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3월 10일, 도산 안창호 병보석 중 타계하다
1938년 3월 10일,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가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간 경화증으로 파란 많았던 우국의 삶을 마감했다. 그는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복역하다가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 되어 요양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향년 60세.
도산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상경하여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밀러학당, 통칭 언드우드학당)에 입학, 3년간 수학하며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양에서 관서지부 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때 평양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수백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18조목의 쾌재(快哉,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되어 외치는 통쾌한 외침)와 18조목의 부재(不哉)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로서 열아홉 청년 도산은 계몽 인사로 등단한 것이었다.
도산은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이듬해에는 평남 강서군에 초등과정의 남녀공학으로 점진학교를 설립하였다. 1902년에는 미국으로 가 1905년에는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하고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신민회 조직, 대성학교 설립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이듬해 귀국했고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1907),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1907)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서관을 세웠다.
도산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1909)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도산은 중국에서 민족지도자들과 북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어 영농과 군사양성을 꾀하려는 청도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회의가 실패하자 1911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1910년 망명을 앞두고 그가 지은 노래가 유명한 ‘거국가(去國歌)’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時運)이
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간다 한들 영 갈쏘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도산은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을 창설했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출(1914)되어 동포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교민단체를 이끌었다. 이후 도산은 미국과 고국, 중국 등지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았고, 1927년에는 독립군 조직의 통일과 대독립당(大獨立黨) 결성에 힘써, 1930년 1월 상하이에서 이동녕, 이시영,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였다.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 대공주의 주창
대공주의는 ‘개인은 민족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그 천직(天職)을 다 한다’는 사상으로 ‘개체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개체를 위하여’라는 구호로 대변된다. 그것은 1920년대 내내 독립운동의 걸림돌이었던 고질적인 사상분열을 극복하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사상과 노선 갈등의 극한 대립을 융화시키고자 제시한 ‘제3의 길’이었다.
1932년, 도산은 일본의 중국 본토 침략정책에 대응하여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계획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그해 4월,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虹口) 의거 이후 도산은 일본의 배후 소탕과정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실제 김구의 무장 투쟁 노선에 반대했던 도산은 훙커우 의거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의거 후 백범이 이 거사가 자신의 지휘 아래 치러진 사실을 밝혔지만, 도산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도산은 1935년 가석방으로 출옥하여 평남 대보산 송태산장에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도산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흥사단의 자매단체였던 수양동우회는 그 무렵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본격적인 전쟁 체제를 조성하기 위해서 양심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집단을 포섭하려 수양동우회를 대상으로 표적 수사를 벌인 것이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다. 작곡가 홍난파가 그랬고 중심인물이었던 이광수와 주요한은 이후 극렬한 친일 행적을 벌이기 시작했다. 동우회는 1937년 해산되면서 보유 자금과 토지, 사무기구를 매각한 금액까지 긁어모아 국방헌금으로 냈다.
도산은 수감 중 병이 깊어지자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모든 재산을 대성학교와 이상촌(理想村) 건설을 위한 토지 매입에 쓴 도산은 가난했고 그의 병원비는 윤치호와 김성수, 이광수 등이 댔다. 그러나 이미 병세가 손쓰지 못할 만큼 위중해졌던 도산은 3월 10일, 마침내 격동의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도산은 널리 알려진 대로 스스로 힘을 키워야만 민족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전망한 실력양성론자였다. 그의 실력양성론에 감화받은 이광수, 최남선, 김성수 등은 그러나 뒷날 친일의 길로 나아갔다. 그것은 실력양성론이 독립을 단계적으로 실현하자는 논지여서 훨씬 타협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력양성론자, 무실역행 강조한 중도주의자
안창호는 개인의 당리나 사익보다 사회 전반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민주적 토론절차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족 평등, 정치 평등, 경제 평등, 교육 평등의 사회민주주의 나라 수립을 지향하는 중도적 노선을 선호했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군부(君父)의 원수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이라 하였으니 내 평생에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농담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痛悔)하라.”
도산은 한국인들의 거짓, 사기, 부정이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갔다고 진단했다. 이른바 ‘거짓 망국론’이다. 망국의 원인을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 일제의 침략 대신에 개별 국민의 도덕성 파탄에서 찾은, 어쩌면 순진하고 낭만적인 발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도산이 본격 독립운동보다 순회강연과 이상촌 건설에 매진했던 것도 비슷한 경우였다.
도산이 교육을 통하여 민족혁신을 이룩하여야 한다면서 민족혁신은 자아 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자아 혁신은 바로 인격 혁신이라 본 것도 같은 논지에서다.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도산은 자아 혁신은 곧 자기개조로 연결되며, 자기개조는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무실역행을 강조하였는데,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이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무실은 개조의 ‘내용’이고 역행은 그 ‘행동’이니 무실과 역행 없이는 자기개조가 불가능함을 주장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기반은 도덕과 윤리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주창한 사상에 걸맞게 자신의 사상을 삶 속에서 완벽하게 실천하고 재현했다. 관점에 따라 지나치게 도덕군자 같은 논리로 비판받을 수 있는데도 그가 일반의 존경을 한몸에 받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겸허한 사람이었다. 명석한 데다 타고난 언변과 통솔력, 용기와 덕성을 지닌 인격자였지만 오만하거나 독선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앞에 나서서 내로라하지 않았고 뒤에서 묵묵히 자기 직분을 다하는 이였다.
‘민족개량주의자’로 비판도
‘민족의 선각자’,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가와 동시에 그는 ‘개량주의자’, ‘조선독립불가론자’, ‘자치론자’ 등 독립운동에 파벌을 조장하고 민족개량주의를 기른 인물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실제로 그의 노선을 따랐던 이광수, 최남선, 윤치호 등의 인물들이 대부분 1930년대 중반 이후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러나, 도산 자신은 언제나 중립적 입장에서 평행을 유지하려 했고, 파벌을 조장하는 것을 경계했다. 추종자들이 변절했는데도 비난이 그에게 오지 않은 것은 그가 항심(恒心)을 잃지 않는 실천적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고 정직하고 도덕적이었다. 조부의 뜻에 따라 원치 않는 결혼을 했지만, 그 아내와 일생을 같이했고 어떤 경우에도 절제를 잃지 않았다.
도산의 장례식은 흥사단과 수양동지회 회원의 주도로 거행되었고 그는 망우리에 묻혔다. 총독부는 소요사태를 막는다는 구실로 헌병을 보내 장지로의 출입을 통제 감시하였다. 그의 유해는 1973년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도산에게 건국 공로 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을 추서하였다. 도산이 살았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도 그의 이름을 딴 나들목(2002)과 우체국(2004)이 각각 세워져 그의 삶을 기리고 있다.
도산은 그의 독립운동 노선이 개량적이라는 비판적 평가가 존재해도 북한에서도 ‘상급의 애국열사’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그의 일관된 삶과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던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틀 속에서 자유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은 물론,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인 평등의 가치 역시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지도자였던 것이다.
2018. 3. 9.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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