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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국보 맞아?’ 잊히고 있는 우리 돌탑들

by 낮달2018 2019.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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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탑 이야기 ③] 문향(文鄕) 영양 지역 석탑 기행

 

[안동의 탑 이야기 ①]저 혼자 서 있는 탑들

[안동의 탑 이야기 ②]소멸의 시간을 건넌 돌탑들

[안동의 탑 이야기 ④]천년 고탑(古塔)에 서린 세월과 역사를 되짚다

 

저 혼자 서 있는 탑은 외롭기도 하거니와 절집 금당 앞에 당당하게 선 동류(同類)와는 달리 쉽게 잊힌다. 금당이나 절집이 탑을 온전히 지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절집 이름을 앞세우고 있는 탑은 뚜렷한 실명으로 기억되지만, 저 혼자 선 탑들은 대체로 익명 속에 숨어 있으니 그냥 ‘그 탑’이거나 ‘저 탑’이기가 쉽다.

▲ 반변천 가에 세워진 봉감 모전 오층석탑. 뒤편 오른쪽에 감나무 한 그루가 정겹게 서 있다. 국보인데도 이 탑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불교에서 행해지는 탑돌이도 절집 안에 선 탑을 두고 행해질 뿐, 울타리를 잃고 저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탑 주위를 도는 이들은 없다. 부처님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겠다는 ‘서원(誓願)과 수행’이 탑돌이니 서원의 대상으로 기려지지 못하는 탑은 쉽게 잊힐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안동에서 영양으로 가는 길, 입압면 소재지를 조금 못미처 만나게 되는 봉감 모전 오층석탑도 그렇게 잊히고 있는 탑 중 하나다.

 

7~8년 전 일이다. 울진을 다녀오는 길에, 안내판을 보고 따라 들어갔더니 꽁꽁 얼어붙은 강가에 덩그렇게 벽돌탑 하나가 서 있었다. 일행들은 다소 호들갑을 떨면서 ‘아주 멋있는 탑’이라고 평가했고 그게 국보라는 사실에 필요 이상으로 놀라는 척했던 걸 기억한다.

▲ 봉감 모전 오층석탑. 지붕돌에 난 잡초가 희미하게 보인다.

작년 8월에 이어 지난 5일에 다시 찾은 그 탑이 봉감 모전 오층석탑이다. 소재지는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인데 마을 이름을 ‘봉감’이라고 부르기도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탑 주변의 논밭에 기와와 청자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절터였으리라고 추정하는데, 탑 이름에 비추어 폐사된 절집을 ‘봉감사(鳳甘寺)’로 보기도 한다.

 

탑은 영양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안동 내앞마을을 거쳐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반변천(半邊川) 가의 널따란 공터에 홀로 서 있다.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전체적인 균형과 정연한 축조방식을 갖추고 있으며,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탑신은 몸돌[옥신(屋身)]과 지붕돌[옥개석(屋蓋石)] 모두 벽돌 모양의 돌로 쌓았는데 이 돌은 매우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흡사 벽돌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체높이 11.3m이니 자못 위풍당당하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이 있다. 지금 전하는 모든 탑이 그러하듯 감실에 부처는 없으며 짙게 그을린 벽 앞에 불자들이 마련해 둔 촛대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지붕돌은 전탑의 양식에 따라 아래와 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다. 1단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이 탑이 학계에 알려진 것은 1943년 출판된 <조선의 석탑>에 소개되고서부터다. 오랜 세월 잊혔다가 깨어났지만, 여전히 사람들 기억에서는 먼 탑이다.

▲ 1층 몸돌과 그 한가운데의 감실. 잘 다듬은 석재는 벽돌이라고 우겨도 무방할 질감을 보여준다.

이 탑은 목탑, 전탑, 석탑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나는 ‘목탑번안(木塔飜案)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번안’이란 ‘남의 작품을 그 구상이나 줄거리는 바꾸지 아니하고 다른 표현양식을 써서 새로운 작품으로 고쳐 짓는 일’을 이르니, 목탑의 표현양식으로 지은 모전석탑이라는 뜻이 되겠다.

 

1977년 국보 187호로 지정되었는데도 봉감 모전 오층석탑은 마치 잊힌 탑 같아 보인다. 주변에 철책을 두르고 번듯한 안내판을 세우고, 주변에 주차장으로 쓰는 공터를 조성한 것 외에는 국가나 지방 자치단체(관리 책임은 영양군이 진다)의 보살핌을 받은 흔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새로 주차장 옆 배수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탑신 곳곳에 마치 페인트처럼 흘러내린 허연 얼룩(공사장 인부들은 아마 보수에 사용한 석회가 흘러내린 게 아닌가 추측했다)도 보기 사납지만, 지붕돌 윗면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바라보고 있으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바람에 실려 온 풀씨들을 받아안고 거기 무던히 싹을 틔우게 하는 것도 탑의 불심인가.

▲ 지붕돌에 날아온 풀씨 하나. 강아지풀로 돋았다.

한국인들의 인문 교양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펴낸 미술사학자 유홍준도 그의 답사기 제3권에서 이 돌탑에 대한 푸대접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영양의 국보인 봉감 모전 석탑은 명색이 국보 제187호인데도 TV는 고사하고 도록에서조차 제대로 주목받아본 일이 없다. 심지어 미술사, 건축사 전공자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를 찾아가는 동안 이정표라고는 산해리 마을 입구 표지석 밑에 작게 괄호치고 써 놓은 것뿐이니 국보는 국보로되 국보 대접 못 받는 것으로 봉감 모전 석탑만 한 것이 없을 성싶다.”

 

물론, 오래전 이야기니, 이정표는 큰길가에 번듯하게 세워졌고 새로 시작된 공사도 유홍준이 문화재청장이 되고 나서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국외자의 개탄과 내부자의 관심이 조화를 이루는 건 쉽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봉감리를 떠났다.

 

지방자치 이후 지역을 알리기 위한 노력은 바야흐로 백화제방이다. ‘선비의 고장’, ‘호국의 고장’, ‘충절의 고장’ 따위는 여러 지역에서 쓰는 바람에 다소 진부한 느낌이 있는데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안동시)나 ‘문향(文鄕)’, ‘문인의 고장’(영양군)은 그 이름과 실제의 상부(相符)와는 무관하게 문화적 자부심이 넘치는 시정 구호이다.

▲ 시인 오일도의 생가 사랑채. '국운헌' 현판을 달고 있다.

경상북도 영양군은 이른바 비와이시(BYC 경북의 오지로 봉화·영양·청송의 영문 머리글자)의 하나이니 인구 2만 명(2005년) 전후의 궁벽한 산촌이다. 영양은 그 들머리에 세운 환영 입간판을 통해 자신을 ‘문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 이는 영양이 청록파 시인 조지훈과 오일도, 소설가 이문열 등의 문인들을 배출한 고장인 까닭이다.

 

조지훈은 일월면 주곡리, 오일도는 영양읍 감천리, 이문열은 석보면 원리리 출신인데 고인이 된 지훈과 일도는 물론, 현역 작가인 이문열의 생가를 관광 지도에 표기할 정도이니 ‘문인의 고장’이라는 영양군의 자부심은 넘치고 드높다.

 

입암에서 영양읍으로 가는 길에 오일도가 나고 자란 동네 감천리가 있다. 오일도는 그리 널리 알려진 시인은 아닌 듯하다. 문학을 공부했는데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시는 겨우 ‘내 소녀(少女)’ 한 편 정도니 말이다.

▲ 감천마을 도로변 소공원에 서 있는 오일도 시비.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

박사(薄紗)의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  ‘내 소녀’ 전문

 

이처럼 지극히 짧은 형식의 ‘보는 시’의 전형을 만든 오일도는 1935년 순수 시문학지 <시원(詩苑)>을 창간한 인물이다. 감천마을 가운데 있는 44칸짜리 그의 생가는 경북 문화재 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크게 정침(正寢, 몸채)과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ㅁ자형 뜰집(뜰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된 집)’이고 대문채는 ‘一’자형이다. 이 집은 조선 후기 경북 북부지방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살림집 형태라 한다. ‘국운헌(菊雲軒)’ 현판을 단 사랑채가 단아해 보였다.

 

마을과 조금 떨어진 길옆 소공원에 오일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대국(大國) 글을 읽은 선비들의 문향이라서 그런가. 자연석에 한자로 새긴 ‘일도시비(一島詩碑)’ 네 글자는 오른쪽에서부터 읽어야 한다. 정작 그 아래 새겨진 시는 한글로 쓴 ‘저녁놀’이니 그 부조화도 만만찮다.

▲영양읍 현일리 삼층석탑(왼쪽)과 화천리 삼층석탑((오른쪽). 기단과 탑신에 돋을새김 된 조각이 화려하다.

영양읍에 있는 화천리 삼층석탑과 현일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때의 탑인데 기단과 몸돌에 12지신상, 팔부중상, 사천왕상 등 화려한 조각 장식이 있다던가, 높이나 전체적 모양새 등에서 비슷한 점이 많아 얼핏 보면 같은 탑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보물 지정도 609호(화천리), 610호(현일리)로 나란히 받았다.

▲ 현일리 삼층석탑(위). 영양읍 입구의 현1리 들판에 서 있는 이 탑은 좀 외로워 보인다. 화천리 삼층석탑(아래). 화천리 마을 안쪽 공터에 있다.

화천리 탑은 영양서 영덕 가는 길가 마을 안 공터에 서 있는데, 기단과 1층 몸돌이 낮고, 손상되지 않은 2, 3층 지붕돌이 날렵한 데다 끝을 살짝 위로 말아 올린 모양 때문에 현일리 탑보다는 더 안정되어 보인다. 현일리 탑이 너른 들판에 쓸쓸하게 서 있는데 비교해 화천리 탑은 대중들이 사는 마을 가운데 있어서 그런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 현이리 모전 오층석탑. 2층까지만 남아 있던 걸 1980년 해체, 복원했다.

두 탑도 역시 금당을 잃은 듯하다. 천 년의 시간이 지났으니 있었다 한들 그걸 가늠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주변에 절집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현일리 탑 바로 옆에 서 있는 현리 당간지주(경북 문화재 자료 85호)가 그나마 절집의 흔적을 희미하게 증언하지만, 이 210cm 높이의 화강암도 절 이름을 지키지 못했다. 이 당간지주는 탑과 나란히 서서 현일리의 널따란 들판을 지키고 서 있는데, 바로 옆을 지나는 고가도로에 짓눌려 옹색하고 초라해 보인다.

 

고가도로 옆 개울 건너 현이리 마을 언덕바지에 통일신라 대의 모전 오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한눈에 봉감리 탑을 본떠 만든 전탑인데 거의 7m에 이르는 높이, 흑회색의 점판암 재질과 둔탁한 겉모습이 어우러져 육중한 느낌을 자아낸다. 탑 주변에 전각 셋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 절집은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현이리 모전 오층석탑은 탑신의 2층까지만 남아 있던 것을 1980년 해체 복원했다. 새로 올린 빛깔이 다른, 그래서 생뚱맞은 상륜부, 감실에 끼워 넣은 철제 장식이나 그 앞에 모신 하얀 불상 따위는 주변의 새로 지은 전각과 어울려 묘한 부조화를 연출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이의 표현처럼 ‘성형 후유증’이라고도 할 만하다.

▲ 삼지리 모전 삼층석탑. 기단은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석재로 쌓았다.

영양에서 만난 마지막 탑은 삼지리 모전 삼층석탑이다. 이 탑은 읍내 삼지리 뒷산, 절벽을 이룬 산 중턱에 튀어나온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하여 화강암을 벽돌처럼 잘라 쌓았다. 현재 2층만 남아 있다. 신라 때 영혈사(靈穴寺)로 불리었던 연대암(蓮臺庵) 경내에 있으나 연대암이나 영혈사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 까닭은 그 연기(緣起)가 불분명한 까닭으로 보인다.

 

연대암 뒤편에 자연 석굴이 있는데, 숱한 불자들의 치성과 기도의 흔적들이 어지러웠다. 말하자면 이 공간이 ‘신령스러운 움[穴]’이었으리라. 교행이 어려운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서 잔뜩 긴장했는데, 하산길은 한눈에 마을과 들판이 굽어 보이니 훨씬 넉넉하다.

 

대중들은 서원을 위해 이리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산을 오르면서 가까워지는 탑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기도는 더욱더 간절해졌으리라. 가장 낮은 데서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의 소박한 믿음이 설사 일신과 일가의 안녕을 비는 데 그치는 ‘기복신앙’이라 한들, 누가 거기 오연히 손가락질할 것인가.

▲ 산 아래서 올려다본 삼지리 탑. 나무에 가려 실루엣만 보인다.

삼지리 마을을 떠나면서 나는 차창 너머로 떠나온 산을 올려다보았다. 산 능선 저쪽에 숲에 가려 탑의 실루엣만이 어렴풋이 보이다가 그것은 곧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시대와 세월에 따른 탑의 성쇠도 이처럼 덧없는 일인지 모른다.

 

2007. 2. 11. 낮달

 

 

'국보 맞아?' 잊혀지고 있는 우리 돌탑들

[안동지역의 탑이야기 ③] 문향(文鄕) 영양 지역 석탑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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