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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순국(殉國)

[순국]‘훈춘 호랑이’ 황병길, 서른다섯에 지다

by 낮달2018 202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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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 1일, 훈춘의 3·1운동 지도자 황병길 순국

▲ 훈춘에 묻힌 황병길의 유해는 1992년 고국으로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20년 6월 1일, 독립투쟁으로 인한 과로로 쓰러진, 중국 훈춘(琿春) 지역의 3·1운동 지도자 황병길(黃炳吉, 1885~1920) 선생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향년 35세. 그는 일찍이 안중근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고 의병투쟁을 벌였고, 두만강 너머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 큰 전과를 거두어 ‘훈춘 호랑이’로 불리었던 만주지역 항일 무장투쟁의 지도자였다.

 

함경북도 경원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난 황병길은 가난하여 서당에 다니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글을 깨쳤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만주로 이주하여 1908년, 러일전쟁 전의 우리나라 간도 관리사였던 이범윤(1865~1940)이 조직한 사포대(射砲隊)에 가입하여 안중근, 최재형, 엄창섭과 함께 회령, 부령, 경성, 온성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경원군 신아산(新阿山) 주둔 일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혼자서 일본군 14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거두어 ‘훈춘 호랑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연해주로 이주한 뒤 연추에서 안중근, 백규삼 등과 단지(斷指)동맹을 맺어 조국 독립을 염원하였다.

 

1911년 연추에서 훈춘으로 재이주한 뒤에는 훈춘 기독교우회 부속 학교 등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독립군 인재 양성에 힘썼다. 황병길은 훈춘 순경국(巡警局)에 고용되어 독립운동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중국 관헌과 협조체제를 유지하였으며, 조직적인 군자금 모집에도 힘썼다.

 

1917년 일제는 북간도 지역에서 한인을 이용하여 침략세력을 확장하려 획책, 유명 독립운동가였던 황병길과 양하구 등을 체포하여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관광을 권유, 친일세력을 늘리려 하였다. 일제의 강박으로 황병길은 경성시찰단의 단장을 맡게 되는 위기가 있었지만, 독립에 대한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훈춘에서 동포 5천여 명 시가행진 조직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황병길은 동지 노종환, 양하구와 함께 거사계획을 세웠다. 3월 20일에 모든 훈춘 시민이 자진 철시한 가운데 집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시위 군중 5천여 명이 모여 3·1독립선언 축하 민중대회를 개최했다. 5천여 군중은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며 시가를 행진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황병길은 3월 30일에는 훈춘현 한덕자(漢德子)에서, 4월 1일엔 탑도구(塔道溝)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말에는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하고 9월엔 부인 김숙경이 훈춘 거주 여성들과 함께 훈춘 애국부인회를 조직하는 걸 도왔다.

▲ 단지동맹에 참여한 애국청년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황병길이다. ⓒ 국가보훈처

황병길은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급진단(急進團)’ 간부로 노령 지역에서 무기 확보에 힘써 소총 1백3자루, 탄환 5천여 발, 군자금 85만6천여 루블을 조달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군무부장이 되어 국내로 진격, 고건원, 용당, 경흥 일대에서 왜정 기관을 폭파하고 일본 밀정을 살해하는 등 일제를 압박하였다.

 

그는 북로군정서와 통합하여 모연대장(募捐隊長)으로 활약하였으며, 1920년 2월부터는 의용군 1300여 명을 무장시켜 경원·온성 등 국경지방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1920년 3월 18일. 황병길은 부하 최용삼과 함께 온성군 장덕동 미산 헌병감시소를 습격하여 일본군과 40분간 교전하였으며, 일본 헌병보에 중상을 입히고 통신을 두절시켰다.

▲ 훈춘은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동부에 있는 도시다. ⓒ 위키백과

황병길의 활동이 활발하므로 일제로서는 연해주와 북간도의 연계지점인 훈춘에서의 독립운동 열기를 제거해야만 했다. 일제가 ‘그는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니 체포에 총력을 집중하라’고 지시하고 중국을 압박하면서 군대 동원을 계획할 정도였다.

 

1920년 4월, 끊임없는 항일투쟁의 삶은 ‘훈춘의 호랑이’를 주저앉혔다. 1920년 4월, 그는 과로로 인해 병석에 누웠고, 6월 1일, 마침내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그의 가족은 모두 항일투쟁에 생애를 바쳤다. 애국부인회 활동으로 유명한 그의 부인 김숙경(1886~1930, 1995 건국훈장 애족장)을 비롯하여 둘째 딸 정신, 민족교육 기관이자 군사 양성소인 북일학교 부교장 김남극의 며느리가 되었던 셋째 딸 정일, 동북항일연군으로 활동한 막내아들 정해도 어버이가 선택한 길을 따랐다.

 

항일투쟁에 생애를 바친 가족

 

황병길은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지만 훈춘 지방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는 이다. 그의 유해는 훈춘의 연통랍자(煙筒拉子)에 안장되었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와 유가족의 희망에 따라 그의 유해는 모국으로 봉환,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황병길의 유해는 고국으로 봉환되었다. 연합뉴스 사진.

순국하기 전까지 훈춘과 연해주를 연결하면서 군대 양성과 무장 항일투쟁을 계속한 황병길의 독립운동은 무장독립운동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에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8. 5. 31. 낮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 김주용, 황병길의 생애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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