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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순국(殉國)

[순국] ‘남만의 맹호’ 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by 낮달2018 2024.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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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4월 13일-일송 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 일송 김동삼의 순국을 전하고 있는 당시 신문 기사.

만주벌 호랑이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1937413, 서대문형무소에서 만주벌 호랑이’, ‘남만(南滿)의 맹호일송(一松) 김동삼(1878~1937) 선생이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향년 59.

 

일본의 만주침공(1931) 직후, 경북 영양 출신의 남자현과 항일 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일제에 체포된 일송은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을 거쳐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그는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진보적 중도 민족주의자였다. 당시 부르주아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으로 나뉘었던 독립운동 세력 사이에서 민족통합을 우선으로 두고, 좌우통합을 위해 노력한 그는 이념에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가곡 선구자모델, 진보적 중도 민족주의자

 

일송 김동삼은 용정을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를 노래한 가곡 선구자’(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의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원래 룡정의 노래로 해방 뒤 한국에서선구자로 제목과 가사가 고쳐지고 작사·작곡 경위도 조작되었음이 재만 음악인에 의해 밝혀졌다. 윤해영과 조두남은 각각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부역자다.

 

선구자의 가사에 등장하는 일송정(一松亭)은 용정에 망명한 민족운동가들이 자주 올랐던 비암산 위에 정자 모양으로 서 있는 소나무다.

 

김동삼의 본관은 의성, 본명은 긍식(肯植), 호는 일송이다. 이름을 동삼으로 쓰게 된 것은 중국 망명 후 동삼성(東三省)의 호칭을 따면서부터다. 동생은 동만(東滿). 그는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출신이다.

▲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에 있는 김동삼 선생의 생가. 입구에 안내판이 세워졌다.

내앞마을은 일제 침략기에 숱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동네다. 이 마을의 의성 김씨 일족은 만주로 집단 망명하여 항일투쟁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그중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이가 일송을 비롯하여 김대락(1990 애족장), 김동만(1991 애국장), 김장식(1995 애국장) 등 스무 명에 이른다. [관련 글 : 나라 없는 몸…무덤은 남겨 무엇하겠느냐]

 

내앞마을에서 첫 망명길에 오른 이가 백하(白下) 김대락(1845~1914)으로 그는 일송의 집안 아저씨[족숙(族叔)]였다. 백하는 경술년(1910) 겨울에 66세의 노구로 만삭의 손부, 손녀를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증손자들이 일본 신민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안동 협동학교 설립에 참여하며 민족운동 시작

 

일송은 안동 의병의 최고지도자였던 서산 김흥락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으나 그가 민족운동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스물아홉 살 때였다. 1907, 마을에 영남지역 최초의 3년제 중등 교육기관 협동학교설립에 참여한 것이다.

 

협동학교는 비록 단명했지만, 이 운동의 주역들은 이후 내앞 항일운동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생부와 스승으로부터 의절과 파문을 감수해야 했던 설립자 동산 유인식(1982 독립장)을 비롯하여 석주 이상룡(1962 독립장)과 일송 김동삼이 그들이다.

▲ 일송 김동삼의 가족사진. 일송을 비롯한 내앞마을 사람들은 만주로 집단 망명했다.ⓒ 국가보훈처

▲ 일송 김동삼(맨 뒤 왼쪽)과 협동학교 교직원들(1907년)

내앞마을의 집단 망명은 일송이 주도했는데 의성 김씨 문중과 이웃한 이상룡의 고성 이씨 문중에서 각각 150명 정도가 만주로 향했다. 또 이들과 혼맥(婚脈)을 이룬 영덕의 무안 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안동의 흥해 배씨, 그리고 영양 주실마을의 한양 조씨 문중 등이 참가하였다.

 

일송이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것은 19111월이었다. 그는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耕學社) 결성에 참여하였다. 경학사가 이주 동포를 위한 경작지 마련과 농사를 지도할 자치기관이라면 신흥학교는 인력 양성 기관이었다.

 

농장으로 위장한 군대, 백서농장 건립

 

일송은 1914년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그 장주(庄主)가 되었다. 그는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의 노동야학 졸업생 등 385명을 인솔하고, 통화현 팔리초 깊은 산속에 들어가 농장을 세웠는데 사실상 위장한 군대였다.

 

일송은 19192월 길림에서 민족대표 39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어 서간도의 독립운동 전선이 정비되면서 백서농장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되었고, 일송은 이 조직의 참모장이 되었다. 같은 해 411일에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20년 여름(봉오동 전투)부터 가을(청산리 전투)에 걸쳐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과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일제의 보복 공세가 거세어지자 일송은 서로군정서 사령관 이청천과 함께 3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북간도로 이동했다. [관련 글 : 1920년 오늘-청산리 전투, 대승으로 시작되다]

 

일본군의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으로 한인사회는 참혹한 변고(경신참변)를 겪어야 했다. 일송도 삼원포 삼광학교(三光學校) 교장으로 활약하던 동생 김동만을 잃었다. 부득이 서간도 독립운동 세력은 북만주로 옮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일송은 무너진 한인 동포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과 분산된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는 일에 나섰다. 19226월에 한인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꾀하고자 남만(南滿)통일회를 주도하여 합의를 도출, ‘통군부’(統軍府, 뒤에 통의부로 개편)를 결성했다.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에 헌신한 삶

 

1923, 국민대표 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국내와 국외지역에서 지역대표와 단체대표 400명 정도가 상하이에 모인 이 회의에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 참석했던 일송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도산 안창호가 부의장이었던 걸 고려하면 이는 독립운동계에서 일송의 위상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국민대표 회의가 두 세력으로 나뉘면서 결렬되자 일송은 만주로 돌아와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는 일에 나섰다. 1924년에 10개 단체 대표를 모아 연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가 그 노력의 결과였다. 의장으로 선임된 그는 참의부·신민부와 함께 만주지역 3대 조직의 하나가 된 정의부 탄생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26년에 석주 이상룡이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되자, 그는 일송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일송은 항일 무장투쟁의 터전인 만주를 버려둘 수 없다면서 이를 고사하였다. 그는 1927년 이후에는 국내외에서 전개된 유일당(唯一黨) 운동에 힘을 쏟았다. 그것은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당을 두고 이를 중심으로 정부를 운영하자는 것으로 이념으로 분화된 좌우세력을 통합하는 운동이었다.

 

일송이 1927년 정의부 간부 30여 명과 함께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여 농민들의 상호부조 속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굳게 만드는 등 농민조합 운동을 시작한 것도 그러한 차원에서였다. 일송은 19285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 통합회의를 개최해 분열된 독립운동세력의 대통합을 모색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새로운 통합방법을 모색, 이탈세력을 규합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가 조직되었고, 선생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갖은 노력에도 민족유일당 계획은 무산되었다.

 

진보적 중도 민족주의자로서 일송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으로 갈등 반목하던 당시 상황에서 민족통합을 우선으로 좌우세력을 아우르고자 했던 통합주의자였다. 그는 독립군 조직에 문제가 생겨 이를 수습하는 회의마다 의장을 맡다시피 한 존경받는 지도자였지만 그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 일본 경찰이 작성한 김동삼 수인표. ⓒ 권태균

▲ 서대문형무소 옥사 내부. 일송 김동삼은 1937년 4월, 이 감옥에서 순국했다.

만주사변(1931) 직후, 일송은 항일 공작을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체포되었다. 일경의 추적을 피한 남자현(1872~1933)이 이듬해(1932) 9월 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를 방문할 때 무명지를 잘라 독립을 호소한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그가 목표한 공작이 일제의 만주침공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관련 글 : 영화 <암살>, 혹은 역사에 대한 성찰]

 

만해가 일생에 단 한 번 흘린 눈물로 치른 장례

 

일송이 옥중에서 순국하자 일제는 이를 비밀에 부쳤고 마땅히 시신을 거둘 사람도 없었다. 평소 그를 존경해 왔던 만해 한용운(1879~1944)이 달려와 내 이 어른을 내 집에 모시는 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알겠다.”고 하며 자신의 거처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장례를 치렀다.

▲ 안동시 안동댐 보조광장에 세워진 일송의 어록비.

장례는 일송의 유언대로 이루어졌다. 화장한 그의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그 장례식은 만해가 일생에 단 한 번 눈물을 흘린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은 일송의 삶과 투쟁에 대해 바치는 만해 한용운의 경의였다.

 

1962년에 일송 김동삼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초입에는 그의 생가가 남아 있고 안동댐 보조광장에는 1999년 그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돌비에는 그의 옥중 유언이 새겨져 그의 삶과 투쟁을 증언하고 있다.

 

2018. 4. 12.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보훈처, 유공자 공훈록

· 김희곤 강연, ‘독립운동계의 거성이자 통합운동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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