한겨레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 단일팀으로 경기를 하고 한반도기를 흔들며 목청껏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남북 응원단이 확인한 것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평창 동계올림픽은 폐막을 앞두고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다시 남으로 내려왔다. 폐막식 참석 외에도 이들은 27일까지 2박3일 동안 남쪽에 머무르며 문재인 대통령 등과 남북 관계 개선 협의를 할 것이라 한다.
오는 봄이나 가을에 다시 금강산을 찾고 싶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단절과 대립을 넘어 남북은 어떤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 그것은 또 전쟁 위기와 불안으로부터 한반도를, 한민족의 평화를 어떤 방식으로 지켜낼 수 있을까. 북 대표단을 막겠다며 통일대교 남단 도로를 점거한 채 농성한 보수 야당이 원하는 것도 한반도와 한민족의 평화라는 점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미리 마시는 김칫국일까. 나는 오는 봄이나 늦어도 가을 어느 날, 아내와 함께 경의선 육로로 다시 12년 전의 금강산을 다시 찾는 것을 상상한다. 금강산 호텔 승강기 안내원 함혜영 동무를 만나는 것은 어려울 터. 그러나 그의 자리에 나온 또 다른 볼 붉은 처녀를 만나면 사진 한 장을 같이 찍고 싶다.
2018. 2.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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