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시가 기행 ③] 퇴계 이황과 <도산십이곡>
퇴계의 그늘은 넓고도 크다
안동은 퇴계의 고장이다. 이 16세기의 대 성리학자는 무려 4세기가 지났어도 여전히 안동에 살아 숨 쉬는 인물이다. 퇴계를 떠나 안동의 유림과 학문, 전통과 역사를 말할 수 없다. 내로라하는 안동의 명문거족들이 모두 퇴계의 문하로 또는 영남학파로 이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서애 류성룡(풍천 류씨)을 비롯 학봉 김성일(의성 김씨), 송암 권호문(안동 권씨)이 퇴계의 문하였고, 퇴계의 학맥은 장흥효(안동 장씨), 이휘일(재령 이씨), 이상정(한산 이씨) 등으로 이어졌으니 이들은 모두 안동과 인근 고을의 명문가들인 것이다.
십수 년 전에 안동 인근에 살게 되면서 나는 왜 안동이 이육사 시인을 기리지 않는가를 의아해했다. 안동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까닭을 물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주는 이는 없었는데 어떤 이가 조심스레 그랬다. 퇴계의 그늘이 너무 짙은 탓이 아닐까. 육사도 진성인(眞城人), 퇴계의 후손이니까 말이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 삽화는 안동에 드리운 퇴계의 존재감과 영향력을 웅변으로 입증해 준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를 간다’는 속담 식으로 말하자면 이 거유(巨儒)의 그늘은 서울보다 더 넓다는 안동의 산과 들을 덮고도 남는다 할 수 있겠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예안현 온계리(현재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사람이다. 그의 생애와 학문을 섣부르게 이르는 것은 외람된 일일 뿐 아니라 미욱한 일이기 쉽다. 서른넷에 문과에 급제한 이래 퇴계의 삶은 출사와 퇴사의 반복이었다. 스스로 ‘처사(處士)’이기를 희망했던 이 선비는 그러나 나라의 부름을 모질게 내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을사사화 후 마흔여섯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 토계(兎溪)로 돌아온 퇴계는 토계를 퇴계(退溪)라 고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러나 나라와 임금은 그를 고향에 버려 두지 않았다.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백운동 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바꾼 것은 이후의 일이다. 60세(1560)에 도산서당을 짓고 7년 동안 머물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은 모두 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했던 사람인지라 그들의 저작은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도 더러 한글 시조를 남겼는데, 이는 전적으로 비록 천대받긴 했지만 ‘훈민정음’의 존재와 ‘시조’라는 우리 고유의 시가 양식 덕분이다.
‘도산십이곡’, 노래에 의탁한 도학자의 세계관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에서 ‘주자 이래 도학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대 유학자 퇴계도 한글 시조를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노래가 그가 예순다섯 나던 해(1565년)에 지은 <도산십이곡>이다. 국문으로 시조를 썼지만 역시 퇴계다. 그는 “도산십이곡 발(跋)”에서 기존 시가에 대한 불만과 국문 시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드러낸다.
“우리 동방의 가곡(歌曲)이 무릇 음란한 노래가 많아서 이야기할 만하지도 못하다. <한림별곡> 같은 것들은 문인의 입에서 나왔지만 으스대며 마음대로 하고, 게다가 외람되고 버릇없이 하니 더욱 군자가 마땅히 높일 바가 아니다. (……) <도산 육곡> 둘을 지으니 하나는 언지(言志)이고 하나는 언학(言學)이다.
아이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익혀서 부르게 하고, 궤석에 비기어 듣는다.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춤추며 뛰게 해서 비루한 마음을 거의 다 씻어 버리고, 느낌이 일어나 마음이 녹아 서로 통하게 한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서로 유익함이 없을 수 없다.”
퇴계는 한림별곡 등 고려 가요를 관능적·향락적이라면서 배척했다. 대신 산수를 즐기는 가운데 올바른 성정을 수양해 가는 새로운 풍류로서 시조를 제시했다. 그는 한시에선 충족할 수 없는 흥을 시조에서 찾았던 것이다. ‘마음이 녹아 서로 통하게’ 되는 것과 ‘서로 유익함’이란 이를 이르는 것이다.
<도산십이곡>은 12수로 이루어진 연시조다. ‘때’와 ‘사물’에 접하여 일어나는 감흥을 읊은 앞의 여섯 수를 ‘언지(言志)’, 학문과 덕을 닦는 자세를 노래한 뒤의 여섯 수를 ‘언학(言學)’이라 한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이 지은 노래는 결국 그들의 세계관을 넘을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의 시는 노래에 의탁(依託)한 자신들의 가치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점 <도산십이곡>(이하 작품은 현대어로 풀어 쓴 것임)도 다르지 않다.
안개와 놀을 집으로 삼고 풍월을 친구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가지만
이 중에 바라는 일은 사람의 허물이나 없었으면. <제2곡>
그윽한 난초가 골짜기에 피어 있으니 듣기 좋아
흰 구름이 산에 가득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저 아름다운 한 사람을 더욱 잊지 못하네. <제4곡>
그 당시 학문에 힘쓰던 길을 몇 해씩이나 버려두고
어디를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왔는가.
이제야 돌아왔으니 딴 마음 먹지 않으리. <제10곡>
푸른 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제11곡>
전 6곡 중 제2곡은 ‘자연에의 동화’를 노래하고 있다. ‘안개와 놀’[연하(煙霞)], ‘바람과 달’[풍월(風月)]을 벗 삼아 살아가는 지은이는 마치 한 폭의 그림 속 선인의 모습으로 비친다. 중장의 ‘병’을 자연을 사랑하는 병인 ‘천석고황(泉石膏肓)’쯤으로 해석하면 이 노래는 그 운치를 더하리라. 종장에서 ‘바라는 일’로 ‘허물없음’을 꼽는 지은이는 꼼짝없이 도덕군자다.
제4곡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다. ‘연군지정(戀君之情)’은 오래된 우리 시가의 관습이다. 사대부의 시에서 ‘님’과 ‘미인’은 볼 것 없이 ‘임금’이다. ‘저 아름다운 한 사람’을 청초하고 기품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그렸다면 실망스럽겠다. 하지만, 이는 유교적 세계관의 관용적 표현일 뿐이다.
벼슬을 떠나 자연에 흠뻑 빠져 있으면서도 작자는 임금을 잊지 못한다. 여기 등장하는 난초와 흰 구름은 영욕성쇠로 얼룩진 인간 세상과는 무관한 탈속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시어들이다. ‘난초를 듣기 좋다’ 함은 물론 ‘문향(聞香)’의 의미이다.
제10곡에선 ‘학문 수양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노래했다. 퇴계가 벼슬을 물러나 귀향한 것은 세상을 뜨기 1년 전, 69세 때였다. 젊을 때 학문에 뜻을 두었다가 벼슬살이로 지새운 자신을 후회하면서, 이제 깨달음을 얻었으니 오로지 학문 수양에 힘쓰리라는 다짐이다.
제11곡은 ‘학문 정진에 대한 의지’를 노래한 시다. ‘푸른 산’과 ‘흐르는 물’은 우리 전통시가에서 늘 자연의 영원불변성을 상징하는 소재다. 그러한 자연을 닮아 변치 않은 지조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지은이는 예순다섯의 노인이다. 학문 정진에 대한 지은이의 의지가 드러나는 시인 셈이다.
<도산십이곡>에 드러난 화자의 삶의 태도는 번잡한 속세의 명리(名利)를 떠나 자연을 벗 삼아 사는 것이다. 중국 문학을 차용하거나 생경한 한자어를 많이 쓴 이 시는 문학적 성취보다 자연 귀의와 사색에 침잠하는 학문 생활을 솔직담백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평가받는다. 또 이 시는 후세 사림파 시가의 중심적 지표가 되었다고 한다.
도산서원, 간결 검소한 서원 건축
<도산십이곡>의 목판본이 소장된 도산서원을 향해 떠난 것은 지난 주말이다. <도산십이곡>의 배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옛 예안, 그러니까 도산 전체라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옛 땅은 대부분 안동댐으로 물밑에 잠겼다.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꼬불꼬불한 옛길에는 단풍이 자욱했다. 꼬부라진 길을 돌 때마다 햇빛을 받아 빨간 단풍잎이 화사하게 빛났다. 인근 청량산은 관광버스가 댈 곳을 찾지 못할 지경이라 하나 도산서원은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다.
서원 앞마당 끝에서 내다보는 시사단(試士壇)이 유독 햇살 아래 외롭다. 정조는 이황의 학덕과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새로 만들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거시험을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시사단을 세웠다. 안동호 저편에 솟아 있는 지금의 시사단은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원래의 위치에서 지상 10m의 축대를 쌓아 그 위로 비각과 비를 옮겨 지은 것이다.
도산서원은 퇴계가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가르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1574년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와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선조 8년(1575)에는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산서원 일대가 사적 170호로 지정되고, 문화공보부에서 복원·정리사업 시행한 것은 1969년, 박정희 정권 때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상가 퇴계와 율곡, 하서 김인후 선생을 기리기 위해 도산서원, 오죽헌, 자운서원 등을 정비하고, 이들의 유적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였다.
서원 주변에도 가을이 짙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 사이로 시월의 햇볕이 따가웠다. 대체로 서원 건축물은 여염집처럼 대체로 간결·검소하게 꾸며진다. 도산서원은 특히 모든 건물에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반영했다고 한다.
도산서원은 그리 넓지 않은 터에 촘촘하게 건물이 들어서 전체적으로 답답한 인상을 준다. 이유는 두 가지쯤으로 짚인다. 우선 워낙 이름 높은 서원이다 보니 그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서원의 기본인 전교당과 동서재, 사당과 장판각 외에도 도산서원에는 유생들 기숙사가 두 채, 노비들이 거처하는 고직사가 두 군데, 서원 이전의 서당에다 유물전시관까지 있는 것이다.
다른 이유 하나는 인근의 병산·화천서원의 만대루·지산루와 같은 누각이 따로 없는 탓이 아닌가 한다. 서원 앞을 막아선 만만치 않은 규모의 누각은 서원의 전체적 조망을 집약하면서 호쾌한 인상을 안겨 주는 것이다.
답답한 인상을 주면서도 도산서원이 어딘가 들뜬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건물들이 가진 검박한 기풍 때문이다. 단청 없는 맨살의 나뭇결과 거기 묻었을 유생들의 손때가 차분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어쩌면 터를 넓히거나 건물을 키워 답답함을 덜지 않은 게 도산서원의 미덕일 수도 있으리라.
청량, 퇴계가 사랑한 산
서원을 나와 청량산 가송협으로 향한다. 청량산은 퇴계가 ‘나의 산’[오산(吾山)]이라 할 만큼 사랑하고 즐긴 산이다. 400여 년 전의 퇴계는 산길을 돌아 지금 이어놓은 ‘퇴계 예던 길’로 청량산으로 갔겠지만, 21세기의 답사객들은 승용차로 가볍게 청량산 자락에 닿는다. 온 나라에서 모이는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청량산 대신 그 산자락과 낙동강이 만나 연출하는 가송협(佳松峽)에 이르니 이미 해가 설핏 기울었다.
가송협의 암벽 옆에 퇴계의 제자였던 금난수(琴蘭秀, 1530~1604)가 지은 고산정(孤山亭)이 비췻빛 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수량이 잔뜩 줄었지만, 강은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강 따라 저쪽 모롱이를 돌면 퇴계의 선배 문인 농암 이현보의 분강촌이다.
고산정 앞뜰에서 수면에 반짝이는 햇살을 흘겨보며 문득 그 비췻빛 물결 위에 연분홍 도화(桃花)가 한 아름 둥둥 떠내려오는 걸 상상해 본다. ‘나의 산’의 아름다움을 혼자서 즐기고 싶었던 욕심을 노래한 퇴계가 의심한 것은 흰 갈매기가 아니라 복사꽃 잎이다.
청량산 육륙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떠들어 대랴 못 믿을 것은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떠나지 말렴, 어주자(魚舟子) 알까 하노라.
청량산 열두 봉우리가 연출하는 아름다움을 인간 세상에 알리는 것은 골짜기 물과 함께 흘러가는 도화다. 백구 대신 그 꽃잎을 의심하며 떠나지 말 것을 종용하는 노 시인을 생각하면서 다시 강을 건넌다. 강변에는 산에서 떠내려온 도화를 건져낼 어부 대신 래프팅 업체의 사무실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돌아오는 길에 퇴계 종택에는 들르지 않았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것은 <도산십이곡>을 짓고 난 5년 뒤다. 일흔 살이 되던 11월 초여드레 아침 평소처럼 매화분에 물을 주고 침상을 정돈한 후,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임금이 사흘간 정사를 폐한 채 애도하고 장사는 영의정의 예로 치렀으나 산소에는 유훈대로 작은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속세의 명리(名利)를 떠나 자연을 벗 삼아 살다가 한 도학자의 삶 또한 그렇게 검박하게 마감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도산십이곡>에서 노래한 ‘올바른 길’과 결코 다르지 않았으리라.
옛 어른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그 분들을 보지 못하네.
하지만 그분들이 행하던 길은 지금도 가르침으로 남아 있네.
이렇듯 올바른 길이 우리 앞에 있는데 따르지 않고 어쩌겠는가? <제9곡>
2008. 11. 3. 낮달
[안동 시가 기행 ①] 송암 권호문의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안동 시가 기행 ②]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 「농암가(聾巖歌)」
[안동 시가 기행 ④] 역동 우탁의 「탄로가(歎老歌)」
[안동 시가 기행 ⑤] 청음 김상헌의 「가노라 삼각산아…」
[안동 시가 기행 ⑥] 존재 이휘일의 「전가팔곡(田家八曲)」
[안동 시가 기행 ⑦] 갈봉 김득연의 「산중잡곡(山中雜曲)」
[안동 시가 기행 ⑧] 안축의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
[안동 시가 기행 ⑨] 내방가사 「덴동 어미 화전가(花煎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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