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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미각과 삶, 혹은 추억

진달래 화전과 평양소주

by 낮달2018 2019.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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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화전을 안주 삼아 평양소주를 마시다

▲ 교외의 선배 교사 댁에 들렀더니 뜰의 진달래를 따서 화전을 부쳐주었다.

봄이 무르익기 전에 개울가에 가서 버들피리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궁싯거리다가 오후에 길을 나섰다. 시 외곽의 시골 쪽으로 나가다 우연히 근처에서 나무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선배 교사들을 만났다. 강권을 뿌리치지 못하여 이분들의 집으로 갔다.

 

한 이태쯤 되었는가,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한 집 세 채가 주변 풍경 속에 무던하게 녹아 있었다. 처마 밑에 키 큰 진달래가 피어 있었는데, 안주인 두 분이 나란히 서서 그 꽃잎을 따기 시작했다. 화전(花煎)을 부치겠다고 한다.

 

“화전이라……, 부쳐보셨던가요?”
“아뇨, 말만 들었지 부쳐보진 못했어요.”

 

그렇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말만 들었지 그걸 직접 먹어 본 기억이 없다. 어릴 적에 어머니와 누님들에게서 화전놀이 이야기를 얼핏 들어는 보았는데, 그게 어떤 모습인지는 가늠할 수조차 없다.

▲진달래 화전과 평양 소주,제대로 된 조합이다.

집에 드니 널따란 거실 한쪽에서 전기 팬에다 화전을 부치기 시작한다. 탁자 위에는 방금 사 온 거라며 ‘의성 마늘닭’ 한 마리가 올랐는데, 이웃집에서 술이 날라져 왔다. 어라, 웬 평양소주. 이웃에 사는 선배는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한 이여서 거기서 사온 것인가 했더니 웬걸, 정식 수입 딱지가 붙어 있다.

 

인터넷에서 한 상자(24병)를 주문해서 택배로 받았다고 한다. 동네 가게도 아니니 한두 병이야 주문할 수 없지만, 상자 단위로는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병당 3천 원에 못 미친다고 한다. 알코올 함유량은 23%. 현지의 평양소주는 25도지만 남쪽의 입맛을 고려한 결과다.

 

차이는 남쪽의 소주가 희석식 화학주인 데 반해 이 녀석은 증류주다. 쌀과 강냉이, 효모로 발효시켜 증류시킨 술이다. 한 잔을 들이켰는데, 첫 느낌이 안동 명주(名酒) ‘안동소주’ 맛이다. 역시 인공첨가물이 들어 있지 않은 곡주 맛이다.

 

한 병에 3천 원쯤이라면 시중에서 술집에서 마시는 소줏값과 같다. 가게에서 사는 것에 비기면 훨씬 비싸고, 안동소주보다 훨씬 싸다. 우리네 소주보다 도수는 높지만, 증류주여서 뒤끝은 없는 편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1상자를 사서 먹는 건 쉽지 않은 모양이라고 한다.

 

곧 화전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예상한 대로 찹쌀 반죽에 진달래꽃잎을 붙여서 납작하게 지졌다. 입에 들어가니 찹쌀 특유의 풍미가 있다. 강하고 자극적인 소주 맛 탓인지 정작 꽃잎의 향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평양소주와 진달래 화전, 괜찮은 조합이다. 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배경(영변 약산)은 평안북도 영변군에 이니 평양과 그리 먼 곳이 아니니 말이다.

▲ 평양소주는 정식으로 수입한 것을 구매한 것이다.

화전은 꽃부꾸미, 꽃지지미, 꽃달임 등으로도 불리는데 ‘화전놀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 화전놀이는 고려 시대부터 행해졌다고 한다.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는 봄이면 부녀자들이 개울가에 번철(燔鐵, 프라이팬의 우리 이름이다!)과 찹쌀가루 등을 들고 나가서, 꽃을 따서 그 자리에서 화전을 만들어 먹었다.

 

세종 때 학자인 강희안은 그의 책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사람에 인품이 있듯이 꽃에는 화품(花品)이 있다.”며 1품에서 9품까지 품계를 매겼는데 흰 진달래는 5품에, 붉은 진달래는 한 품 낮은 6품으로 정했다고 한다. 진달래 화전이 선인들의 음력 3월 시식(時食)이 된 내력이 따로 있는 것이다.

 

특히 3월 삼짇날(음력 3월 3일)에는 ‘화전놀이’를 즐겼는데, 꿀물이나 오미자즙에 진달래를 띄운 진달래 화채 등과 함께 먹었다. 진달래 화전은 ‘두견화전’(杜鵑花煎)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을이 되면 9월 9일 중양절 등에 국화꽃과 잎으로 만든 국화전을 부치며 하루를 즐겼다 한다.

 

이 21세기야 집안에 들어앉아 화전을 부치면서 흉내만 내고 말지만, 화전놀이는 유래는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기록이 보이니 그 역사와 전통이 유구(悠久)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화전놀이는 요샛말로 하면 일종의 야유회다.

 

부녀자들의 바깥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유교적 금제(禁制)가 심해진 조선시대에 들면서 화전놀이는 여성들에게 연중 몇 차례에 그치는, 공식적으로 허용된 나들이로 인정받으면서 여성들의 놀이로서 크게 부각하였다.

 

이 화전놀이의 과정을 다루며, 여인들의 풍류를 노래한 것이 ‘화전가(花煎歌)’다. 대개 화전놀이를 마치고 돌아와 그날의 감흥을 오래도록 남겨두기 위해서 짓는다. 화전가에서 다루는 내용은 경승지의 풍물과 여성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탄식 등이다.

 

아래는 인근 순흥지역을 배경으로 창작된 20세기 초엽의 가사 작품, 흔히 <덴동어미 화전가‘로 불리는 노래 일부다.

 

가세 가세 화전을 가세 꽃 지기 전에 화전 가세
이때가 어느 땐가 때마침 삼월이라
동군(東君)이 포덕택(布德澤)하니 춘화일난(春和日暖) 때가 맞고
화신풍(花信風)이 화공(畵工)되어 만화방창(萬化方暢) 단청(丹靑) 되네
이런 때를 잃지 말고 화전 놀음 하여 보세
[…중략…]

상단이는 꽃 데치고 삼월이는 가로짐 풀고
취단이는 불을 넣어라 향단이가 떡 굽는다
청계(淸溪) 반석(盤石) 너른 곳에 노소를 갈라 좌 차리고
꽃떡을 일변 드리나마 노인부터 먼저 드리어라
엿과 떡을 함께 먹으니 향기의 감미가 더욱 좋다
함포고복(含哺鼓腹) 실컷 먹고 서로 보고 하는 말이
일년 일차 화전 놀음 여자놀음 제일일세
   - <덴동어미 화전가> 중에서

 

부녀자들이 춘삼월에 풍물을 감상하며 쌓인 회포를 푼 화전놀이가 굳이 필요치 않은 시대다. 그러나 여전히 여자들은 한쪽에서 화전을 부치고 남정네들은 이편에서 술을 마시며 수작을 나눈다. 세월이 흘러도 쉬 변하지 않는 풍경이다.

 

50대 중후반의 노장들이라 나누는 얘기도 거기서 거기다. 이제 제대로 뭔가를 알았다 싶은데, 별로 그걸 써먹을 시간이 없다는 것에서부터 아이들과 옛 동료들 얘기를 나누다 돌아섰다. 오다가 봐 둔 개울가에서 갯버들을 꺾어 버들피리를 만들어 볼 작정이었다.

 

몇 가지를 꺾었으나 촘촘히 눈이 달린 놈인 데다 아직도 물이 덜 올랐는가, 비트는 손목에 힘만 갈 뿐이다. 날은 어둑해지고, 오늘은 연이 닿지 않는가 보다, 서둘러 귀로에 오르고 말았다.

 

 

2009. 4. 12. 낮달

 


내가 공식 수입업체를 통해서 평양소주 1상자를 사서 이웃과 나눈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아무리 찾아봐도 당시 그 경위를 밝힌 글을 쓴 듯한데,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며 이런저런 창구가 다 닫힌 것 그 이후다.
  
문재인 정부 들면서 남북 간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우선 든 생각이, 조만간 막힌 데가 트이면 평양소주부터 사야겠다는 거였다. 금강산이나 백두산 구경도 갈 수 있겠다는 희망의 불씨도 되살렸다. 남북의 화해가 이를 목표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겠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현실적인 까닭이다. 
  
잘 나가던 남북·북미 관계가 소강상태에 들면서 평양소주나 금강산 관광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한다. 그러나 그런 비정치적인 부분부터 열리는 게 이후 한반도 평화로 나아가는 첫 단추가 아닌가. 평양소주를 마시면서 겨레의 동질성을 확인하면서 남북 간 거리도 줄여질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2019.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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