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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순국(殉國)

[순국]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뤼순서 순국

by 낮달2018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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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안중근(1879~1910), 뤼순(旅順)에서 지다

▲ 뤼순 감옥의 안중근 의사. ⓒ 독립기념관
▲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소재 뤼순 감옥.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이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 김태빈

1910년 오늘(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날이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1909년 10월 26일)한 지 꼭 다섯 달 만이요,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1910년 2월 14일)받은 지 한 달 열흘만이었다.

가톨릭교회, ‘살인자’의 종부성사 거부

이 자료에 따르면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안중근은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Mutel, 1854~1933)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에게 사제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聖) 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2008년 3월,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의 마지막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자료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2월 14일부터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의 안중근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 주고 있다.

안중근은 순국 전에 가족에게 장남 분도를 사제로 기르라고 부탁할 만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조선 가톨릭교회의 프랑스인 주교 뮈텔은 ‘암살자가 천주교 신자일 수 없다’고 하며 안중근의 종부성사(죽기 전에 주는 천주교 의식)마저 거부했다.(안중근이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공식 복권된 것은 1993년이었다. 2010년에 명동성당에서 안중근 순국 100주년 미사가 봉헌되었다.)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안중근을 면회한 뒤 고해성사(3월 9일)와 종부성사(3월 10일)를 집행한 이는 황해도에서 안중근과 함께 선교했던 프랑스인 니콜라 조제프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lhelm, 한국명 홍석구, 1860~1936) 황해도 신천 본당 주임신부였다. 이에 뮈텔 주교는 빌렘 신부에게 사제로서 활동할 수 없도록 ‘성사 집행중지 처분’을 내려 문책했다.(뒤에 빌렘은 교황청 교회법원에 항소하여, ‘특별상황에서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 사형선고 후, 뮈텔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과 면회하고 있는 조제프 빌렘 신부.
▲ 순국 직전, 어머니가 지어 보낸 명주옷을 입고 있다. ⓒ 독립기념관

뮈텔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 8월 4일부터 선종한 1933년 1월 14일까지 쓴 일기로 유명하지만,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그는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일제에 밀고(1911년 1월 11일 일기)할 만큼 철저히 일제에 협력했다. [관련 기사 : 가톨릭의 불편한 진실, 뮈텔 일기]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3월 25일, 통감부의 요청으로 사형 집행이 연기된다. 25일은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태어난 건원절이었고, 27일은 부활절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군은 면회 온 두 동생에게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에 대한 용서를 청했고 장남 분도를 가톨릭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했다.

3월 26일은 토요일이었다. 고국의 어머니가 지어 보낸 명주옷으로 갈아입은 그의 모습은 의연했다. 마지막 편지로 죽음을 앞둔 아들에게 당신의 당부를 전하는 그 어머니는 더 의연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도 마지막으로 만난 동생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 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일본 헌병 치바 도시치와 그가 받은 안 의사의 유묵

안중근의 사형 집행 현장에 참석한 사람은 미조부치 검찰관과 구리하라 전옥(典獄, 교도소장)이었다. 오전 10시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11분 후, 재판 과정에서 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던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의 숨이 끊어졌다. 향년 32세. 그의 시신은 뤼순 감옥의 간수가 감옥 뒷산에 매장하였다.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투사들의 유골을 찾아 국내로 봉환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 백범은 일본에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삼 의사의 유골을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안장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들었다.

허묘(虛墓)는 바로 안 의사의 시신을 반드시 찾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백범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9년에 흉탄에 스러졌다.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실패했고 현재까지도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 헌병 치바 도시치의 안중근 추모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적지 않은 유묵을 남겼는데 대부분은 사형을 선고받은 1910년 2월 14일 이후에 쓴 작품들이다. 그는 순국 직전에 감옥의 간수로 있던 일본 헌병 치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뜻의 ‘爲國獻身(위국헌신) 軍人本分(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써주었다.

▲ 치바 도시치의 고향인 미야기현 대림사에 세워져 있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 기념비.
▲ 보물 569-2호

안중근과 그가 써준 유묵 한 점은 일본 헌병 치바 도시치(1885~1934)의 삶을 바꾸었다. 그는 처음엔 자기 나라의 위인으로 기려지는 이토를 살해한 안중근을 증오하였으나 동양평화에 대한 그의 일관된 신념과 높은 인품에 감화되었다. 두 사람은 한국 독립투사와 일본군, 사형수와 간수, 가톨릭과 불교라는 몇 장벽에도 불구하고 우정을 나누어갔다.

안중근의 죽음을 배웅한 치바는 전역한 뒤, 고향인 미야기에서 철도원으로 일하면서 49살로 죽을 때까지 안중근의 위패를 모시며 그 명복을 빌었다. 그는 아내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도 안 의사의 유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신과 안 의사의 위패를 함께 모셔 조석으로 공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치바의 유족들은 그의 유언을 지켰고, 1979년 안 의사 탄신 백 주년에 맞춰 그동안 가보로 소중히 보관해온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우리나라에 반환했다. 이 유묵은 현재 다른 유묵 25점과 함께 보물 5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미야기현(宮城県) 쿠리하라시(栗原市)에 있는 사찰 다이린지(大林寺)는 치바 내외가 생전에 다니던 절이다. 다이린지의 묘지에는 치바 내외가 묻혀 있고 치바와 안중근 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또 경내에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 새긴 안중근 의사 유묵비도 세워져 있다.

주지 사이토 타이겐(斉藤泰彦)은 생전에 치바를 통해 ‘안 의사의 인격과 동양평화에 대한 이념’을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매년 9월 첫 번째 일요일에 안 의사 추모 행사를 35년째 열고 있다. 또 해마다 안 의사가 처형당한 3월 26일이면 추모식에 참배하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

그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 효창공원 삼 의사 묘역의 맨 왼쪽에마련해 놓은 안중근 의사의 허묘. 비석이 없었으나 2019년에 비석을 새로 세웠다.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안중근이 처단한 이토 히로부미는 1천 엔(円) 지폐의 도안 인물로 오른, 일본 근대화를 이루어낸 위인으로 기려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1세기가 지나도록 그에 대한 추모는 이처럼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안중근의 고결한 인품과 신념에 대한 공감이 국적을 넘은 결과일 것이다.

안중근은 보물로 지정된 유물 외에도 옥중에서 완성하지 못한 저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남겼다. 그에겐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해방되고도 무려 17년이나 지나서다. 그러나 백범이 봉환하고자 했던 그의 유해는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효창공원 삼 의사 묘역의 가묘는 언제쯤 주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2016. 3. 25. 낮달

 


▲ 안중근 의사 유해가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혔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국 현지 신문 기사(1910.3.30.)

올해(2022)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13돌이다. 국가보훈처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하얼빈산 소나무로 만든 관에 안치돼 뤼순 감옥 공동묘지에 묻혔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국 현지 신문 기사를 발굴하여 공개했다.

 

안 의사 유해와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사회장 거행을 다룬 만주 지역 신문 <성경시보>의 1910년 3월 30일 치 기사는 당시 중국 간행물 분석 과정에서 최근 발굴된 것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안 의사 순국(1910.3.26.) 뒤 안 의사의 둘째 동생인 안정근 지사가 안 의사 유해를 한국으로 옮겨 매장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일본 당국이 거부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일본 당국은 “유해는 다른 사형수와 동일하게 감옥이 관리하는 사형수 공동묘지에 매장될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보훈처는 이 기사가 안 의사의 유해가 당시 뤼순 감옥 내 공동묘지에 매장됐을 것이라는 유력한 가설을 한 번 더 뒷받침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고.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 기사 안중근 의사 유해, 소나무 관 안치뤼순 감옥내 공동묘지 매장 참조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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