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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저 혼자 서 있는 탑들

by 낮달2018 2019.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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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탑 이야기] 그 천년의 침묵과 서원(誓願)

[안동의 탑 이야기 ②]소멸의 시간을 건넌 돌탑들

[안동의 탑 이야기 ③]국보 맞아?’ 잊히고 있는 우리 돌탑들

[안동의 탑 이야기 ④]천년 고탑(古塔)에 서린 세월과 역사를 되짚다

 

이 땅엔 탑이 참 많다. 온 나라 골짜기마다 들어앉은 절집뿐 아니라, 적지 않은 폐사 터에도 으레 한두 기의 탑이 서 있기 마련이다. 탑은 어쩌면 ‘부처님의 나라’를 꿈꾸었던 신라 시대 이래 이 땅의 겨레들이 부처님께 의탁한, 소망과 비원(悲願)의 결정체인지도 모른다.

 

낮은 산 좁은 골짜기 들머리에, 더러는 곡식이 익어가는 논밭 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탑이 안고 있는 천년의 침묵은 바로 이 땅의 겨레가 겪어온 즈믄해의 역사라 해도 무방하겠다.

 

절집에서 탑은 원래 부처의 사리를 넣기 위해서 돌이나 흙 등을 높게 쌓아 올린 무덤이다. 그러나 탑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성스러운 구조물이다. 석가는 생전에 ‘형상에 대한 집착’을 부정했다. 그러한 가르침에도 열반 후 유일하게 남은 형상인 ‘사리’를 모신 탑을 돌면서 부처님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겠다는 중생들의 서원과 수행의 한 형태가 ‘탑돌이’다. 

 

불교의 대중화와 함께 탑돌이는 민속놀이로도 변천되었지만, 그 의식의 핵심은 ‘서원(誓願)’이다. 따라서 굳이 탑이 ‘높거나 커야 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이에 반해 서구 문화에서의 탑은 ‘절대자의 세계를 지향’하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 의성 탑리 5층석탑. 벽돌 모양의 돌로 쌓은 모전 석탑이다.
▲  영양 봉감리 5층 석탑. 봉감리 탑이 모전 석탑의 성격을 더 확연하게 보여준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태양신 숭배가 피안(彼岸) 신앙과 결부된 결과’로, 죽은 왕이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을 두고 있는 것이나,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이 야훼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늘에 닿게’ 탑을 세우고자 한 것 등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오만과 욕망’의 직접적 표현으로 읽힌다.

 

저 피안의 세계, 신의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 그것은 커야 하고 높아야 한다. 파라오의 권위와 힘의 상징이겠지만, 피라미드의 거대한 구조는 한편으로 ‘하늘로 가는 사닥다리’의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땅의 탑은 부처의 나라[佛國], 그 절대자의 영역과 이어진 ‘통로’로서의 의미가 있지는 않다. 탑은,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는 무지렁이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직의 안위와 한 일가의 안녕을 꿈꾸는 ‘서원의 대상’으로서 기능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탑은 숱한 선남선녀들이 가슴에 품고 온 서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한 반복의 순환을 통해 탑에 바쳐지는 비원의 행진이 바로 ‘탑돌이’다. 따라서 그것은 신앙적 의미를 넘어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정성’의 집적이라 할 만하다.

 

탑은 ‘공과 정성을 들여’ 쌓은 구조물

 

우리 말글에서 탑은 ‘쌓는’ 구조물이다. ‘세우다’는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짓거나[造塔]’ ‘쌓는다’. 그것은 ‘정성’과 동일한 쓰임새를 갖는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와 같은 속담에서 드러나듯 탑은 ‘공과 정성을 들여’ 쌓는 구조물이다.

 

이 땅의 겨레들은 골짜기와 재를 넘으며 지천인 돌멩이 하나둘 던져서 서낭당의 돌무더기 [누석단(累石壇)]을 만들듯 작든 크든 돌을 보기만 하면 차곡차곡 쌓기 시작한다. 지방의 한적한 절집을 돌면서 만나게 되는 손바닥만 한 소박한 돌탑은 바로 그러한 무명 불자들의 정성이 만들어 낸 구조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옛 탑이 1500여 기이고, 국보와 보물의 약 25%가 탑인 것도 탑을 향한 우리 겨레의 신앙과 서원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를 반증해 준다. 인도의 탑은 주로 벽돌로 지은 전탑(塼塔)이었고 중국에도 전탑이 많았던 데 비해 일본에서는 목탑이, 우리나라에서는 석탑이 중심이다. 석탑의 재료가 되는 화강암 등 ‘좋은 돌’이 많아서라고 한다.

▲ 법흥동 7층 전탑. 왼쪽 기와집이 법흥사 터에 세워진 고성 이씨 탑동 종택.

우리나라 전탑의 기원은, 비록 전탑은 아니지만, 신라 선덕여왕 3년(622)에 돌을 벽돌처럼 잘라 쌓은 경주 분황사 모전(摸塼) 석탑이다. 전탑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현존하는 전탑은 경북 안동의 신세동 칠층 전탑 등을 비롯해 안동, 의성, 영양, 제천 등에 흩어진 모전 석탑을 포함, 모두 십여 기이다. 이처럼 일부 지역에서만 전탑과 모전 석탑이 축조된 것은 특이한 현상이라고 한다.

 

안동 지역에는 유달리 전탑이 많다. 그것도 버젓한 절집의 금당 앞에 자리 잡은 게 아니라, 절집을 잃고 저 혼자 외로이 서 있다. 원래 절집과 함께 있었으나, 절이 허물어지고 탑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 남은 탑 이름은 대체로 ‘○○사터 ○층○탑’의 형식을 갖지만, 안동의 전탑들은 여전히 동네 이름 뒤에 붙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절터가 발견되지 않거나, 추정은 되지만, 고증이 되지 않은 까닭이다.

 

신세동(법흥동) 7층 전탑

▲ 탑의 낙수면에 얹은 기와. 위는 법흥동 7층 전탑, 아래는 동부동 5층 전탑이다.

석탑에 비교해 전탑이 상당히 적게 남아 있는 것은 재료의 취약성으로 인해 쉽게 파손되는 결점 때문이라 하는데, 지금까지 전하는 가장 오래된 전탑은 8세기경에 건립된 신세동 7층 전탑이다. 국보 16호. 현재의 지명은 법흥동인데, 국보 지정 당시의 동네 이름을 아직도 그대로 달고 있다(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에서 아예 ‘법흥동 7층 전탑’이라고 쓰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法興寺)에 속한 전탑으로 추정된다. 조선조 폐불 정책에 따라 폐사가 된 법흥사 터에는 고성 이씨 탑동 종택이 들어서 있는데, 안동 역사서인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유실된 상륜부의 금동장식은 임청각을 창건한 이명의 아들이 철거해 그것을 녹여 객사에 사용하는 집기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누대에 걸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이 집안의 선조는 문화적으로 ‘실수’를 한 셈이다.

 

더 큰 실수, 아니 ‘몹쓸 짓’을 한 건 일제다. 탑과 지척에 중앙선 철길이 놓여 있으니 이는 대를 이어 걸출한 독립지사를 배출한 임청각 고성 이씨 집안의 내력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놓아 집안의 기를 끊고자 한 여파다. 덕분에 이천 년을 지켜온 벽돌탑은 철둑에 막힌 강을 간신히 굽어보며 밤낮으로 발치를 오가는 철마의 쇳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게 탑의 보존에 얼마만 한 영향을 끼치는가는 물어보나 마나다.

 

유홍준은 그의 답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국보 중에서 이 탑만큼 시달림과 수모와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없다. 절은 양반이 빼앗아 갔고, 강변의 빼어난 경치는 철둑과 안동댐이 막아 버렸는데 곱게 쌓은 기단부는 20세기 인간들이 시멘트를 거의 맹목적으로 처발라 볼썽사납기 그지없게 되었다.”

▲ 안동역 부근의 동부동 5층 전탑. ‘굴뚝’이라고 오인할 만큼 벽돌탑임이 확연하다.

동부동 5층 전탑

 

유홍준의 답사기에서 어느 할머니의 질문(“언제부터 예 이런 굴뚝이 있었니껴?”)과 함께 소개된 ‘동부동 5층 전탑’은 보물 56호로 안동역 소화물 관리소 바로 아래에 있다. 안동역에 내려 역광장에서 왼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바로 이 유서 깊은 통일신라 시대의 탑을 만날 수 있다.

 

유료 주차장을 지나면 나타나는 탑 주변은 담장과 수목들로 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으나 간선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아서 자연 일반인들의 발길을 뜸한 곳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안동에서 9년째 살고 있는 내가 이 탑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 건 지난해 10월이다.

 

탑 부근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곳이 <동국여지승람>과 <영가지> 등에 기록된 법림사(法林寺) 터로 추정되고 있다. 유홍준은 그의 답사기에서 이 탑의 아름다움을 "1층부터 5층까지 급격히 체감하여 날카로운 상승감을 유도하고 있"는 데서 찾고 있다.

 

<영가지>에는 법림사 전탑이 7층이며, 조선시대에 크게 보수를 하였다. 상륜부는 법흥사탑과 같이 금동제였으나 1598년에 명나라 군인들이 도둑질해갔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지금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림사 터에는 안동역사가 들어서 있으니, 안동의 전탑들은 쇠말[鐵馬]과 인연이 만만치 않은 듯하다.

▲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5층 전탑. 가장 안정감 있는 규모와 비례를 보여주고 있다.

조탑리 5층 전탑

 

보물 제57호 ‘조탑리 5층 전탑’은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을 빠져나오면 만나게 되는 첫 동네, 조탑리의 밭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유홍준의 답사기에는 사과밭 가운데 있다고 씌어 있지만, 지금 그 과수원은 밭이 되었다. 더 볼 것 없이 농민들의 삶을 야금야금 먹어가고 있는 개방농정의 결과일 터이다. 과수원일 때보다 빈 밭 가운데 서 있는 고탑은 쓸쓸해 보인다.

▲  조탑리  5 층 전탑의 감실 .  좌우에 인왕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

탑 외에 절터로 추정할만한 다른 유물과 문헌 기록이 없다. 통일신라 시대 전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섞어서 조성했다. 돌로 만든 기단 위에 벽돌로 쌓은 탑신을 얹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기단부의 정면에는 감실(龕室)이 있고, 감실 좌우에는 인왕상을 조각해 놓았다.

 

인왕상은 암좌(岩座) 위에 서 있으며 주먹코에 왕방울 눈, 불끈 쥔 주먹, 솟아오른 다리 근육 등 힘이 넘친다. 그러나 그것은 유홍준이 지적한 대로 “무섭지도 위엄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귀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상륜부 전체가 없어졌고, 탑의 높이는 8.65m이다. 안동의 다른 전탑과는 달리 옥개(屋蓋) 낙수면에 기와가 없으나 원래는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옥동 3층 석탑

 

통일신라 시대의 돌탑으로 높이는 5.79m. 안동시 평화동 진명학교 입구에 있다. 탑 부근은 민가가 밀집되어 절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절 이름 또한 알 길이 없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옥신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다. 보물 제114호. ‘옥동(玉洞)’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당시 이곳이 옥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  옥동  3층 석탑.  주변 가옥들과 정겹게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 .

주택가 한복판에 서 있는 이 돌탑은 6m에 가까운 높이에도 주변의 나지막한 지붕들과 의좋게 어깨를 맞대고 있으며,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한낮에는 주택가의 정적 속에서 주변의 민가와 고개를 맞대고 낮잠에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둔중한 돌로 된 몸집을 하고도 기와와 슬래브집 일색의 주택가에서 생뚱맞아 보이지 않는 것은 화강암의 차분한 돌빛 때문인 듯하다.

▲  북후면 석탑리의 방단형 석탑 .  오른쪽 아래에 석탑사가 있다 .

석탑리 방단형 석탑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에 있는, 흔히 볼 수 없는 돌탑이다. 작은 집채 모양의 계단식 돌탑은 정사각형 평면 위에 층마다 비교적 크고 반듯한 판돌 넉 장으로 면을 이루게 한 뒤, 그 안을 막돌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돌탑은 고려나 조선시대 전기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일부 학자들은 이를 한반도 중남부에서 가장 온전한 상태를 보전하고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로 보고 있다. 즉 사람의 무덤[총(塚)])이라는 것이다. 정연한 규칙에 따라 탑을 쌓은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민간신앙(성황당 누석단)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알려졌다.

 

탑 아래쪽에는 석탑사(石塔寺)가 이 돌탑을 지키고 있다. 지역에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먼 옛날 200리 떨어진 영주 부석사의 스님들이 이곳을 찾은 뒤 이 탑이 생겼다 한다. 매일 자신들의 공양 밥 일부를 훔쳐 간 범인이 신통수를 부리는 학가산의 능인(能仁) 대사(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방문해 유명해진 천등산 봉정사를 창건한 분이다)라는 것을 안 스님들이 그를 죽이려고 돌을 들고 떼 지어 찾아왔다. 그러나 오히려 능인 대사가 설법으로 꾸짖자 금세 깨닫고 속죄의 표시로 가지고 온 돌을 모아 탑을 쌓았다는 것이다.

▲ 길안면 모전 석탑. 다듬지 않은 거친 돌로 쌓았으나, 안정감과 균제미를 보여준다.

이밖에도 안동에는 두 기의 모전 석탑(대사리 모전 석탑, 하리 모전 3층 석탑)을 비롯해 열다섯 기의 석탑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들 중 절집 마당에 있는 것은 봉정사 3층 석탑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모두 온전한 제 이름을 갖지 못한 채, 혹은 민가 마당과 논밭에, 골짜기와 산 중턱에 흩어져 있어서 그 온전한 모습의 절집을 가늠할 수 없게 한다.

 

이들 크고 작은 여러 탑은 융성했던 불교 문화나 뜨거운 불심의 흔적이라기보다, 내게는 이 땅의 사람들, 우리 겨레가 저마다 가슴 속에 밝힌, 애틋하나 소박한 서원의 오롯한 중심이었다는 사실의 움직일 수 없는 징표로 느껴진다. 윤회의 삼선도(三善道)와 삼악도(三惡道)를 넘나드는 사부대중의 서원을 품어 안은 채 탑들은 시방, 천 년의 고독과 침묵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2007. 1. 4. 낮달

 

 

저 혼자 서 있는 탑들

[안동의 탑 이야기①] 그 천년의 침묵과 서원(誓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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