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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간월재 억새’ 대신 제천 ‘배론성지의 단풍’

by 낮달2018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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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여행] ① 조선 후기의 천주교 성지, ‘경건’ 속에 만나는 눈부신 단풍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배론성지 입구로 들어서면 직선 도로 왼쪽에 검소한 벽돌 건물로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 학교가 세워져 있었다.
▲ 마음을 비우는 연못 위 진복문 앞의 빨간 단풍과 노란 느티나무 단풍이 현란하다.
▲ 마음을 비우는 연못 풍경. 성지 안 제일 유명한 포토 존인 듯 사진 찍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이어졌다.

애당초 우리는 영남 알프스의 간월(看月)재로 억새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간월재는 2013년 늦가을, 아내와 딸애와 함께 아무 준비도 없이 마실 가듯 나섰다가 허기로 탈진하여 오른 억새밭이다. 나무 하나 없이 억새 우거진 그 산등성이의 장관은 직전의 허기와 탈진을 말끔하게 잊게 해줄 만한 것이었다. [관련 글 : 아니 웬 알프스? 그래, 알프스 맞아!”]

 

간월재 억새 대신 만난 배론성지의 단풍

 

꼭 10년 만에 다시 간월재를 찾자고 했지만, 문제는 날씨였다. 가을 나들이를 함께하려고 귀향한 아들 녀석은 장관이더라며 대전 장태산 단풍을 추천했는데, 기상청 날씨알리미는 두 곳 다 비가 올 거로 보고 있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앱을 들여다보았으나, 강우 예보가 바뀌지는 않았다.

 

배론성지는 위 두 곳에다 밀양 위양지, 옥천 수생식물학습원까지 확인해 보고 최종 대안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유튜브의 동영상에서 소개하는 배론성지는 단풍 명승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기다. 충북 제천의 배론성지까지는 승용자로 두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천주교 성지(聖地)인 배론성지는 제천 중심가에서 13.9㎞, 강원 원주 시내에서는 35㎞ 떨어져 있는데, 행정구역과는 달리 강원도 원주교구 소속이었다. ‘배론’은 ‘배의 밑바닥’을 뜻하는 말로 마을의 계곡이 배 밑창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배론은 180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천주교인들이 모여 만들어진 외진 마을로 교인들이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면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에는 황사영(1775~1801)이 이 마을의 토굴에 숨어 백서를 집필하였다.

▲ 황사영이 조선 교회의 참상과 교회 재건책을 북경 주교에게 호소한 장문의 백서를 쓴 토굴. 충북 기념물이다. ⓒ 국가문화유산 포털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1751~1821)의 딸과 혼인한 뒤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황사영은 신유박해로 타격을 입은 조선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책을 북경 주교에게 호소하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帛書)’이다. 황사영은 이 편지를 북경으로 가는 사신 편에 끼어 보내려고 하였으나 발각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대역 부도죄(大逆不道罪)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되어 순교하였다.

 

황사영이 토굴에서  ‘백서(帛書)’를 쓴 곳

 

황사영이 백서로 요청한 것은 ① 국제적인 재정 지원, ② 북경 교회와의 연락 방안, ③ 교황에게 청하여 중국 황제가 조선에서 천주교를 공인하도록 권고(사실상 강요)해 달라 , ④ 조선을 청에 복속시켜 달라, ⑤ 서양의 무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협박해 달라는 것 등이었다. 마지막 세 조항은 너무 과격하여 당대뿐 아니라 후대에서도 비판받는 내용이다.

 

이후, 1855년(철종 6)에는 배론에서 조선 최초의 성요셉 신학교가 개교하였는데, 11년 만에 병인박해(1866)가 일어나면서 강제 폐쇄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배론은 해방 뒤 천주교사에서 중요 성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1922년에는 장호원 본당 관할에 있던 배론에 공소 강당을 세웠다.

▲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 최양업 도마 신부 기념 성당.
▲ 최양업 기념성당.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고 1849년 상하이에서 사제가 되었다 .
▲ 최양업 토마스 신부 조각공원 안의 최양업 신부상. 최양업 신부는 2016년 교황청에 의해 '가경자(可敬者 , Venerable)'로 선포되었다 .

배론에는 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묘소가 있다.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신학 교육을 받고 1849년 상하이에서 사제가 되었다. 귀국 후, 그는 11년 6개월 동안 산간 오지를 다니며 목자의 삶을 살았는데, 1861년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상경하던 중 문경에서 과로로 선종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2016년 4월 26일 교황청 시성성(諡聖省)에 의해 ‘가경자(可敬者, Venerable)’로 선포되었다. 가경자란 교황청 시성성 시복 심사에서 영웅적 성덕이 인정된 ‘하느님의 종’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배론에는 1855년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르 신부가 한국 교회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을 세웠다. 이때 교우촌의 회장인 장주기 요셉(1803~1866)이 자기 집을 신학당으로 봉헌하였다. 신학교에는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가르쳤는데 이들은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장주기는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황사영 백서 토굴’과 ‘장주기 요셉 성인과 성 요셉 신학당’, 그리고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묘’를 ‘배론의 세 가지 보물’이라고 자랑한다.

▲ 직선도로 쪽에서 바라본 개을 건너편 왼쪽에 한옥 성당이 성요셉 성당이다.
▲ 배론성지의 특별한 구역으로 들어가는 진복문. 안으로 들면 황사영 백서, 성 요셉 신학당,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다.

1988년에 고증에 따라 황사영 백서 토굴을 복원하였고, 6·25 전쟁 때 불탄 성요셉 신학교도 2003년에 복원되었다. 2006년에는 배론공소가 준 본당으로 승격되어 배론 성당이 되었으며, 2010년에는 성지 내에 배론문화영성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성지가 된 배론, 충북 기념물로 지정

 

배론성지 경내에 종교 시설로 ‘순교자들의 집’, ‘성요셉성당’, ‘황사영 순교 현양탑’, ‘사제관과 경당’,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외 많은 부속 건물들과 ‘봉쇄수녀원’, 사회복지 시설인 ‘살레시오의 집’이 있다. 배론성지는 2001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우리가 배론성지 주차장에 차를 댄 건 10시를 갓 넘겼을 때였다. 주말이라, 이미 주차장은 차고 있었고, 순례 온 천주교인들이 대형 버스에서 내려 성지로 입장하고 있었다.  우리도 천천히 인파에 섞여서 성지 안으로 들어갔다.

 

순례자에겐 순례의 순서가 있는 듯했으나, 우리는 그것과 무관하게 성지 안을 돌아보았다. 성지 입구 왼쪽에 단순 소박한 형식의 벽돌 건물로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가 서 있었다. 그리고 인생 미로를 거쳐 성모자상이 있는 잔디밭이 펼쳐졌다.

▲ 최양업 도마 신부 기념성당 앞의 가로등. 가로등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성가가 계속 흘러나왔다.
▲ 성요셉 성당 앞의 무명 순교자의 묘. 묘 앞 느티나무에 노란 단풍이 짙게 물들었다.
▲ 연못 위에서 바라본 단풍.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이 순교자의 집이다.
▲ 마음을 비우는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른 다리 위가 가장 사람들이 선호하는 포토 존이다.
▲ 연못 위 언덕의 단풍나무와 느티나무.
▲마음을 비우는 연못에 비친 연못가의 나무들. 수면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떠 있다.
▲ 연못 위 통로의 단풍 풍경. 오른쪽 건물은 휴식소다.

절정기를 지난 단풍나무 잎사귀가 오전의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고, 성지 곳곳에 세워진 가로등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경건한 성가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그런 선율 앞에서는 순례자가 아닌 이들도 절로 경건해지고,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붉게 물든 성지의 단풍

 

성모자상 위쪽 길가엔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성당이 웅장하게 서 있고, 뒤쪽은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이었다. 다리를 건너면 한옥 형식의 성요셉 성당과 무명 순교자의 집, 마음을 비우는 연못이 차례로 내를 따라 이어졌다. 연못 한가운데 아치형의 다리가 있는데 다리 중앙이 성지의 주요 포토 존인 듯 사람들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못 주위에는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노란 느티나무 등으로 마치 선경을 방불케 했다. 그 강렬한 색감은 사람들의 얼굴마저 물들이고 있는 듯했다. 진복문으로 들어서면 황사영 백서 토굴, 성 요셉 신학당, 최양업 신부의 묘소 등이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 마음을 비우는 연못에 비친 단풍과 하늘이 아름답다.

단풍의 화사한 기운으로 충만한 연못 주변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한 일주일만 일찍 왔더라면 단풍의 진수를 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절로 났다. 성지 안에는 넘치는 관광객들을 겨냥해 ‘성지는 유원지가 아니’라면서 기도에 방해되지 않게 정숙하고, 게임이나, 음주 가무, 취사를 삼가 달라는 펼침막을 걸어놓았다.

 

성지는 교인이 아닌 이들의 출입을 막지 않지만, 그들에게 순례자에 버금가는 언행을 요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들이객들이 기도를 방해하거나, 유원지에서나 할 법한 행동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단풍을 즐기면서도 그런 선은 지키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아내는 개신교회 쪽에도 이런 성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사람들로 붐비는데도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성지의 모습을 부러워했다. 한국 천주 교회사는 개신교보다 100년 앞서 들어와 ‘순교의 역사’라고 할 만큼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 순교하였으나 장주기는 103위 성인이 되었지만, 황사영은 아직 시복 추진 중이다.
▲ 황사영 순교 현양탑. 황사영은 백서의 내용 때문에 윤리적이 못하다고 비판 받는다.

그 결과 세계의 공경을 받는 103위의 성인들을 모시게 되었는데, 이 103위는 한국인 93명(신부 1명, 평신도 92명)과 함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주교 3명, 신부 7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배론의 장주기 요셉은 이 103위의 성인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배론의 보물’ 중 하나인 황사영은 박해를 피하는 동안 작성한 ‘백서’의 내용이 윤리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신유박해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 중 12인이었으나 그의 시복 추진이 여러 차례 보류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의 ‘대안 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 <가톨릭 대사전>, ‘황사영’ 항목 중에서

 

황사영은 2013년 2월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가 선정한 133위 순교자 시복 대상자 중 한 명이다. 2021년 6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시복 133위의 예비 심사 문서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하였으나 교황청 내에서 결론이 나오기까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정오가 겨울 때쯤, 우리는 교황청에서 ‘신앙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평신도 중심의 자생적 교회를 탄생시킨 한국 가톨릭 교회사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배론성지를 떠나 삼한시대의 저수지 의림지를 향했다.

 

 

2023. 11.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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