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여행] ② 삼한시대의 저수지 제천 의림지(義林池)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배론성지를 나와 바로 들른 곳이 의림지였다. 누구에게나 초등학교 때부터 제천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 밀양 수산제, 그리고 상주 공검지와 함께 삼한 시대에 축조된 4대 저수지라고 배웠던 기억이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3대 저수지라 하면서 상주 공검지를 뺀 자료가 여럿이다.
삼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제천 의림지
이건 뭔가 싶어서 찾아보니 어떤 자료에는 ‘ 수산제’와 ‘공검지’가 빠지고 의림지와 벽골제가 충남 당진 합덕제(合德堤) 등과 함께 3대 고대 수리시설로 꼽힌다고 되어 있다. 이런 혼란은 결국 이들 저수지의 축조 연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면서 삼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어쨌든 제천시 모산동에 있는 삼국 시대의 저수지 의림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수리 역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농경 관련 유적이다. 충청도를 호수의 서쪽이라 하여 호서(湖西) 지방이라고도 불렀는데, 여기서 말하는 ‘호수’가 바로 의림지다.
의림지는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于勒)이 개울물을 막아 둑을 쌓았다고도 한다. 제천의 고구려 때 이름이 ‘내토군(奈吐郡)’이었는데, 이는 시내[川]를 의미하는 말인 ‘내(奈)’에 방죽이나 제방을 뜻하는 ‘토(吐)’가 결합한 이름이다. 이 이름의 ‘시내’와 ‘제방’이 가리키는 것은 ‘의림지’니, 삼한 시대 축조설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지금도 관개 수리 구실을 하는 의림지
의림지는 용두산(874m) 남쪽 기슭 아래쪽에 자리 잡은 저수지로 본 이름은 ‘임지(林池)’였다. 제천은 고려 성종 때에 군현의 명칭을 바꿀 때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川)’이라 하였다. 의림지는 저수지 원래 이름인 ‘임지’에 옛 제천 이름의 ‘의(義)’ 자를 붙인 것이다.
의림지는 호반 둘레 약 1.8㎞, 면적 15만 1470㎡, 저수량 661만 1891㎡, 수심 8~13m의 대형 수원지로 지금까지도 관개 수리시설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의림지는 애당초 제천 지역의 최대 평야 지대인 제천 분지에 물을 대는 농경용 수리시설로 만들어진 목적을 여전히 다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김제 벽골제는 백제가 축조한 저수지의 중수비와 그 제방만이 남았고, 밀양 수산제도 1km쯤 남았던 황토로 된 제방도 없어지고 저수지는 논으로 바뀌었다. 상주 공검지도 주변이 모두 논으로 만들어지고, 천여 평 정도의 작은 규모만 남아 있으며, 수리시설로는 쓰이지 않는다. [관련 글 : 상주 공검지(恭儉池), 그 논 습지의 연꽃]
의림지의 수축 시기와 관련하여 두 차례에 걸친 의림지 바닥의 유기질 점토층에 대한 지질 조사 결과는 다소 달랐다. 그러나, 식물 파편 연대를 의림지 제방의 안정적인 축조 연대로 보고 통일 신라 시대에 해당하는 800~900년경에 의림지 제언이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지질조사 결과 통일신라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
의림지가 처음 축조되었을 당시의 둑은 제천천 주변에 사는 지역 주민들이 만든 소규모 저수지였을 거로 추정한다. 의림지가 삼국의 중심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에 있어서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하여 축조한 김제 벽골제처럼 중앙의 지배 세력이 직접 쌓은 것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후, 의림지의 수축(修築고쳐 쌓음)은, 통일 신라 시대인 800~900년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몇 차례 이루어졌다. 고려 시대에는 제방을 높였고, 조선 시대엔 제방을 복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의림지는 황해도 연안의 남대지(南大池), 상주 공검지와 함께 조선의 3대 저수지로 일컬을 정도의 농업 경제상 높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려는 수축이 추진되었다. 이때 저수지와 보를 관리하는 규정에 따라 수리 조합이 조직되는데, 제천의 의림지 수리조합은 1914년에 결성되었다. 1914년~1918년에는 의림지 수리조합이 의림지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 공사를 벌여 270㏊의 몽리면적(논밭 따위가 저수지, 보, 양수장과 같은 관개 시설로 물을 받게 되는 면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쌀 생산량은 1,400석에서 2,170석으로 대폭 늘어났다. 해방 후인 1972년에도 큰 홍수로 인해 의림지 제방이 무너지자, 이듬해 의림지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 공사를 벌였다고 한다.
제천팔경 중 제1경 의림지, 대표적 명승지
의림지는 제천팔경 가운데 제1경으로 현재 제천 지방의 대표적인 명승지가 되었다. 용두산 아래, 의림지 둑에는 100년~200년 된 노송 400여 그루와 버드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제림(堤林)] 그 서쪽에는 최근 높이 30m, 폭 15m의 대형 인공 폭포와 최고 높이 162m의 수경 폭포를 설치하였다. 폭포 밑으로는 250m 길이의 인공 동굴이 만들어져 있으며, 자연 폭포인 용추폭포 등과 어우러지면서 나들이객을 부르고 있다.
배론성지에서 불과 10여 분 만에 의림지에 닿았는데 주말이어선가 꽤 커다란 주차장은 꽉 차서 호수 둑길을 따라 난 찻길에도 자동차들이 일렬로 죽 이어지고, 의림지 주변은 사람들로 넘쳤다. 단풍이 곱게 물든 주변 산에 둘러싸인 의림지의 잔잔한 물결이 햇볕에 반짝였고, 둑길 오른쪽으로 의림지의 역사와 구조, 관개 방법, 생태 등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전문박물관인 의림지 역사박물관이 세워져 있었다.
의림지는 천 년이 넘게 근처 들판을 적셔주던 저수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주변 풍광과 잘 어우러진 깔끔한 모습이었다. 주변의 편의 시설과 볼거리 등도 충분한 듯 주말을 즐기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박물관 옆쪽 수리공원에는 ‘파크랜드’라는 이름의 놀이공원도 보였고 호수에는 나들이객이 탄 오리배가 오갔다.
의림지 주변에서 꽃핀 제천 지방의 누정 문화
호수는 어느 쪽에서 봐도 아름답고 잔잔했다. 호수 가운데 소나무와 단풍 고운 나무 몇 그루가 가지런히 선 인공 섬 하나가 고즈넉하게 떠있었다. 산책로로 관광안내소 앞을 지나 무지개다리를 건너면 서남쪽 제방에 있는 정자 하나를 만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 경호루(鏡湖樓)다.
1948년에 건립된 누각 주위로 정자와 소나무가 잘 어우러지는데, 제방 남쪽으로 더 가면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暎湖亭)도 있다.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이 정자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영호정은 정미 의병(1907~1910) 당시 의병대장 이강년이 제천 전투에서 승리한 후 1907년 음력 7월에 이곳에서 정치를 논하고,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였던 역사적인 장소라고 한다.
다시 발길을 돌려 용추폭포를 거쳐 인공 폭포를 돌아 꽤 기다란 데크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보니 산책로를 더 늘이는 공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무엇 하나 빠진 게 없이 갖추어져 있는 걸 보고 나는 모든 게 지방자치제 덕분이라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인구는 13만에 그치지만, 충북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제천시는 시민들의 일과 삶의 균형은 제대로 살피고 있는 거였다.
우리는 수리공원의 호젓한 원두막에서 간밤에 싸서 가져간 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의림지 일원이 드넓어서일까. 찾은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호수 주변은 번잡하지 않았고, 차분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서 박물관을 들르지 못했지만, 농경문화의 원형을 잘 간직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의림지를 만난 것만으로도 오늘 나들이는 만족스러운 시간이 되었다.
의림지는 농경 용도 외에 유흥과 경승을 추구하는 호수의 기능도 겸했다
돌아와서 확인한 것은 의림지는 농경과 수리적 용도 외에 유흥과 경승(景勝)을 추구하는 호수의 기능도 겸한 점이다. 즉, 의림지는 저수지와 호수를 동시에 아우르는 ‘호지(湖池)’ 개념의 전형적인 사례다. 의림지를 부르는 ‘의림호·임호·의호·감호’ 등과 같은 이름이 그 점을 가리키고 있다.
이미 17, 8세기를 전후하여 의림호는 숱한 나들이객이 즐겨 찾는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었고, 이러한 추세에 병행하여 다양한 누각과 정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의림호에는 기존의 의림정·우륵당(于勒堂)에 추가하여 진섭헌(振屧軒)·후선각(候仙閣)·임소정(臨沼亭)·대송정(大松亭)·홍류정(紅流亭)·영호정(暎湖亭)·의호사(義湖祠) 등과 같은 누정(樓亭)·사우(祠宇 사당)가 추가로 건립되었다.
의림지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위에 든 누정과 사우가 호수 주변에 이어졌던 몇 세기 이전을 상상해 본다. 농경을 돕던 의림지 주변에서 양반들이 휴식을 취하며 자연경관을 즐기는 ‘누정’ 문화가 성장한 것은, 거꾸로 의림지가 아름다운 호수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2023. 11. 17. 낮달
'이 풍진 세상에 >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겸손과 포용의 미덕, 그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400년의 부를 지켰다 (37) | 2024.01.13 |
---|---|
덕유산 향적봉의 눈꽃 행렬, ‘설경의 갈증’ 풀었다 (29) | 2023.12.25 |
‘간월재 억새’ 대신 제천 ‘배론성지의 단풍’ (45) | 2023.11.12 |
눈물로 희망을 꽃피우다(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47) | 2023.10.11 |
눈여겨 들여다보면 ‘1세기 전 대구’가 보인다 (50) | 2023.10.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