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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여기 알아? 동네 사람들이 벽 속에 있어"

by 낮달2018 2019.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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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신세동 길섶 미술로(路)에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 산기슭에 축대 위에 수놓아진 꽃과 반딧불

흔히들 가난은 불편한 것일 뿐 부끄러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책임으로 물을 수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제도 등 구조에서 비롯된 게 가난이니 이 명제에 잘못은 없다. 그러나 사실 가난이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명심보감에 이르기를 사람이 가난하면 지혜가 짧아진다’[인빈지단(人貧智短)]고 한 까닭이 달리 있는 게 아니다. 삶이 고단하면 지켜야 할 예의범절도, 사람 노릇도 쉽지 않아진다. 궁핍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한 가정의 삶을 옥죄는 질곡인 것이다.

 

가난하다고 아름다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한 이들은 먹고 살기 바빠서넉넉한 이들이 누리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 식구들끼리의 단란한 외식은 물론이고, 집안의 대소사 참석도 쉽지 않다. 여유 가운데서 누릴 수 있는 문화생활도 멀기만 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문화를 누릴 안목이나 능력이 뒤지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아름다움과 기쁨, 진리와 정의를 이해하고 인식하는데 빈천은 무관한 것이다. 오히려 가난한 삶을 통해서 터득한 결핍에 대한 깨달음이 어쩌면 아름다움의 본질을 더 쉽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만드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난과 결핍이 대상을 소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줄 수 있다는 건 정녕 역설적이지 않은가.

 

가난그림의 상관관계를 아주 소박하게 이해하게 해 준 곳은 안동의 달동네 성진골이다. 안동시 신세동 성진골은 안동시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외진 달동네다. 영남산 자락에 성큼 들어선 가톨릭상지대학이 굽어보고 있는 산기슭에 90여 호의 허술한 단독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 외진 달동네가 산자락 미술관으로 변신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유월 초순부터였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전국 공모(‘2009 마을 미술 프로젝트’)에서 선정된 연어와 첫비가 시행한 이 사업은 안동 신세동 길섶 미술로() 꾸미기.

 

이 사업은 신세동 성진골 일대와 동부초등학교 담장 등, 350m의 골목길을 배경으로 펼쳐졌다. 동부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성진골로 오르는 밋밋한 골목길 주변은 마을과 주민들의 이야기가 담긴 벽화 15, 입체 부조 8, 기타 소품 10점 등이 설치된 아름다운 골목길 미술관으로 바뀐 것이다.

 

다닥다닥 붙은 허술한 단독주택들, 옷을 입다

 

소문이 아직 많이 나지 않은 모양인지 따로 이 골목길을 찾아온 이는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지역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소식에 무심할 수도 있겠다. 시골 사람들이고, 그들의 호기심은 쉬 불이 붙지 않으니까 말이다. 동부초등학교 앞에 차를 대는데 앞 건물의 옆면에서 할머니 한 분과 아이 둘이 정겹게 웃으며 방문객을 맞는다.

▲ 성진골 들머리 벽화 주인공은 '복덩이 할머니'와 그이의 손자와 친구다. 이들은 벽화 속의 시간을 기억하면서 늙어가고 또 자랄 것이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복덩이 할머니라고 불린다는 이 벽화의 주인공은 김화순 씨. 활짝 웃고 있는 남녀 어린이는 그이의 손자인 상현이와 그의 친구 민서다. 옥탑방을 둔 이 삼층 건물의 벽면에 실린 이들 세 사람의 미소는 보는 것만으로 정겹다. 그것은 마치 낯선 방문객을 꼼짝없이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무슨 비밀 병기 같다.

 

이 건물 앞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나타나는 밋밋한 오르막길이 바로 성진길이다. 골목 어귀 오른쪽에 선 4층 건물의 전면에는 국보 제16호 안동 신세동 7층 전탑의 모습이 마치 실루엣처럼 떠 있고, 그 옆 지붕 낮은 집의 벽면에는 중국음식점 배달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일상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풍경인데도 낮은 지붕이 어깨를 부딪고 있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거친 벽면에 그려진 그림이 주는 울림은 꽤 묘하다. 진달래가 화려하게 그려진 양옥집 벽면이나 해바라기 꽃잎이 커다랗게 그려놓은 콘크리트 담벼락은 평등해 보인다. 거기에 빈부의 격차 따위가 낄 여지는 없는 것이다.

▲ 2009 마을 미술 프로젝트 동부초등 담벼락은 교사와 아이들 작품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그림은 동부초등학교 담장에 그려진 벽화다. 대충 30m에 이르는 벽돌담에다 그림을 그린 건 이 학교 교사와 학생 등 70여 명이다. 아주 단순한 빛깔과 도형으로 이루어진 이 벽화는 골목을 찾는 방문객의 마지막 경계심마저 허물어 버린다.

 

오케스트라 앞 관람객의 실루엣이 있는 담벼락 건너편 언덕 위에는 연주자들의 실루엣이 희미하다. 포도나무가 서 있는 지붕 낮은 집의 담장에는 까맣게 익은 포도송이가 그려졌고, 높다란 담장 위에는 줄 타는 고양이가 위태롭게 달렸다.

▲ 멋쟁이 아저씨의 집 담벼락에 그의 얼굴이 걸리었다 .

마을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이가 사는 집 담벼락에는 미소 띤 이 멋쟁이 아저씨의 모습이 커다랗게 그려졌다. 언덕 아래 쓰레기통 주변 벽에는 정교한 나비 그림이 분위기를 끌어 올리고 축대 위에는 한쪽 다리를 든 오줌 누는 개조형물이 재미있다.

▲ 축대 위 담벼락에 피어난 자작나무 숲

골목 끝에 가까운 산기슭의 축대 위 블록담에 그려진 자작나무가 가장 마음에 든다. 옅은 중간색의 질감이 부드러웠고, 마치 진짜 숲처럼 푸근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길 건너편의 블록으로 쌓아 올린 화장실인 듯한 구조물에도 자작나무는 싱싱했다. 오른편 언덕 위의 엉성한 블록담에 칠한 빨강, 노랑, 초록의 페인트 색감도 산뜻했다.

 

여러 번 오르내려도 전혀 지겹지 않은 길

▲ 축대 위 허술한 블록 담장도 화려한 페인트칠로 살아났다 .

사진기를 든 방문객 몇이 미소 지으며 골목을 오르내렸다. 오후 4시가 넘으면서 햇빛이 좀 불투명해졌다. 나는 여러 번 골목을 오르내렸지만 지겹지 않았고, 오르내릴 때마다 만나는 풍경도 새로웠다. 조금 전에 눈에 띄지 않던 풍경들이 오롯이 눈에 들어올 때의 느낌은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구부정한 골목길을 오르면서 만나는 그림과 조형물은 아주 친근하게 이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삶에 아주 자연스레 녹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을 그린 벽면마다 칠을 새로 해 깨끗해 뵌다. 그러나 벽 너머나 담장 너머의 집과 벽은 허술하고 오래된 것들이다.

 

옹색하고 초라한 동네 풍경과 화사한 원색의 페인트가 주는 질감과 조화는 생뚱맞을 듯하다. 그러나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도 그런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간간이 오가는 마을 사람들의 정겨운 얼굴 탓일까. 사진기를 들고 동네를 기웃거리는 방문객을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는 방문객의 질문에 아주 친절히 화답했으며 드러내 놓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꿈자리가 사납다며 벽화를 거부해 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주민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자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이 산자락 미술관은 미술로 가꾸기사업에 참여한 전문작가, 안동대 미대생과 대학원생뿐 아니라 이들과 함께 고민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과 긍지는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주인의식이라 하여도 좋을 터였다.

 

문화 소외지역에서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 잡은 신세동 미술로

▲ 산기슭에서 개 조형물이 안동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

나는 골목 오른쪽 언덕 위에 높다란 축대 위에서 마을 사람들 몇과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곁에는 하얀 개 한 마리가 안동 시가를 굽어보고 있었다. 곳곳에 도기로 만든 조형물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앞다투어 지난 몇 달간의 작업을 추억하면서 자신들의 마을이 방문객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해하였다. 나는 마을이 정말 멋있다, 여기서 당분간 살아 봤으면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어느덧 해가 한 뼘이나 짧아졌다. 금세 어둠이 내릴 것 같은 골목길을 천천히 빠져나오는데, 막 하교하는 듯한 중고생들을 만났다.

 

사진기를 든 방문객을 바라보는 소년들의 얼굴에도 자부심이 묻어나는 듯했다. 나는 이 마을에서 지난 몇 달간 베풀어진 사업이 단순한 환경 개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풍요 속의 소외지역인 마을을 자연스러운 소통의 공간으로 가꾸고자 한 사업 목적이 이 마을에서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뜻일 터이다. ‘먹기살기 바빠서주변의 풍경에 무심했던 마을 사람들이 이 사업을 함께 하면서 얻은 것은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는 여유였고, 아름다움과 삶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아니었을까.

 

성진길을 걸어 나와 차에 오르자 맨 처음 나를 반겨주었던 벽화 속의 인물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막 떨어지기 시작한 해를 마주 보고 그림 속의 마을 사람들의 미소는 훨씬 더 친근하고 그윽해 보였다. 벽화 속 주인공들은 오래 그 벽화 속의 시간을 기억하면서 늙어가고 또 자랄 거였다. 시간과 세월의 순환 속에 보태질 이 마을의 역사를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승용차의 시동을 걸었다.

 

2009. 10. 25. 낮달

 

 

여기 알아? 동네 사람들이 벽 속에 있어

안동 신세동 길섶 미술로(路)에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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