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에서 ‘불편’으로 바뀐 눈, 혹은 세월
올 연말은 ‘눈’이 풍성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다. 그러나 성탄절 이후에도 드문드문 눈이 내렸다. 이번 주만 하더라도 화요일에 이어 오늘 또 적지 않은 눈이 내렸다. 나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눈길을 걸어서 출근했다.
뉴스 화면을 장식할 만큼의 폭설도 아니었고, 출근길의 교통 마비도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차를 버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걸어서 출근길로 나섰던 것 같다. 남부라곤 하지만 경북 북부여서 중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지역인데도 겨울에 눈이 내리는 날은 매우 드물다. 기껏해야 싸락눈이 날리거나 함박눈이 내린다 해도 쌓일 겨를도 없이 녹아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눈, 한겨울의 ‘설렘’과 ‘축복’
눈 소식에 아이들은 반색한다. 어른들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눈 오는 날’은 무심하고 지겨운 일상에 내리는 하늘의 축복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비 오는 날’의 우울과는 다른 어떤 설렘, 어떤 파문 같은 것. 사람들은 즐겨 그것에 포획되고 거기 온전히 몸을 맡긴다.
눈 오는 날, 사람들은 애인과 친구와 약속하고 눈 내리는 거리를 함께 걷거나 술을 마시고 거리의 담벼락에 오물을 토해놓고 건주정을 하기도 한다. 거기 무슨 까닭이 필요한가. 단지 그날이 무엇인가 다른 날이기 때문인 것을.
‘눈 내리는 날’은 그래서 모든 게 용서되는 날이었다. ‘삶은 언제나 /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 사랑도 매양 /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이라고 노래하는 김남조의 시 ‘설일(雪日)’ 의 도저한 감상도 용서할 수 있는 건 그게 눈 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업을 하다가 아이들에게 ‘잠시 교과서를 덮어라’로 시작하는 정일근 시인의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첫눈’ 편을 읽어주었던 것도 창밖에 희끗희끗 눈이 날리기 때문이었다. 눈이 환기해 주는 ‘넉넉한 평등의 나라’를, ‘백색의 화해와 평등’을, ‘죽은 모국어’를 이야기하던 시절의 나는 또 얼마나 치기 만만했던가.
김진섭의 눈 예찬, “백설부(白雪賦)”
눈이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축복과 기쁨을 자장 잘 드러내고 있는 글로 김진섭의 수필 “백설부(白雪賦)”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려 70년도 전에 발표된 글이어서 오늘날의 문체와는 사뭇 다른 글이긴 하다. 그러나 거기 담긴 도저한 낭만과 과장된 찬사는 ‘눈’이 선사하는 무형의 설렘과 기쁨을 고스란히 드러내 주는 것이다.
“……설사 우리는 어젯밤에 잘 적엔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서 최후의 단안(斷案)을 내린 바 있었다 하더라도 적설(積雪)을 조망(眺望)하는 이 순간에만은 생(生)의 고요한 유열(愉悅)과 가슴의 가벼운 경악을 아울러 맛볼지니……”
그에 따르면 ‘눈’은 인생의 ‘무의미’를 ‘삶의 유열과 경악’으로 뒤바꾸는 힘을 지녔다. 그는 ‘백설’을 ‘천국의 아들’, ‘경쾌한 족속’, ‘바람의 희생자’, ‘무정부주의’로 묘사하면서 ‘백설’의 은총이 모든 것이 ‘문득 빛나고 번쩍이고 약동하고 웃음치기를 시작’한다고 말한다. 백설은 모든 것을 ‘성화’시키며, ‘영원의 해조(諧調, 잘 조화됨)’에 대해 말한다고 노래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성화(聖化)되어 새롭고 정결하고 젊고 정숙한 가운데 소생되는데, 그 질서, 그 정밀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며, 영원의 해조(諧調)에 대하여 말한다. 이때 우리의 회의는 사라지고, 우리의 두 눈은 빛나며, 우리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면서 위에서 온 축복을 향해서 오직 감사와 찬탄을 노래할 뿐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의 글이 고양된 낭만으로 가파르게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저도 몰래 그의 감정에 쉽사리 편승하게 된다. 그것은 적어도 우리가 이 ‘백설’ 앞에서 아주 편안하게 무장해제 되기를 망설이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나 “백설부”는 마지막 단락에서 아주 냉정하게 우리 자신을 건조한 일상 속으로 되돌려준다.
“그러나 불행히 우리의 눈에 대한 체험은 그저 단순히 눈 오는 밤에 서울 거리를 술집이나 몇 집 들어가며 배회(徘徊)하는 정도에 국한되는 것이지, 생각하면 사실 나의 백설부(白雪賦)란 것도 근거 없고, 싱겁기가 짝이 없다 할 밖에 없다.”
‘눈’이 일상의 축복과 기쁨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은 병영에서다. 군대란 특수 조직에서 ‘백설’이란 이상 기후, 객관적 장애 환경의 일부일 뿐이다. 특히 졸병 시절에 맞이하는 눈이란 다소 끔찍한 ‘재앙’이 아닌가.
‘설렘’에서 ‘불편’으로 급전직하, 그 세월…
비가 내리면 교육훈련이라도 중지하지만, 눈은 그런 가외의 행운도 주지 않는다. 교육훈련은 그것대로 실시되고, 눈이 그치면 눈을 치워야 하는 노역이 기다릴 뿐이다. 막사 지붕에 쌓이는 눈을 치우느라 밤잠을 설쳐야 하는 최전방 부대 근무 병사들의 고충도 그 ‘재앙’의 일부다.
눈밭에서 피티(PT) 체조를 하거나 포복을 한 경험도 아련하다. 워낙 어이없는 훈련도 단지 ‘군인’이어서 용인되는 공간이 병영이 아니던가. 한겨울, 연못의 살얼음을 깨고 전투복을 입은 채 잠수해야 했던 기억도 군이기 때문에 웃어넘긴 ‘유쾌하지 않은 추억’이다.
눈이 더 이상 설렘이나 축복으로 다가오지 않은 지는 꽤 되었다. 요즘 나는 잦은 눈이 영 마뜩하지 않다. 눈이 비치면 우선 출퇴근길이 불편해진다. 우선 차를 끌고 나가기도 걸어가기도 마땅하지 않고, 차를 끌고 나가도 우발적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눈길에 미끄러져 본 경험은 눈을 바라보는 운전자를 위축시킨다. 아차 하는 순간에 신체 안전의 위협과 경제적 손실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저께는 우산을 받고 눈을 맞으며 걸었는데 오늘 아침은 눈 그친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차량의 통행도 인적도 뜸한 길을 걷는데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빙판길에 미끄러져 몸을 상한 사람들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세 차례나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는데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럴수록 긴장하여 몸을 낮추게 된다.
눈은 순백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주지만, 한편으로 그 뒤끝은 화려했던 꽃의 종말과도 비슷하다.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지저분한 도시는 온통 얼다 만 눈과 녹아내린 눈으로 흥건해지는 것이다. 그 누추한 풍경은 눈이 내릴 때의 흥분과 설렘을 상쇄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올해는 왜 이렇게 눈이 잦지? 불편해서 못 쓰겠어.”
“눈이 와서 기분 좋은 건 잠깐이고, 불편하고 불결한 것은 오래거든…….”
아이들에게는 여전히 눈은 ‘설렘’의 일부다. 얼어붙은 길을 걷는 것도, 거기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것도 눈을 뭉쳐서 동무들에게 던지거나 눈사람을 만든다고 부산을 떠는 것도 그들이 누리는 ‘눈의 축복’의 일부인 것이다.
눈을 ‘외출의 발끝에 내리는 겨울 흰빛 휴지부(休止符)’라고 노래한 이는 오탁번이다. 스무 살 어름에 어디선가 내가 읽었던 그의 시 “강설(降雪)”의 한 구절이다. 눈은 회색 겨울의 ‘쉼표’다. 맞다. 노래 ‘바다가 보이는 교실’을 들으면서 이 겨울, 눈을 더 이상 축복이나 설렘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 쓸쓸한 나이를 생각한다.
백설부(白雪賦)
김진섭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雪]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눈을 즐겨하는 것은 비단 개와 어린이들뿐만이 아니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환호성을 소리 높이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눈 오는 날에 나는 일찍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하였으니,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지를 때, 우리는 어찌 된 연유(緣由)인지 부지중(不知中) 온화하게 된 마음과 인간다운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太古)의 음향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敍情詩)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 가면 최초의 강설(强雪)에 의해서 멀고 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舊殼)을 탈(脫)하고 현란한 백의(白衣)를 갈아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도회는 문득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마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이때 집이란 집은 모두가 먼 꿈속에 포근히 안기고 사람들 역시 희귀한 자연의 아들이 되어 모든 것은 일시에 원시 시대의 풍속을 탈환한 상태를 정(呈)한다.
온 천하가 얼어붙어서 찬 돌과 같이도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오는 것인지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서 눈으로 화(化)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만일에 이 삭연(索然)한 삼동(三冬)이 불행히도 백설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의 적은 위안은 더욱이나 그 양을 줄이고야 말 것이니, 가령 우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추위를 참고, 열고 싶지 않은 창을 가만히 밀고 밖을 한 번 내다보면, 이것이 무어랴! 백설애애(白雪皚皚)한 세계가 눈앞에 전개되어 있을 때, 그때 우리가 마음에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말할 수 없는 환희 속에 우리가 느끼는 감상은 물론, 우리가 간밤에 고운 눈이 이같이 내려서 쌓이는 것도 모르고, 이 아름다운 밤을 헛되이 자버렸다는 것에 대한 후회의 정이요, 그래서 설사 우리는 어젯밤에 잘 적엔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서 최후의 단안(斷案)을 내린 바 있었다 하더라도 적설(積雪)을 조망(眺望)하는 이 순간에만은 생(生)의 고요한 유열(愉悅)과 가슴의 가벼운 경악을 아울러 맛볼지니, 소리 없이 온 눈이 소리 없이 곧 가 버리지 않고, 마치 그것은 하늘이 내리어 주신 선물인거나 같이 순결하고 반가운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또 순화시켜 주기 위해서 아직도 얼마 사이까지는 남아 있어 준다는 것은, 흡사 우리의 애인이 우리를 가만히 몰래 습격함으로 의해서 우리의 경탄과 우리의 열락(悅樂)을 더 한층 고조하려는 그것과도 같다고나 할는지!
우리의 온 밤을 행복스럽게 만들어 주기는 하나,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감미한 꿈과 같이 그렇게 민속(敏速)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한 번 내린 눈은, 그러나 그다지 오랫동안은 남아 있어 주지는 않는다. 이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픈 일이나, 얼마나 단명(短命)하며, 또 얼마나 없어지기 쉬운가! 그것은 말하자면 기적같이 와서는 행복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편연(便娟) 백설이 경쾌한 윤무(輪舞)를 가지고 공중에서 편편히 지상에 내려올 때, 이 순치(馴致)할 수 없는 고공(高空) 무용이 원거리(遠距離)에 뻗친 과감한 분란(紛亂)은,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처연(凄然)한 심사를 가지게까지 하는데, 대체 이들 흰 생명들은 이렇게 수많이 모여선 어디로 가려는 것인고?
이는 자유의 도취 속에 부유(浮游)함을 말함인가, 혹은 그는 우리의 참여하기 어려운 열락에 탐닉하고 있음을 말함인가? 백설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그리고 또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요,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희의 무정부주의를 통제할 수 있으랴! 너희들은 우리들 사람까지를 너희의 혼란 속에 휩쓸어 넣을 작정일 줄은 알 수 없으되, 그리고 또 사실상 그 속에 혹은 기뻐이, 혹은 할 수 없이 휩쓸려 들어가는 자도 많이 있으리라마는, 그러나 사람이 과연 그런 혼탁한 과중(過中)에서 능히 견딜 수 있으리라고 너희는 생각하느냐?
백설의 이 같은 난무(亂舞)는 물론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일단 강설(降雪)의 상태가 정지되면, 눈은 지상에 쌓여 실로 놀랄 만한 통일체를 현출(現出)시키는 것이니, 이와 같은 완전한 질서, 이와 같은 화려한 장식을 우리는 백설이 아니면 어디서 또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주위에는 또한 하나의 신성한 정밀(靜謐)이 진좌(鎭座)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을 엿듣도록 명령하는 것이니, 이때 모든 사람은 긴장한 마음을 가지고 백설의 계시(啓示)에 깊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보라! 우리가 절망 속에서 기다리고 동경하던 계시는 참으로 여기 우리 앞에 와서 있지는 않는가?
어제까지도 침울한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이 이제는 백설의 은총에 의하여 문득 빛나고 번쩍이고 약동하고 웃음치기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붙은 풀포기, 앙상한 나뭇가지들조차 풍만한 백화(白花)를 달고 있음은 물론이요 꾀 벗은 전야(田野)는 성자(聖者)의 영지(領地)가 되고 공허한 정원은 아름다운 선물로 가득하다.
모든 것은 성화(聖化)되어 새롭고 정결하고 젊고 정숙한 가운데 소생되는데, 그 질서, 그 정밀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며, 영원의 해조(諧調)에 대하여 말한다. 이때 우리의 회의는 사라지고, 우리의 두 눈은 빛나며, 우리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느끼면서 위에서 온 축복을 향해서 오직 감사와 찬탄을 노래할 뿐이다.
눈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덮어 줌으로 의해서, 하나같이 희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지만, 특히 그중에도 눈에 높이 덮인 공원, 눈에 안긴 성사(城舍), 눈 밑에 누운 무너진 고적(古蹟), 눈 속에 높이 선 동상 등을 봄은 일단으로 더 흥취의 깊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모두가 우울한 옛 시(詩)를 읽는 것과도 같이, 그 배후(背後)에는 알 수 없는 신비(神秘)가 숨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눈이 내리는 공원에는 아마도 늙을 줄을 모르는 흰 사슴들이 떼를 지어 뛰어다닐지도 모르는 것이고, 저 성사(城舍) 안 심원(深園)에는 이상한 향기를 가진 앨러배스터의 꽃이 한 송이 눈 속에 외로이 피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것이며, 저 동상은 아마도 이 모든 비밀을 저 혼자 알게 되는 것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참된 눈은 도회에 속할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산중(山中) 깊이 천인 만장(千仞萬丈)의 계곡에서 맹수를 잡은 자의 체험할 물건이 아니면 아니 된다. 생각하여 보라! 이 세상에 있는 눈으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니, 가령 열대의 뜨거운 태양에 쪼임을 받는 저 킬리만자로의 눈, 멀고 먼 옛날부터 아직껏 녹지 않고 안타르크티스(Antarktis, 남극)에 잔존(殘存)해 있다는 눈, 우랄과 알래스카의 고원(高原)에 보이는 적설(積雪), 또는 오자마자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다는 상부 이태리(上部伊太利)의 눈 등 ―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눈을 보지 않고는 도저히 눈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 우리의 눈에 대한 체험은 그저 단순히 눈 오는 밤에 서울 거리를 술집이나 몇 집 들어가며 배회(徘徊)하는 정도에 국한되는 것이지, 생각하면 사실 나의 백설부(白雪賦)란 것도 근거 없고, 싱겁기가 짝이 없다 할 밖에 없다.
<조광>(1939)
* 원문을 읽기 쉽게 임의로 문단을 나누었음.
2010. 12.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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