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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시간을 잇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by 낮달2018 2019.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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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의 섬, 경북 영주 무섬마을의 ‘고향 이야기’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의 외나무다리 . 2005년 첫 방문 때 찍은 사진이다 .

마을을 둥그렇게 물이 돌아 흐르는 이른바 물돌이 마을로 안동에 하회가, 예천에 회룡포가 있다면 경북 영주에는 무섬이 있다. 안동시 임동면 무실의 행정명칭이 수곡(水谷)’이듯 무섬의 주소는 정확히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水島里).

 

무섬은 물의 섬이라는 물섬에서 시옷() 앞의 리을()이 떨어진 형태다. 이는 불삽에서 부삽이 나온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이 이름과 그 해석은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섬은 당연히 물 가운데 있는 것, ‘자를 굳이 붙일 이유가 별로 없다. 누군가의 주장대로 에 있는 섬, ‘뭍섬에서 온 이름일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

 

이웃한 동네, ‘술미의 한자 이름은 탄산(炭山)’인데 이는 아마 본디 이름 숯뫼가 바뀐 듯하다. ‘로 바뀌듯 로 바뀌고 다시 자음 하나가 더 떨어진 결과로 보면 수도리육도리(陸島里)’로 불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섬마을은 회룡포와 같은 내성천 상류의 반남 박씨와 선성(예안) 김씨 집성촌으로 마을의 삼면을 휘감고 흐르는 물 가운데 섬처럼 떠 있다.

 

주민이 주인 된 외나무다리 축제

▲  무섬 건너편의 산 .  신록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
▲ 외나무다리. 갈수기라 수량이 줄면서 다리만 앙상해 보인다.

4월의 마지막 주말, 아내와 함께 마을로 들어서자, 이 전통마을은, 이태 전과는 달리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했다. 2005년 가을, 동료들과 함께 찾은 데 이어 두 번째 방문이다.

 

이태 전, 이 마을을 찾은 건 외나무다리 축제가 끝난 뒤였다. 이른바 지역 축제의 백화제방이랄까. 곳곳에 축제가 넘쳐나면서 이 외진 섬마을 사람들도 스스로 축제 하나를 조직해 냈는데, 그게 무섬 외나무다리 축제.

 

마을 중간쯤의 강둑 아래 백사장과 건너편 뭍을 이은 추억의 외나무다리를 재현하여 사람들을 초대한 것이다. 나무를 덧대 만든 이 옛날식 외나무다리는 폭 30, 길이 150.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다.

 

80년에 콘크리트 다리(수도교)가 생기기 이전까지 마을과 바깥을 이어준 것은 삼면을 돌아가며 놓은 외나무다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이어 다리를 놓았고, 이 다리를 건너 뭍의 논밭을 오가며 농사를 지었다.

 

장마가 지면 다리는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고,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다리를 다시 놓아야 했다 한다. ‘시집오는 새색시는 가마 타고 다리를 건너오고, 망자는 상여를 타고 그 물을 건너가는고단한 세월이 350년이었다.

 

축제는 이태째 잘 치러졌던 듯했다. 이태 전과 같이 강둑 아래 게시판에는 고향 외나무다리 이어가기 참여자 명단이라는 제목 아래, 축제를 위해 기부한 사람의 명단과 그들이 낸, 많지 않은 기부액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고액의 기부자가 없다는 것은 이 축제가 무섬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소박한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내겐 읽혔다. 때로 축제의 주인은, 거액의 이 되거나 그 돈으로 축제를 지배하는 부자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외나무다리에서 바라보는 마을

▲  외나무다리.  왼쪽이  ‘비껴다리’다 .  멀리 무섬마을이 보인다.
▲  게시판의  ‘ 고향 외나무다리 이어가기 참여자 명단 ’.

예전에 비기면 수량이 두드러지게 준 강을 가로지른 외나무다리 주변은 철 지난 바닷가처럼 쓸쓸했다. 연인 한 쌍이 오래 다리 위에서 머물렀고, 우리 내외는 그들이 다리를 떠날 때까지 강 저편에서 마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30의 좁은 다리 위를 걷기는 쉽지 않다. 다리의 중간중간에는 마주 오는 이를 피해갈 여분의 짧은 다리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갓길이나 비상대피소인 셈이다.

 

수량이 적어 백사장이 드넓어졌고 흐르는 물은 투명하게 맑았다. 고운 모래 위에 비치는 물살이 하늘거렸고 마을을 감아 도는 강 건너 낮은 산의 소나무·사철나무 숲에 짙푸른 신록의 물결이 아름다웠다.

 

십 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 조지훈 ‘별리(別離)’ 중에서

 

무섬마을 예안 김씨의 사위가 된 시인 조지훈이 이 처가 마을을 무대로 한 시편을 남길 만한 풍광이었다. 지훈이 노래했던 끊길 듯 고운 메아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강둑에 서서 우리는 눈으로만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기와를 새로 얹은 고택들과 드문드문 깡총한 이엉의 초가가 들어선 마을, 널찍한 공터마다 줄지어 주목(朱木)이 심겨 있었다. 일부러 낡은 목재나 부재로 지은 민속 마을과는 달리, 말끔하게 보수된 마을의 고택들에서는 예전과 같은 고풍스러운 느낌을 찾기는 어려웠다. 이태 전의, 제대로 보수하지 못한 퇴락한 고가에 비기면 새 입성은 단단하고 산뜻해 보였다.

 

고즈넉한 마을에 숨어 있는 문화재

▲  강둑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 .  울타리처럼 선 나무가 주목이다 .
▲  2005년도의 퇴락한 고택(위)이 말끔한 새집이 되었다 .  여기 사는 이들에게 있어 이 변화는 당연히 선(善) 이다 .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 만죽재(경북 민속자료 제93)’의 기록에 따르면 무섬마을이 생긴 것은 1666년이다.

 

안동에서 반남 박씨 일가가 난을 피해 영주로 옮겨왔고, 16세손 박수가 무섬에 만죽재를 짓고 터를 잡은 이후 선성(예안) 김씨 일가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따라서 따져보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혈족인 셈이다.

 

마을에는 만죽재 외에도 여러 채의 도 민속자료와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고가가 전한다. 콘크리트 다리 앞에 단아하게 서 있는 고택은 해우당(경북 민속자료 제92).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이 건립한 집으로 자 모양의 반가인데,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라 한다.

 

전통마을답게 무섬에는 기와를 얹은 고가 외에도 이른바 까치구멍집이라 불리는 초가도 여러 채 민속·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까치구멍집이란 안방·사랑방·부엌·마루·봉당 등이 한 채에 딸려 있고, 앞뒤 양쪽으로 통하는 양통집의 속칭이다. ‘까치구멍이란 추운 겨울에 실내서 취사할 때 환기구 역할을 하는, 초가의 지붕 양쪽에 뚫은 구멍으로 태백산 부근의 강원· 경북 지역 산간 벽촌 초가의 특색이다.

▲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 만죽재 ( 晩竹齋 ,  경북 민속자료 제 93 호 ).
▲  해우당 ( 海愚堂 ,  경북 민속자료 제 92 호 ).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

까치구멍집 박천립 가옥(문화재 자료 제364)1923년경에 건립되었다는 정면 3, 측면 2칸의 홑처마로 된 초가다. 이 집은 출입문이 있는 봉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사랑방, 오른쪽에 정지(부엌)가 있고 뒤쪽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윗방, 오른쪽에 안방이 있다.

 

그림에서 보듯 마구간이 있어야 할 위치에 사랑방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출입구 쪽의 사립 울타리와 부엌 앞에 세워둔 LPG 가스통이 이채로웠다. 마을 안에 미끈하게 치장한 서너 채의 양옥이 눈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마을은 예전의 퇴락한 모습을 말끔히 벗고 있었다.

 

첫 방문 때, 낡을 대로 낡아 고단한 삶의 흔적이 역력하게 묻어나는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른바 온고(溫古)’란 형식에 있지 않고, 그 내용과 정신에 있는 거라고 중얼거렸던 듯하다.

 

그리고 마을을 떠나면서 다시 이곳을 찾을 때 이 동네가 서투르게 분칠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지 않기를 바랐었다.

 

관광객 위해 고색창연지키랄 수는 없는 일

▲  까치구멍집 박천립 가옥 ( 문화재 자료 제 364 호 ).  위 사진의 지붕 끝에 움푹 팬 곳이 까치구멍이다 .

그러나 이태 만에 다시 찾은 무섬마을은 어떤 모습이었나. 나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낡은 기와를 걷어내고 들보와 도리를 가는 것은, 발전인가 아닌가. 해우당 앞의 나무 그늘에 안노인 둘이 쑥을 다듬고 있었다. 분주하게 손을 놀리면서도 노인들은 도회에서 온 나그네들을 따뜻하게 돌아보았다.

 

“무어 볼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소?”
“마을이 보기에 아주 좋습니다. 예전 고치기 전보담 못하지만…….”

 

말꼬리를 흐리는데, 이내 느릿느릿 반격이 날아왔다.

 

“고치기 전보다? 아이구, 시어마시야, 그땐 도깨비집이었던 걸? 이제 겨우 사람 사는 집이 되었구만.”

 

우리는 얌전히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떴다. 안노인들의 심상한 대꾸가 이 마을의 변화가 가진 의미를 간단히 정리해 준 셈이었다. 관광이나 답사를 온, 난데 사람들은 답사를 통해 고색창연을 읽고 가기를 원한다.

 

서투르게 분칠해 놓은 고적이나 명승을 보자고 먼 길을 온 게 아니니 그들의 희망 사항을 달리 나무랄 일은 아니다. 원죄는 오히려 관광객들을 겨냥해 꼴사납게 관광지 흉내를 내거나 난데없는 개발로 그 풍광의 가치를 잠식해 버리는 업자들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승이나 유적들이 천박한 자본에 포섭되어 알량한 관광자원으로 전락하는 건 아니 될 일이지만, 정작 관광객들을 위해서 고색창연을 지키라는 것은 그리 온당한 요구가 아니다.

 

한갓진 관광객들이야 탄성을 지르며 기념사진을 찍고, 그것을 통해 한때를 추억하고 말면 그뿐이지만, 그 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날것 그대로의 삶이니 말이다.

 

이태 전에 만났던 고가에 대해 나는 비록 퇴락했지만, 사람들의 삶이 함께하는 공간이어서 오히려 정겨웠다고 썼다.

 

그 때 마당을 서성이고 있던 허리 굽은 노인에겐, 기울어 가는 옛집을 국고를 들여 말끔하게 보수해 준 나라가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를 생각하며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십시일반으로 어렵게 축제를 이어가는 까닭

▲  해우당 고택 옆 그늘에서 만난 마을의 안노인들 .  쑥을 다듬느라 손길이 바빴다 .
▲  한 고택에 전하는 연암의 손자 박규수가 썼다는 편액 .

늦은 오후의 무섬마을은 고적했다. 축제가 베풀어진 후, 얼마나 많은 난데 사람이 이 마을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디 음료수 한 병 사 마실 구멍가게 하나 보이지 않는 마을에 서툰 단장관광지 흉내의 혐의는 찾기 어렵다. 마을 사람들은 직접 나무를 베어 다듬었고 고향을 떠난 이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축제를 꾸려낸 것이다.

 

외나무다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다음 세대를 위하여, 고향을 떠난 후손들에게 이 마을의 역사를 물려주기 위하여라고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그들의 축제가 외나무다리 이어가기인 까닭이 거기 있다.

 

해방 전만 해도 120여 가구가 넘는 부촌이었다지만 지금은 40여 명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것도 50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65세가 넘는 고령의 노인들이라 한다.

 

그나마 수리하고 단장한 고택에서 누릴 그들의 다소 편안한 노후를 위해서라면 이 외진 뭍의 섬마을을 찾는 외지의 관광객들이 고색창연을 양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이다.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는 300년이 넘게 이어온 고단한 과거의 삶과 마을 바깥에서 태어난 다음 세대의 삶과 그 미래를 잇는 일일지도 모른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우리는 마을을 천천히 빠져나와 낡은 콘크리트 다리인 수도교를 건넜다.

 

2007. 5. 4. 낮달

 

 

 

시간을 잇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뭍의 섬, 경북 영주 무섬마을의 '고향 이야기'

www.ohmynews.com

 

덧붙이는 글 |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 축제는 해마다 10월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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