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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순국(殉國)

[순국(殉國)] 임정 주석 이동녕·민족해방운동가 김마리아 떠나다

by 낮달2018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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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殉國)] 1940313, 이동녕 치장에서 급성폐렴으로 스러지다

▲ 1940년 3월 13일 급성폐렴으로 순국한 임정 주석 이동녕 선생의 장례는 17일 국장으로 치러졌다.

1940년 3월 13일, 임시정부 17대 주석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이 쓰촨성(泗川城) 치장(綦江)에서 급성폐렴으로 순국했다.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한 지 서른 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 풍찬노숙한 세월 스물한 해, 그는 생애 네 번째로 내각 수반을 맡아 분투 중이었다. 

 

이동녕은 구한말 독립협회에 가담해 구국운동을 전개한 이래 임종의 순간까지 독립 전선에 있었다. 그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이었고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 정부(1914)의 주역이었다. ‘무오독립선언’(1918)에 참여했고, 1919년 상하이 임정 수립 때는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이었다. 11대(1925)와 13대(1929)에도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았다.

 

모두 7차례나 임정 수반 지낸 석오 이동녕

 

이동녕은 충남 천안 출신이다. 열여섯에 일가가 서울로 솔가하여 종로에 정착하였다. 1892년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구국운동을 시작하였다. 1897년 종로 만민공동회에서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하였다가 이준, 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그는 또 임시정부의 2대(1919), 11대(1924) 국무총리였고, 5대(1926), 7대(1926)의 국무령, 11대(1927), 12대(1930), 15대(1933), 16대(1935), 17대(1939)의 주석을 역임했다. 이는 백범 김구의 다섯 차례보다 더 많이 임정 수반을 지낸 것이다. 그러나 석오 이동녕의 지명도는 백범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출옥한 뒤 <제국신문> 논설위원으로 개회 논설 수십 편을 집필했다. 그는 논설을 통해 개화와 함께 여성의 해방과 사회참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나라의 주인은 국민임을 명백히 밝힌 ‘국민참정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 임정과 의정원 1921년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앞에서 둘째 줄 오른쪽에서 7번째가 석오.

1903년에는 이상재, 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YMCA 운동을 벌였고 1904년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상동교회에서 양기탁·신채호·조성환 등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해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면서 김구와 이회영 등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며 조약 무효와 파기를 선언했다가 일본 헌병에 잡혀 두 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동녕은 1906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 이상설 등과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하여 동포와 2세의 민족 교육을 시행하였다. 

 

1907년 이준, 이상설 등이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가자 귀국하여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노백린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또 대성학교와 오산학교 설립을 돕고 상동학교를 세워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0년 서간도 망명, 신흥학교 초대 교장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매 그는 다시 조국을 떠나 만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망명하였다. 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 형제와 이상룡 등과 함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여 동포들의 신분을 보장하고 독립정신을 북돋웠다.

 

특히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한국사, 윤리학, 경제학, 신지리, 박물학 등을 직접 가르쳤다. 이 학교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확장, 개편되어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 기관이 되었다. 1913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난 석오는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4년 이동녕은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세웠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에 널리 퍼져 있는 무장력을 갖춘 각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독립전쟁을 구현할 망명 정부였다. 

 

이동녕은 김동삼, 조소앙 등과 함께 평화와 자유를 애호하는 전 세계 민족 앞에 호소할 독립선언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1918년 음력 11월,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3·1운동에 영향을 끼친 이 선언이 바로 ‘무오독립선언’이다. 이 선언에 동참한 독립지사는 대종교 제2대 교주인 김교헌을 필두로 하여 신규식·박은식·안창호·이시영·신채호·김좌진·김규식·이승만 등 39명이었다.

▲ 1932년 자싱(嘉興) 피난 시기 저장성의 집에서 찍은 임정 요인과 가족들. 뒷줄 중앙이 이동녕 주석.

이듬해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로 건너가 정부 조직을 모색하던 석오는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13일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28명의 동지와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한 석오는 얼마 뒤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 의장

 

그해 9월, 국내와 노령, 중국 등 세 갈래의 임시정부가 통합되고,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면서 석오는 내무총장이 되었다. 그 뒤, 국민대표회의 소집 등 임정의 불신이 표면화되자 석오는 안창호·여운형·조소앙·이시영·차이석·홍진·노백린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고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24년에 석오는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궐석으로 직무수행이 어렵게 되자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1926년 임정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제도로 개정되자 잠시 국무령을 맡았으며 다음 해에는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 자싱 피난 시기의 임정 국무위원들. 앞줄 중앙이 석오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 의장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두 번째로 주석(1930∼1932)의 중책을 짊어졌다. 1932년 백범과 함께 이봉창과 윤봉길, 양 의사의 거사를 조직하여, ‘훙커우(虹口)의 쾌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임정은 13년간의 상하이시기를 마감하고 항저우(杭州)로 옮겨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35년 석오는 세 번째로 임정의 주석(1935∼1939)이 되었다. 이때 이시영·조성환·차이석·송병조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이사에 선임되었다. 항저우에서 전장(鎭江)으로 이동(1935)했던 임정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다시 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 등을 전전했다. 

 

1937년 석오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결속하고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임정은 일곱 번째 도시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으로 옮겼다. 여기서 석오는 네 번째 주석(1939∼1940)이 되어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 시안(西安)에 군사 특파단을 파견하였다.

 

이듬해 4월, 망명 30년을 넘겨 이미 일흔한 살의 고령이었던 석오 이동녕은 급성폐렴으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해방을 맞을 수 있는 다섯 해의 수명이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백범 김구는 석오의 타계를 안타깝게 추모했다. 

▲ 쓰촨성 치장에 있었던 석오 이동녕 선생의 묘.
▲ 석오의 유해는 봉환되어 효창공원 임정 요인 묘역에 조성환(좌), 차이석(우) 선생과 함께 안장되었다.

백범, “선생의 애호를 받은 이는 오직 나 한 사람”

 

“(……)석오 이동녕 선생이 71세 고령으로 작고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내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30여 년 전이다. 을사늑약 때 경성의 상동예수교당에서 진사 이석으로 행세할 때 상봉하여 같이 상소 운동에 참가하였다. 합병 후 경성 양기탁의 사랑에서 다시 밀회하여 장래의 독립운동을 위한 서간도 무관학교 설립에 관한 일체 사무를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그 후 기미년 상해에서 또다시 상봉하여 20여 년 고초도 같이 겪고 사업도 함께 해 오면서 한마음 한뜻으로 지냈다.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었다. 석오 선생이 별세한 뒤, 일을 만나면 당장 선생 생각부터 하게 되니 이는 선생만 한 고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랴. 우리 운동계의 대손실이라 할 수 있다.”

  

    - 김구, <백범일지>(돌베개, 2014) 중에서

▲ 1993년에 세워진 집터 표석(종로 훈정동)
▲ 충청남도 기념물 제72호로 지정된 이동녕 생가의 문간. 천안시 목천읍 동리. ⓒ 국가문화유산포탈
▲ 이동녕 생가 앞에 2010년에 세워진 석오 이동녕 선생 기념관. ⓒ 두피디아

석오 이동녕은 치장에 묻혔다가 조국광복 후 1948년 봉환되어 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효창공원 임정 요인 묘역에 조성환, 차이석 선생과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 있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72호 이동녕 생가 앞에 2010년 석오 이동녕 선생 기념관이 세워졌다. 1993년에는 종로구 훈정동에 이동녕 집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대한민국 국회 중앙홀에는 석오 이동녕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과 임정 수반을 지낸 석오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8. 3. 12.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천안시 석오 이동녕 기념관 

 

1944년 3월 13일 - 민족해방운동가 김마리아 수저 한 벌만 남기고 떠나다

▲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검거된 김마리아에 관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당시 신문 기사

1944년 오늘(3월 13일), 민족해방운동가 김마리아(1891~1944)가 해방을 1년여 앞두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다. 향년 52세. 

 

두 차례의 투옥 중에 받은 고문 후유증이 그의 숨을 거두어 갔다. 여성 교육이 전무했던 시절,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독신으로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헌신한 이 담대한 여성은 수저 한 벌만 유품으로 남겼다.

 

“일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고문했는지,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차고… 그러나 내 정신은 똑똑해서 ‘너희가 할 대로 다해라. 그러나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이 생명만은 너희가 못 빼내리라’ 하고 생각했어.”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저고리를 입어야 했던 사람

 

그이는 수감 중 여성으로서 치욕적 고문을 받아 한쪽 가슴을 잃고 늘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특별한 저고리를 입어야 했던 사람, 대한 독립과 결혼했다며 여러 번의 청혼을 모두 거절하고 마침내 홀몸으로 떠났던 사람이었다.

 

김마리아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회(소래교회)가 설립된 황해도 장연 소래 출신이다. 본관은 광산. 아버지는 한학자로,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운 대지주였다. 그는 학교와 교회를 통해 서구적 근대교육을 받고 기독교적 인생관을 정립하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연동여학교(현재 정신여자중학교)를 다니면서 안창호, 김규식과 절친한 숙부 김필순과 고모 김순애의 영향을 받아 남다른 민족의식을 형성했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광주 수피아여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공부하던 김마리아는 재일본 유학생들이 추진하고 있던 2·8 독립선언 등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2·8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 중 여학생은 없었다. 그는 여자가 남자와 동등하게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꼈고 독립운동에서의 여성들의 참여 확대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1919년 2월 중순, 졸업을 포기하고 김마리아는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기모노의 허리띠에 숨겨 귀국했다. 그때까지 여자 유학생에 대해선 일경의 감시가 느슨해서 그는 “여성들이 단체를 만들어 남자들과 긴밀히 연락하고 남자단체의 활동이 어려울 때는 여자단체가 대신하자”고 주장했다.

▲ 김마리아는 일본에서 귀국하면서 기모노 허리띠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가져왔다. KBS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 있소?”

 

귀국 후 그는 대구와 광주, 서울과 황해도 일대에서 3·1운동 사전 준비운동을 벌였다. 황해도 봉산에서 3·1운동 발발 소식을 듣고 곧장 서울로 올라온 그는 3월 5일 모교 기숙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일제 검경에게 시종 당당해서 당시 일본 검사는 “너는 영웅이다. 너보다도 너를 낳은 네 어머니가 더 영웅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가 있소?”

 

김마리아는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동안 복역했다. 이때 고문으로 얻은, 뼛속에 고름이 차는 유양돌기염과 상악골 축농증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고문으로 몸은 망가졌지만, 그는 출감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 1919년 9월 모교에서 비밀리에 20여 명의 여성 지도자들을 모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옛말에 나라 사랑하기를 내 집 사랑하듯 하라 하였거니와… 국민 모두가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으니… 아, 우리 부인들도 국민 중의 한 분자다. 빼앗긴 인권을 찾고 빼앗긴 국권을 회복할 최대의 목적을 향해서 우리 부인들에게는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취지서’ 중에서

 

애국부인회는 전국적인 항일여성조직으로 확대되었고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11월 김마리아는 다시 투옥되었지만, 그의 기상은 여전히 드높았다. 징역 3년을 선고한 일제의 판결문에서도 그의 당당한 모습이 엿보인다. 

 

“김마리아는 인격과 재질이 비범한 천재이나, 대담하고 거만하며, 가증한 것은 ‘나는 일본의 연호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니 그의 눈에 일본제국이란 것은 없다.……”

 

김마리아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황해도 대의원, 국민대표회의 여성계 대표로 활동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을 앓아야 했다. 독립을 위한 실력을 기르기 위해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여긴 김마리아는 192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 1938년 이후 각 교파의 목회자들까지 신사참배에 나섰지만, 그는 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10여 년간 파크대, 시카고대, 컬럼비아대, 뉴욕신학원 등에서 사회학, 교육행정학, 종교교육학을 공부했고 현지에서 만난 대한애국부인회 동지들과 다시 여성 독립운동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벌였다.

 

1932년 7월, 40세의 나이로 귀국한 김마리아는 원산의 마르다 윌슨 여자신학교 교수로 취임, 기독교 여성 지도자를 양성하던 중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성경을 통해 조국과 민족 사랑을 가르치는 데 진력했다.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한 강골의 운동가

일제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하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하고,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까지 신사참배에 나섰지만, 그가 이끄는 여전도회는 공식적 모임을 회피함으로써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강건했던 독립운동가도 총독부의 집요한 공작과 회유 앞에서 흔들리고 변절하는 예도 있었다. 그러나 김마리아는 혹독한 고문과 지속적인 탄압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았다. 그가 떠나자 도산 안창호가 “김마리아 같은 여성 동지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됐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2007년 ‘여성 인물을 화폐에!’라는 이름의 여성단체는 유관순과 허난설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를 10만 원권 지폐의 인물로 선정하자며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마리아는 지폐의 도안으로 오를 만한 위대한 민족해방운동가였기 때문이다. 

▲ 2004년 천안의 독립기념관에는 김마리아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김마리아의 유해는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대동강에 뿌려졌다. 해방 뒤 정부는 1962년 김마리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울 보라매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04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남긴 어록비가 세워졌다. 

 

가장 기본이 되는 원칙이되 누구나 쉽게 지킬 수는 없는 그의 어록을 곰곰이 뜯어 읽으며 ‘나라와 결혼했다’고 강변했지만, 마침내 국민으로부터 내쳐진, ‘박근혜 없는 봄’을 맞는다.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는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2017. 3. 12. 낮달

 

 

* 참고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

·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훈터’

* 김마리아 어록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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