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덕유산 향적봉의 눈꽃 행렬, ‘설경의 갈증’ 풀었다

by 낮달2018 2023. 12. 25.
728x90

덕유산국립공원 향적봉 설경 나들이(2023. 12. 21.)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하산해 오후에 찍은 덕유산 줄기.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숲의 빛깔이 오묘했다.

‘눈’이라고 하면, 우리 영남 사람들은 할 말이 별로 없다. 겨울이라고 해 봤자 싸락눈이 잠깐 흩날리다가 마는 게 고작인 지방에 사는 까닭이다. 그나마 경북은 형편이 낫지만, 경남이나 부산 같은 지역에선 아이들이 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라기 쉽다고 한다.
 
영남 사람에게는 ‘눈의 갈증’이 있다
 
이는 엔간히 눈이 와도 교통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강원도 지방과 달리 영남, 특히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 눈이 조금만 쌓여도 이른바 ‘교통대란’이 벌어지는 이유다. 워낙 드문 일이니, 지자체가 따로 예산을 들여 제설 장비 등의 체제를 넉넉하게 꾸려 놓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다.
 
경북도 강원도와 붙은 북부 지방은 더러 폭설이 내리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대구 주변의 경북 남부지방은 부산이나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요즘보다는 나았지만, 쌓일 만큼 눈이 내린 적이 별로 없었으므로 어릴 적 눈에 관한 기억도 남은 게 별로 없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나이 들어도 눈 한 번 내리지 않는 겨울을 타박하곤 하는, ‘눈에 관한 갈증’이 있다.
 
군 복무를 한 인천 부평에서 보낸 세 번의 겨울에 나는 짬짬이 눈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밤새 막사 지붕의 눈을 치워야 했다는 전방 근무 병사들이 말하는 눈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설이라고 이름할 만한 눈은 두어 차례쯤 만났을 듯싶지만, 나머지는 쌓였다가 이삼일이면 녹아버리는 눈이 다였으니 당연히 제설로 고생한 적도 없다. 

▲ 무주덕유산리조트의 매표소와 부대 시설. 평일인데도 스키어들과 곤돌라로 산을 오르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 곤돌로라 20여 분만에 닿은 설천봉. 오른쪽은 레스토랑. 뒤편의 팔각정이 상제루다.
▲ 설천봉 (1,520m) 상제루 주변. 눈꽃을 피운 나무들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 향적봉으로 오르는 덱 계단길 쪽으로 이어진 울타리의 나무도 눈을 맞은 채 얼어붙었다.

군대 생활에서 강설은 낭만이 아니다. 그건 제설 작업의 부담으로 이어질 뿐, 비올 때와 달리 교육 훈련은 취소되지 않고 시행되기 때문이다. 눈이 펄펄 날리는데도 훈련을 계속하다 보면, 느긋하게 눈 구경을 하거나 벗들과 만나러 나들이를 나가는 민간인 시절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눈은 ‘설렘’의 대상이기보단 가외의 ‘일거리’를 안겨주는 불청객이기 쉽다. [관련 글 : , ‘설렘과 축복에서 불편불결]
 
눈에 관한 기억, 남은 게 별로 없다
 
사회에 나와서 경주 등 경북 남부 쪽에 근무하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예천, 안동 등 북부 지방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거기서도 기억에 남는 눈은 2003년 주변 지인들과 함께 오른 태백산과 2004년 3월 말, 임시 휴교를 하게 할 만큼의 폭설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땐 디카를 장만하기 전인지라, 사진 한장 남은 게 없다. 
 
구미로 옮겨온 2012년  3월 말쯤에 안동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많은 눈이 내리긴 했었지만, 아파트 주변을 찍은 사진 몇 장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듬해 1월, 아내와 함께 수안보를 거쳐 충주로 이어지는 겨울 여행에서 만난 눈은 꽤 기억에 남는 눈이었다. 길은 말끔히 녹았지만, 주변 가로수는 하얗게 눈꽃을 매달고 서 있어 내가 ‘눈꽃 전차’라 이름 붙인 풍경이었다. [관련 글 : 겨울 여행, ‘눈꽃 전차를 만나다
 
그리고 10년이 훌쩍 흘렀지만, 여기서도 눈 같은 눈은 구경도 못 했다. 우연히 덕유산의 눈을 화제 삼은 것은 어느 산행 유튜버의 영상을 보다가 곤돌라로 올라 15분만 걸으면 닿을 수 있다는 향적봉을 알게 되면서였다. 그간 수년간 열심히 산행을 이어오고 있는 황 선생과 술을 마시다가 꺼낸 이야긴데, 단박에 그의 제안으로 사흘 뒤인 21일로 날을 받았다.
 
20년도 전에 쓰던 아이젠을 꺼내보니 쓸 수 없을 듯했고, 묵은 등산화는 삭아서 버린 지 오래라고 했더니 황은 여벌을 갖고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틀 뒤부터 올 최고의 한파 예보가 있었다. 영하 20도에, 폭설 주의보까지 뜬지라, 잔뜩 졸아서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했더니 걱정할 거 없는데, 정 그러시면, 하고 받아주었다.
 
계획을 취소했는데, 뭔가 찜찜하여 덕유산국립공원 누리집을 들락거렸다. 당일 아침에 공지 사항에서 기상특보 해제와 폐쇄했던 등산로를 모두 개방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황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9시 반에 출발하기로 했다. 이미 여러 차례 다녔던 길이라 황은 익숙하게 차를 몰았다.

▲ 설천봉에서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으로 오르는 덱 계단길을 오르는 사람들. 보이는 건 모두가 눈이다.

도 경계를 넘어 무주군으로 들어설 무렵부터 주변 산줄기에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길은 잔설도 보이지 않고, 염화칼슘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황 선생은 전국 유수의 관광지라, 무주군에서 겨울이면 관리에 엄청 신경을 쓰는 거라고 말했다.
 
동계올림픽 겨냥해 개발한 무주덕유산리조트, 휴양지가 되다

▲ 덕유산은 백두대간의 중심부라고 한다. ⓒ 중앙일보 이미지

하긴 한 철 벌어서 한 해를 사는 곳이니, 그럴 만도 했다. 스키장과 곤돌라를 운영하며 전국의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겨울 휴양지는 무주리조트를 빼놓을 수 없다. 덕유산에 스키장이 개발된 것은 1986년, 당시 대통령 전두환이 지방 시찰 중 전북에 동계올림픽을 위한 스키장 개발을 검토하라고 지시하면서다.
 
그리하여 1987년, 쌍방울그룹에서 공사에 착수하여 1990년 무주리조트가 완공되었고 1997년 동계유니버시아드 경기를 치렀다. 무주는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자 한 한국이 미리 점 찍어놓은 두 곳 중 하나였는데, 정작 2018년 동계올림픽은 나머지 장소인 평창에서 열렸다.
 
무주리조트는 쌍방울의 부도로 한미 두 나라 기업의 컨소시엄을 거쳐 2011년 부영그룹이 사들여 현재 무주덕유산리조트로 운영되고 있다. 무주의 스키 리조트는 국내 최대였으나 2019년 기준 23개 슬로프를 보유하여 국내에서 세 번째 규모로 떨어졌고 평창에서 올림픽이 열리면서 덕유산은 휴양지로 남게 된 것이다.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있는 덕유산(德裕山)은 1975년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 경남 거창군과 함양군 등 영호남을 아우르는 4개 군에 걸쳐 있으며, 총 229.43㎢의 면적이 공원구역으로 지정되었다.

▲ 향적봉에 도착하기 직전. 사람들의 행렬은 이어지고, 어디가 하늘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 향적봉을 눈앞에 둔 덱 계단길. 바람 때문에 울타리에 쌓인 눈이 날려가 나무 몸통을 드러내고 있다.
▲ 덕유산 최고봉 향적봉(1,614m). 남한에서 네 번째 높은 봉우리다. 줄을 선 사람들은 표지석 앞에서 사진 촬영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 향적봉 정상 부근. 울타리 따라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 향적봉에서 내려다본 향적봉 대피소(왼쪽 건물). 화장실 등 부대 시설들이 있다.
▲ 정상 부근의 울타리 너머 눈속에 파묻힌 조릿대. 푸른 잎이 눈밭에서 새롭다.

덕유산은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향적봉 1,614m)으로 아고산대 생태계로서 보전 가치가 높으며, 북쪽으로 흘러가는 금강과 동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수원지이기도 하다. 그런 덕유산국립공원을 코앞에 두다 보니 환경 파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곤돌라로 20여 분 만에 설천봉에 닿고 거기서 다시 20분, 향적봉에 오르다
 
무주덕유산리조트에 닿았을 때는 11시를 막 넘고 있었다. 이미 스키장 매표소 부근의 주차장은 꽉 차서 우리는 외곽의 주차장에 차를 댔다. 학생을 인솔해 강원도 정선의 하이원 리조트에 다녀왔으니 스키 리조트로는 두 번짼데, 스키를 한 번도 타 보지 않은 내게 여전히 스키 리조트는 낯설었다.
 
기온은 영하 14도. 칼바람 속에 귀마개를 꺼내 쓰고, 재킷에 달린 모자를 여며 쓰고, 곤돌라 오른 지 20여 분 만에 설천봉(1,520m)에 닿았다. 널찍한 평지에 쉼터와 저만치 하얗게 눈을 맞은 팔각정 상제루(上帝樓가 언 채로 서 있었다. 주변은 눈 천지다. 땅은 물론, 나무와 가지, 울타리와 눈이 쌓일 수 있는 면마다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 군락이 아름다운 곳이라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라 상고대 대신 눈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설경이 마치 정물화처럼 펼쳐졌다. 설천봉에서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1,614m)까지는 600여m, 경사가 완만하여 남녀노소 대부분 걸어서 갈 수 있다고 했다.
 
쇠와 합성목재로 만든 덱(deck) 계단 길로 들어섰다. 길 좌우에 눈꽃을 피운 나뭇가지와 두껍게 눈옷을 입은 나무줄기 사이로 펼쳐지는 풍경은 하나같이 비슷했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셔터를 눌러댔다. 좁은 길을 오르내리는 인파들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가끔 막히곤 하니 이것저것 살피다가는 촬영은 쉽지 않을 듯해서다.
 
눈만 내놓고 마스크와 귀마개, 그리고 재킷에 달린 모자로 여며 썼는데도 한기가 뼛속 깊이 느껴졌다. 가죽장갑을 낀 손도, 두꺼운 등산 양말을 신고 아이젠을 착용한 발도 시려오기 시작했다. 그나마 계단을 오를 때는 나았지만, 향적봉 주변에 닿자, 봉우리 주변의 평지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서웠다.

▲ 향적봉 대피소 아래 탁자에서 사람들이 식사를하고 있다. 우리도 맨 앞의 탁자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 대피소에서 다시 향적봉으로 가는 길 중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은 구천동 가는 길.
▲ 향적봉에서 내려와 설천봉 근처에서 찍은 덱 울타리가 눈속에 꽁꽁 얼어 있다.

100m 아래에 있는 향적봉 대피소로 내려가, 황은 나무 탁자 위에 버너를 꺼내 코펠을 올렸다. 알프스 가스에 연결하여 불을 붙였으나 화력이 영 시원찮아서 살펴보니 가스가 조금 언 듯했다. 대피소에 가서 사 온 새 가스로 끓여서 내가 사 간 김밥과 함께 대충 점심을 때웠다.
 
주변에도 컵라면 등으로 점심을 먹는 이들이 많았다. 바람에 눈가루가 날리었고, 버린 라면 국물로 불그스레 물든 눈밭에 더러 눈에 띄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쓰레기를 배낭 속에 다시 집어넣고 대피소를 떠났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내려온 길 대신 구천동으로 내려가는 길로 돌아서 다시 향적봉에 올랐다.
 
사람들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호젓하긴 했는데, 계단이 눈에 파묻혀 계단의 발판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꽤 가파른 오르막 계단을 올라 다시 향적봉으로 와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왜인지 카메라 액정에 초점 모드가 계속 MF(수동)로 뜨면서 자동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거기서 곤돌라까지 내려오는 동안 원인을 찾지 못해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아마 카메라를 쥐고 걷는 과정에서 어떤 스위치를 건드린 듯했다. 찾다가 결국 포기하고 곤돌라를 타기 전에 간신히 원인을 찾았다. 카메라에 장착한 24~70mm 렌즈 외부에 있는 ‘AF/MF 전환 스위치’가 저절로 MF로 돌려져 있었다. 여러 해 몸에 지닌 카메란데, 그 생각을 왜 못 하였을까. 그러나 이미 하산해 버린 것, 나는 미련을 버렸다.
 
돌아와서 여러 차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혼잣말로 중얼대곤 했다. 눈구경은 말 그대로 실컷 먹거나 가지거나 누리어서 물리게 되다”라는 뜻의 ‘퇴(退)냈다’. 그러나 300여 장을 찍은 사진가운데 썩 눈에 들어와 마음에 차는 사진은 없다. 좀 덜 추웠다면, 조금 덜 붐볐다면 좀 다르게  찍을 수 있었을 텐데 싶지만,  아쉬운 대로 만족하기로 했다. 
 
일제 강점기에 만든  ‘나제통문(羅濟通門)’
 
곤돌라로 지상으로 내려와 서둘러 귀로에 올랐는데, 오후 3시 30분이었다. 한결 날이 풀린 느낌이 뚜렷했는데, 멀리 눈 녹은 산이 새로웠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미어진다고 했더니, 황은 무주는 지자체가 왜 관광지 개발에 열을 올리는지를 잘 보여주는 동네고, 반대로 그 폐해가 무엇인지도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곳이라고 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삼국 시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으로 '나제통문'이라 불리는, 일제 강점기 때 뚫은 석굴 문. 무주 설천교 쪽에서 찍었다.
▲ 무주 지역에서 김천과 거창 지역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내면서 우마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뚫은 굴이다. 반대쪽에서 찍었다.

오는 길에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에 잠깐 들러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삼국 시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으로 ‘나제통문’이라 이름한 석굴 문이다. 삼국 시대의 유적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무주 지역에서 김천과 거창 지역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내면서 우마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뚫은 굴이라고 한다.

귀가하니 오후 6시가 채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황 선생 덕분에 짧은 시간에 덕유산 향적봉에 올랐고, 거기 설경을 원 없이 즐길 수 있었다. 나이 들면서 길을 나서는 게 쉽지 않은데, 이런 방식의 나들이는 유익하고 효율적이다. 찍어온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문득 지난 한 해를 아득하게 뒤돌아본다.
 
 

2023. 12. 24.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