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미각과 삶, 혹은 추억

무, 못나도 맛나고 몸에 이롭다!

by 낮달2018 2019. 4. 5.
728x90
SMALL

조선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채소 ‘무’ 이야기

▲ 오늘 시장에서 사 온 제주산 무. 3개에 2천 원을 줬다.

는 다육질(多肉質)의 뿌리를 얻기 위해 기르는 채소다. 김치를 담그는 데 빠지지 않는, 배추와 함께 조선사람’(돌아가실 때까지 내 부모님께서 즐겨 쓰던 말이다.)에게는 가장 가까운 채소라 할 수 있다. 그래선지 고추를 더하여 이 셋을 3대 채소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무, 배추와 함께 조선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채소

 

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설, 중앙아시아·중국설, 인도·서남 아시아설 등이 있으나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이집트 피라미드 비문에 이름이 나오는 거로 보아 재배된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본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400년부터 재배되었다. 한반도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재배하였던 듯하나, 문헌상으로는 고려 시대에 중요 채소로 취급된 기록이 있다고 한다.

 

다른 지방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 어릴 적에는 김장할 때 좀 굵직굵직하게 썬 무를 넣어 담갔다. 한창 김치가 숙성되어 맛이 날 무렵, 이 무를 골라서 밥과 함께 먹는다. 한 손에는 숟가락을 다른 손에는 젓가락을 찔러 끼운 무를 들고 물에 만 밥을 먹는 늦은 밤참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무는 썰어 말려 무말랭이 김치를 담기도 하고 된장이나 고추장 속에 박아 장아찌를 만들기도 한다. 가늘게 채로 썰어서 생나물로 먹을 수도 있고, 콩나물과 함께 익혀서 담백하게 먹기도 한다. 그뿐인가. 깍두기로 담아서 두고두고 먹기도 하니 무는 그 쓰임새가 만만치 않다.

 

우리 집 식구들은 유독 무말랭이 김치를 즐긴다. 지금 사는 고장에서는 이를 ()짠지라고 하는데 우리 집에선 오그락지라고 부른다. 그게 내 고향의 고장 말이기 때문이다. 이 고장에서 철이 들었지만, 아이들은 굳이 아비의 고장 말을 잊지 않고 쓰는 것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이해하는 것 같다.

▲ 밭에서 솟아오른 무. 어릴 때, 모래땅에 쑥 윗몸을 드러낸 무를 아주 쉽게 뽑을 수 있다.

무도 내 고향마을에선 무시라 불렀다. (안동의 고장 말은 무꾸.) 긴 겨울밤, 동무들과 어울려 구들목에 엉덩이를 지지다 출출해지면 우리는 동네를 어슬렁대다가 어느 집 무시구덩이(무 구덩이)’를 노략질하곤 했다. 더러 그 목표가 묻어둔 김장독의 김치로 바뀌기도 했다.

 

무 구덩이 노략질, 강가에서 모래밭에서 뽑아먹던 무

 

땅을 파 만들어 놓은 무 구덩이 속에서 잘 보관되고 있는 싱싱한 무를 노략질해 와 칼로 깎아 먹는데, 고구마만큼의 감칠맛은 없지만, 그 특유의 자극적이면서 담백한 맛이 괜찮았다. 생무를 먹고 나면 이게 소화되면서 자꾸 방귀를 뀌게 되는데 이를 ‘무시 방구’라고 했다. 또 이 무 방귀는 소리 나지 않게 새어 나온다 해서 ‘피새 방구’라고도 했다.

 

내 고향 들판 앞에는 낙동강이 흘렀다. 강가의 모래땅에는 주로 무를 갈았다. 늦여름, 강가 백사장에서 놀다 지쳐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은 모래땅에 쑥 윗몸을 드러낸 무를 아주 쉽게 뽑았다. 그리고 무청은 끊어버리고 이로 썸벙썸벙 껍질을 벗겨서 우적우적 씹어 먹곤 했다. 그때만 해도 분뇨를 거름으로 주던 때였는데도 그런 건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잘 익은 무는 늘씬하다. 무청이 시작되는 윗부분의 연한 연둣빛 아래 미끈하게 빠진 밑동까지 하얀 몸뚱이가 흐벅지다. 그런데 제멋대로 생긴 여인들의 다리를 우리는 무시 다리라고 놀리며 자랐다.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오지 않았다고 붙인 말일 터이다. 얼마 전 어느 여학교 앞을 지나오는데 운전을 하던 아들 녀석이 지나가는 말을 툭 던진다. 여긴 아예 무시밭이네…….

 

어릴 적 할머니께선 참외 많이 먹으면 배앓이를 하지만 무 많이 먹는 아이는 실하다.’면서 무를 깎아 주시곤 하셨다. 무는 당도가 높지 않아 단맛은 적지만 디아스타제라는 소화 효소가 듬뿍 들어 있어 소화에 좋은 채소다. 또 카로틴 함유량은 당근에 버금가며 비타민C는 감귤류를 앞지르거나 같은 수준이다. 또 무에는 생체조절 기능을 가진 비타민E도 대량 함유돼 있다.

 

무즙에 함유된 비타민B는 고혈압과 뇌출혈 예방효과가 있으며 무즙에 꿀을 섞어 마시면 차멀미나 숙취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편 무청(무의 잎과 줄기)은 뿌리보다 영양소가 훨씬 풍부하다. 뿌리보다 더 많은 비타민이 함유된 데다 뿌리에는 없는 비타민A와 칼슘 철분도 듬뿍 들어 있다. 시래기로나 쓰이는 무청의 진가는 아직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셈이다.

▲ 무 느르미. 느끼한 가운데서도 담백한 맛이 특이하다.

 느르미

찌거나 구운 재료에 걸쭉한 즙()을 끼얹은 음식.
<음식 고서적>

가지느르미 음식디미방
개장느르미 음식디미방
게느르미 음식법(飮食法)
낙지느르미 음식법(飮食法)
달걀느르미 음식법(飮食法)
대구느르미 음식디미방
동아느르미 주찬(酒饌)
생선느르미 주찬(酒饌)
생치느르미 음식법(飮食法)
석화인 역주방문(曆酒方文)
우육인 역주방문(曆酒方文)
잡느르미 연세대규곤요람(延世大閨壺要覽)
제육느르미 음식법(飮食法)
황향느르미 주찬(酒饌)
                                                                   <문화원형백과>

 

무말랭이 김치와 무 느르미

 

무말랭이 김치도 김치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무를 얇고 길쭉하게 썰어 밀가루 옷을 입혀 번철에 부친 무 느르미를 무척 좋아했다. 내 고향에서는 무시 니리미라고 했는데, 사전에는 양쪽 다 나오지 않는다. 다만 다음(daum)의 문화원형백과에선 찌거나 구운 재료에 걸쭉한 즙()을 끼얹은 음식이라고 정의한다.

▲ 무말랭이 김치. 우리는 '오그락지'라 부른다.

그리고 음식디미방이나 음식법’, ‘주찬(酒饌)’, ‘역주방문(曆酒方文)’ 같은 음식·조리 서적에 나와 있는 느르미의 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엔 가지느르미, 달걀느르미, 동아느르미 등이 있지만 정작 무 느르미는 보이지 않는다.

 

찌거나 구운것은 맞지만 걸쭉한 즙은 생소하다. 경상도에서 즐겨 먹는 배추전처럼 그냥 무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텐데 굳이 '느르미'라는 이름을 붙인 까닭이 새삼 궁금해진다. 아마 이들은 모두 비슷한 음식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무느르미의 맛은 담백하다. 밀가루 옷이나 기름을 둘러 부쳤으니 느끼할 법도 한데, 한입 베어 물면 무의 서걱하게 씹히는 맛이 느끼함을 중화해 버린다. 무 맛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무어 새삼스러운 맛이 있을 턱이 없다. 그냥 담백하면서도 없는 듯 희미하게 느껴지는 육질의 향이 입안에 감도는 것이다.

 

대체로 부침개가 그렇듯 무느르미는 식은 것을 먹어도 좋다. 기름기가 밀가루에 흠뻑 먹어 금방 모양이 허물어지지만, 속에 든 무의 육질이 주는 신선함은 산뜻하다. 나는 가끔 입맛이 없거나 긴 겨울밤, 입안이 궁금해지면 아내에게 무느르미를 주문하곤 한다.

 

누구나 옛맛을 떠올리며 묵거나 오래된 음식을 주문한다. 그러나 애당초 흐른 세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음식은 없다. 그 음식 맛이야 어디 가겠는가. 흐른 세월만큼 변해버린 사람의 입맛이나 취향은 워낙 예민해 있으니, 솥뚜껑이 아니라 외국산 프라이팬에서 머문 그 온도 차도 간파해 버리는 것이다.

 

식은 무느르미 한 점을 입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으면서 나는 할머니, 어머니, 형수를 거쳐 이제 아내에게 머물고 있는 우리 집 음식의 빛깔과 냄새를 새삼 헤아려본다.

 

 

2009. 1. 7. 낮달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