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시가 기행 ①]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의 <한거십팔곡>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면서 교과서에 등장하는 지은이들의 자취를 이웃에서 심심찮게 만나는 경우가 많다. 볼 것 없이 이 땅 곳곳이 선비들의 고장이었던 덕분이다. 당연히 그건 내가 사는 지역만의 상황은 아니다. 그만그만한 땅과 마을마다 고전문학 주인공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이다.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는 구호로 그 전통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고장이다. 당연히 발길에 차이는 게 고택과 정자요, 거기 머문 시인묵객의 자취도 화려하다. <도산십이곡>의 퇴계를 비롯, 경기체가 <죽계별곡>과 <관동별곡>을 지은 근재 안축, <어부가>의 농암 이현보 등이 이 고을과 인근에서 삶과 자연을 노래했다.
퇴계와 농암의 자취는 인근 도산면에서, 근재의 흔적은 영주 순흥의 죽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고을이든 거기서 난 사람과 그 명성은 정작 제 터에선 별로 실속이 없다. 퇴계야 워낙 그 이름이 높은 이여서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농암이나 근재를 말하면 사람들은 머리를 갸웃하기 십상이다.
“농암에 올라보니……”로 시작되는 <농암가(聾巖歌)>나 “이 중에 시름없으니 어부의 생애로다”고 노래하는 <어부가(漁父歌)>를 일러주어 고개를 끄덕이면 그나마 그는 국어 시간에 졸지 않은 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요컨대 뚜르르 하는 고전 시가의 주인공들이라도 그 시와 함께 사람들에게 두루, 그리고 오래 기억되는 이는 드문 것이다.
안동에 산 지 10년이 넘었고, 학가산 봉정사를 무시로 드나들었다. 거기 가는 길목에 있는 안내판을 힐끗거린 것도 봉정사를 드나든 횟수만큼이라고 해야 한다. 안동에서 예천으로 나가다 봉정사로 드는 길로 우회전해서 이삼 분쯤 달리면 만나는 게 ‘관물당(觀物堂)’ 안내판이다. 나는 그게 마을마다 하고많은 고택 중의 하나거니 하고 스쳐 지나갔었다.
관물당이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의 지은이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의 종택에 있는 정자라는 걸 안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아니, 거기가 송암의 고택이란 것도 처음 알았다. 안동에서 10년이나 살았다는 이력보다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업에 더 큰 허물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관물당은 안동시 서후면 교리에 있다. 마을 입구의 문화재 안내판 옆에 마을 이름을 새긴 돌비가 서 있다. ‘교리(校里)’? 아니, 어디 근처에 내가 모르는 향교가 있었던가…. 나중에야 그게 고려 때 향교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마을로 들어가는 시멘트 포장길로 내처 들어서면 낭패하기에 십상이다. 향굣골은 진입로 초입에서 왼편으로 갈라지는 소로길로 들어서야 한다. 벌개미취가 우거진 야산을 돌아 들어가면 저만큼 오르막 끝에 나타나는 솟을대문 집이 송암의 종택이다.
관물당은 원래 1569년(선조 2)에 권호문이 건립, 학문을 강론하던 정자다. 송암종택 안에 자리하고 있는 관물당은 지금은 송암의 종택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송암 권호문(1532-1587)은 조선조 중종, 선조 연간의 문인이다. 본관은 안동. 이십대 끝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3년 후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 은거하였다. 퇴계 문하로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등과 동문수학했다.
‘하늘이 낸 재상’이라 일컫는 서애나, 마흔 이전에 조정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엘리트 관료였던 학봉에 비기면 송암의 출사는 견줄 게 못 된다. 그러나 송암은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도 드높았다.
타고난 천품이 남달랐던가. 스승 퇴계는 그를 가리켜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했고, 벗 서애도 ‘백세(百世)의 사표요, 강호의 고사(高士)’라 칭송했다.
‘관물당’이란 당호도 퇴계가 손수 지어준 것인데, ‘관물’이란 ‘사물을 본다’는 뜻이니 곧 ‘인간 내면의 수양’을 이르는 것이다. 그는 평생의 화두로 삼고 ‘관물’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자연과 더불어 노닌 송암이 ‘강호의 높은 선비’고, 그의 삶이 ‘소쇄(맑고 깨끗함)한 풍모’를 지닌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자연에 묻혀 산 그의 삶은 그가 남긴 연시조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에서 담담하게 펼쳐진다. 모두 19수에 이르는 이 노래는 벼슬길과 은거 생활의 갈등에서부터, 속세에 연연하지 않고 강호의 풍류를 즐기며 살아가는 심회를 담담하게 읊조리고 있다.
강호가도(江湖歌道)
조선시대 시가 문학에 널리 나타난 자연 예찬의 문학 사조. 조선시대의 시가 작품, <강호사시가>(맹사성)·<상춘곡>(정극인)·<어부사시사>(윤선도) 등을 이른다.
자연 예찬은 조선시대 시가 내용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를 조윤제는 문학 사조로 파악해 ‘강호가도’라 부르고, 그 내용을 ‘자연미의 발견’이라 규정하였다. 그는 강호가도의 형성 원인을 조선시대 사대부층의 정치상과 생활상에서 파악하였다.
연산군 이후 계속된 당쟁에 휩쓸리기를 꺼린 선비들, 벼슬을 마친 사대부들은 고향에 은거해 자연을 즐기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로써 자연은 인생과 더불어 이해되고 그 아름다움도 새롭게 발견된다. ‘강호가도’의 구체적 성립은 이현보와 송순에 이르러서부터이다.
이처럼 강호가도는 정치적인 문제에서 비롯했으나, 토지 경제적인 뒷받침과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도학적 문학관의 영향도 컸다. 벼슬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은 자신의 사유지에 기반을 둔 생활 근거에서 강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평생에 원하는 것이 다만 충효뿐이로다.
이 두 일 말면 금수(禽獸)나 다를쏘냐.
마음에 하고자 하여 십 년을 허둥대노라. <제1수>
계교(計較)*이렇더니 공명이 늦었어라.
부급동남(負笈東南)* 해도 이루지 못할까 하는 뜻을
세월이 물 흐르듯 하니 못 이룰까 하여라. <제2수>
*계교 : 서로 견주어 봄.
*부급동남 : 이리저리 공부하러 감.
비록 못 이뤄도 임천(林泉)이 좋으니라.
무심어조(無心魚鳥)는 절로 한가하나니
조만간 세사(世事) 잊고 너를 좇으려 하노라. <제3수>
강호에 놀자 하니 임금을 저버리겠고
임금을 섬기자 하니 즐거움에 어긋나네.
혼자서 기로에 서서 갈 데 몰라 하노라. <제4수>
어쩌랴 이러구러 이 몸이 어찌할꼬.
행도(行道)도 어렵고 은둔처도 정하지 않았네 .
언제나 이 뜻 결단하여 내 즐기는바 좇을 것인가 <제5수>
지난해 수학능력 시험에 출제되기도 했던 송암의 <한거십팔곡>은 이른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후기 모습을 보여주는 노래다. 이 노래는 시적 화자가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강호 자연 속으로 침잠하기까지의 과정을 시간적 계기를 따라 단계적·논리적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자연 공간을 문학 속으로 끌어들여 작자의 실존적 모습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송암은 경기체가 변형 양식인 <독락팔곡(獨樂八曲)>도 남겼다. 마찬가지로 ‘자연 속에 묻혀 사는 한정(閑情)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다. 제목은 ‘8곡’이지만 실제로는 7곡만이 문집인 ‘송암별집’에 실려 있다. 경기체가는 알다시피 여말선초에 그 명운을 다한 장르다. 소멸한 지 3세기나 지난 뒤에 이 작품이 지어진 것은 당대 가사 문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송암고택은 쨍한 청잣빛 하늘을 배경으로 언덕 위에 솟아 있다. 고택 앞 언덕바지의 슬레이트집 마당에 안노인 한 분이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 고추가 널린 깔개 한쪽에 등에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나른한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구경 왔수?”
“예. 공사는 끝났나 보지요?”
“웬걸, 하다가 공사비가 모자라 다 마치지 못했다 하지, 아마…….”
정말이다. 솟을대문 왼편의 쪽문으로 들어가 집을 들어가니, ‘ㅁ’자 형의 안채는 산뜻한데, 정작 마당 오른편의 관물당은 손댄 흔적을 찾기 어렵다. 지붕에 난 잡풀조차 그대로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국비 지원으로 보수하는데 정작 경북 문화재자료 31호인 관물당만 손을 못 댔다? 안동시에 알아보니 관물당은 2차로 보수할 예정인데 아직 예산을 배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어디 없이 돈이 주인 행세를 하는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건가.
1m 높이의 기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한 검소한 건물이지만 관물당은 좀 특이한 건물이다. 평면은 ‘一’자 형이고 지붕은 ‘T’자 형을 이루고 있다. 왼쪽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오른쪽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얼핏 보기에는 경쾌한 팔작지붕을 자랑하며 안존하게 앉은 사랑채인 ‘송암구택’이 훨씬 도드라져 보인다.
관물당에는 ‘퇴계선생 필법(글씨체본)과 유첩(퇴계의 편지 모음)’ 3권(보물 548)이 소장되어 있으며, 퇴계에게서 받은 시 "기제관물당(寄題觀物堂)"과 종택을 찾은 시인 묵객들의 시판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주인이 살지 않는 집과 그 유물을 들여다볼 도리는 없다.
송암이 벼슬을 버린 뒤 연어헌(鳶魚軒)을 짓고 은거를 시작한 청성산을 찾아 나선다. 오던 길을 되짚어 안동 예천 간 34번 국도를 가로질러 낙동강을 따라 풍산읍에 이르는 지방도로로 들어서면 오른편에 낙타 등처럼 생긴 산이 나타난다. 연어헌이 깃들인 이 산이 청성산(靑城山, 251m)이다.
스승 퇴계가 청량을 ‘나의 산[오산(吾山)]’이라 하여 각별히 아끼고 즐겼다면 송암은 청성산에 은거하면서 산림처사(山林處士)의 길을 걸었다. 6살 아래인 학봉과 아름다운 교유를 증명하듯 송암이 나누어준 터에 학봉이 연어헌 위쪽 가파른 절벽 위에 세운 석문정사(石門精舍)가 아직도 남아 있다.
청성산 기슭에는 후학들이 송암을 기려 세운 청성서원(경북 문화재자료 33호)이 있다. 선조 때 세웠다가 영조 대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고, 고종 대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9년 도내 유림의 뜻에 따라 옛터에 복원한 것이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2월과 8월에 송암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송암이 청성산 기슭에 연어헌(鳶魚軒)을 지은 것은 서른다섯 살 때였다. 그리고 그는 쉰일곱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연어’는 시경에 나오는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는 하늘에서 날고, 고기는 연못에서 뛴다)"의 줄임말이다. ‘만물이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집약한 표현이다. 연어헌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송암은 ‘세속에의 집착’을 넘었음을 노래했다.
강가에 누워 저 강물 보는 뜻은
가는 것이 저와 같으니 백 년인들 길겠느냐.
십 년 전 속세의 집착이 얼음 녹듯 하는구나.
- <한거십팔곡 제19수>
60년대에 새로 지었다는 연어헌은 낡을 대로 낡아 있었다. 제대로 가꾸지 않은 뜰엔 잡초가 웃자라 있고, 누마루에도 거미줄이 쳤다. 좁은 뜰과 담장 너머에 어지러이 선 나무에 가려 강물이 간신히 보인다. 일각대문 지붕에 서린 이끼와 풀들이 이 집이 겪은 세월을 넌지시 가르쳐준다.
시속의 변화가 시인의 삶과 시를 잊게 하는가. 발아래 오가는 차량의 행렬 너머 저 멀리 도회의 풍경은 칙칙한 잿빛이다. 송암 권호문의 ‘한거(閑居)’를 따라온 시가(詩歌) 기행을 마치면서 새삼,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한 시대 정신의 지향을 배우는 것, 또한 역사와 삶에 대한 성찰이라는 걸 곱씹어 본다.
2008. 10. 17. 낮달
[안동 시가 기행 ②]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 「농암가(聾巖歌)」
[안동 시가 기행 ③] 퇴계 이황과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안동 시가 기행 ④] 역동 우탁의 「탄로가(歎老歌)」
[안동 시가 기행 ⑤] 청음 김상헌의 「가노라 삼각산아…」
[안동 시가 기행 ⑥] 존재 이휘일의 「전가팔곡(田家八曲)」
[안동 시가 기행 ⑦] 갈봉 김득연의 「산중잡곡(山中雜曲)」
[안동 시가 기행 ⑧] 안축의 경기체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
[안동 시가 기행 ⑨] 내방가사 「덴동 어미 화전가(花煎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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