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경주 나들이] ① 경주시 교촌안길 27-44 최부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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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 얘기는 심심찮게 들어온 바 있지만, 가까이 살면서도 정작 그 ‘최부잣집(바로가기)’에는 가보지 못했다. 누구나 그렇듯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불국사, 석굴암을 찾으면서 나는 경주를 처음 만났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던 해 나는 경주와 가까운 소읍의 여학교에 임용되어 거기서 4년을 살았다. 그러나 승용차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 내가 가족을 끌고 버스로 경주를 찾은 건 불국사와 보문단지의 한 테마공원에 한 차례씩 들른 게 다였다.
처음 들른 최 부잣집에서 확인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외진 시골 동네에서 자란지라, 흔히 ‘천석꾼’, ‘만석꾼’이라 불리는 부자도 잘 알지 못한다. 남의 땅을 한 번도 밟지 않고도 어디서 어디까지 갈 수 있다고 비유되는 땅 부자 이야기도 듣기만 했을 뿐, 주변에 그런 이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만석꾼을 실감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최참판댁을 통해서였던 것은 그래서다.
코로나19로 3년간이나 열리지 못했고, 지난해엔 집안일로 참석하지 못한 ‘복직 교사 모임’은 지난 1월의 첫 번째 주말에 경주 최부자 아카데미에서 열렸다. 장소를 통보받고도 무심코 들어 넘겼는데, 6일 오후에 거기 닿고 나서야 그곳이 ‘경주 최부자 가문의 철학과 리더십을 통해 공존과 상생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걸 알았다.
회원들이 모이는 동안 아카데미와 쪽문으로 이어진 바로 옆의 최부자댁에 들러 안팎을 둘러보았다. 1971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최부자댁은 1700년경 당시 이웃하고 있던 경주향교의 권위를 해치지 않기 위해 향교보다 세 자(90.9cm) 이상 낮게 터를 깎아내고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정석을 따라 지은 고택은 지어질 당시에는 99칸이었으나 현재는 큰 사랑채와 안채, 솟을대문과 곳간 등이 남아 있다. 안마당 맞은편에 있던 사랑채는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중건되었고, 왼쪽에 작은 사랑채도 복원되었다.
최부자댁은 최치원의 17세손이며 조선시대 경주 지방에서 가문을 일으킨 최진립(1568~1637)으로부터 비롯했다. 최진립은 조선시대 경기 수군절도사, 전라 수군절도사, 공주 영장 등을 역임한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참전하고, 정유재란 때에도 공을 세웠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47년에 청백리에 올랐고, 경주 숭렬사와 경원의 충렬사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다.
부잣집은 ‘재산이 많은 집’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경주 최부자댁’은 그런 본래의 뜻을 넘어 독특한 광휘(Aura)를 풍긴다. 그것은 1대 최진립 장군부터 12대 독립운동가 최준(1884~1970) 선생까지 이 집안의 당주들이 보여준 지조와 절개, 겸손과 포용의 미덕 때문이다.
흔히 부자가 천당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 어렵다거나, 부자는 3대를 못 간다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부자가 존경까지 받기란 쉽지 않음을 이르는 말들이다. 그것은 부를 이루는 과정에서뿐 아니라 부자가 되어서 부를 지키느라 이웃에 인심을 잃기가 쉽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이다.
최부자댁 ‘공존과 상생’의 원천, ‘육훈(六訓)’과 ‘육연(六然)’
그러나 12대 400년 동안 만석꾼의 부를 지켜오면서 ‘공존과 상생’을 실천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특권층의 도덕적 의무)의 모범이 된 ‘경주 최부자댁’은 한 번도 인심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대대로 이어진 가훈, 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의 가훈’인 ‘육훈(六訓)’과 자기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 ‘육연(六然)’에 힘입은 것이었다.
육훈은 권력을 탐하지 말고 이웃을 생각하며 검소하게 살라는 내용의 가훈으로 “①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②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③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④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⑤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⑥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담은 육연은 “①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② 대인애연(大人靄然) :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③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④ 유사참연(有事斬然) :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⑤ 득의담연(得意澹然) :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⑥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등이다.
1, 2대도 아니고, 12대 400년에 걸친 세월을 한결같이 부자로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최 부잣집을 지탱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에 탐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훈은 울림이 크다. 재물이 넉넉해지면 권력을 탐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게 오늘날에도 이어지니 말이다.
최진립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은 2대 최동량(1598~1664)은 땅을 대거 매입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는 소작료를 수확의 반만 받고 중간 관리자인 마름을 두지 않았다. 거름을 쓰는 시비법과 모내기를 하는 이앙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그는 수확량을 크게 늘렸다.
경신대기근 때 쌀을 갚지 못하는 농민들 위해 담보문서를 불사른 최부잣집
3대 최국선(1631~1682)이 대를 이었을 때 최부잣집은 이미 조선 최고의 부자였다. 그는 “재물은 거름과 같습니다. 재물을 나누면 세상을 이롭게 하지만, 움켜쥐면 썩습니다.”라고 한 어느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나눔을 실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현장 연간의 경신 대기근(1670~1671) 때에 농민들이 쌀을 빌린 것을 못 갚게 되자 안타까워하며, 아들 최의기 앞에서 담보문서를 모두 불살랐다.
최국선은 죽을 쑤어 거지들에게 푸짐하게 나눠주었으며, 보리가 여물지 않은 3월과 4월의 보릿고개엔 100석의 쌀을 풀어 이웃에게 나눠주었다. 그의 대에서부터 소작 수입의 1/3을 빈민 구제로 쓰는 풍습이 생겼는데 이는 200년 후인 최준 대에까지 이어졌다.
19세기 조정의 부패와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최부잣집의 부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11대 최현식(1854~1928) 때, 남부 지방 각지에서 일어난 무장 농민군 활빈당이 최부잣집을 찾자, 도움을 받았던 농민과 거지들이 활빈당을 물리쳐 주기도 했다고 한다.
12대 최준(1884~1970, 1990년 애족장)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되자, 안희제와 백산상회를 세워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댔는데, 최근 그 액수가 200억 원에 이른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그는 해방 후엔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현재의 영남대학교)과 계림학숙(영남이공대학교의 전신)을 세웠다.
그는 남은 모든 재산과 집, 선산, 심지어 그의 뜻에 따르는 경주 교동의 친척 일가들의 집까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그는 수백 년간 전해 온 집안의 보물급 희귀장서 약 9천 권까지 전부 학교 재단에 기부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 200억 독립자금 대고, 영남대에 전 재산 기부
최부자댁은 군사정권 시절 전 재산을 들인 영남대(전 대구대)의 운영권을 삼성 이병철에게 넘겼고, 삼성은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곤경에 빠지자, 영남대를 박정희 정권에 넘겨 버렸다. 이로써 최부자댁이 지켜온 부는 끝나 버렸고, 영남대학교의 소유권은 박정희-박근혜에게로 이어졌다. (이상 <위키백과> 참조)
최부잣집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가암, 개무덤)에서 7대를 살았고, 경주시 교동으로 옮아와 5대를 살았다고 한다. 7대 남강 최언경(1743~1804)과 아들 용암 최기영(1768~1834)은 교촌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우고 18세기 말 이조리에서 살던 집을 허물어 교촌마을 향교 서편으로 옮겨와 현재에 이르렀다.
최부자댁이 단순한 고택이 아님은 그 400년에 걸친 ‘공존과 상생’을 실천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는 서사가 그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최부자댁을 구성하는 고택은 단순히 옛집이라기보다 가훈을 이어 실천해 온 이 집안 후예들의 공존과 상생이 더 돋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택의 동쪽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쪽문으로 이어진 최부자댁으로 들어서니 주말이라 답사객들이 적지 않았다. 고택은 일(ㅡ) 자 형 대문채, 기역(ㄱ) 자 형의 사랑채, 디귿(ㄷ) 자 형의 안채, 일 자 형의 중문간 행랑채가 있고, 별당과 천석곳간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된다.
쪽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의 맞배집이 앞면 5칸 옆면 2칸의 천석곳간이다. 99칸 집에 하인이 100명이나 되었다는 이 부잣집에 걸맞은 이 곳간은 쌀 8백 석을 보관할 수 있다고 했다. ‘석(石)’은 우리말 ‘섬’에 해당하는 단위로 두 가마니, 즉 곡식 열 말을 이르니, 이 곳간에 쌀 1600 가마니가 들어갔다는 얘기다.
천석곳간 정면에 ㄱ자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보이고 오른쪽 담장의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안채다. 마당은 널찍한데, 솟을대문과 이어진 행랑채는 규모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작고 소박하다. 솟을대문도 마찬가지로 소박하고 낮다. 작은 사랑채 뒤의 후원과 사당을 살펴보아도 99칸이었다는 옛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사당도 삼문 대신 외문을 달았다.
큰 사랑채에는 ‘용암(龍庵)고택’, ‘문파재(汶波齋’, ‘둔차(鈍次)’ 등, 작은 사랑채에는 ‘대우헌(大愚軒)'’, ‘둔각(鈍閣)’ 등의 편액이 걸렸다. 용암고택은 8대 당주 최기영의 호를 땄고, ‘대우헌’은 10대 최만희의 호다. ‘문파재’는 12대 최준의 호를 붙인 서재고, ‘둔차’는 11대 최현식의 호로 ‘둔한 2등’이라는 소박하고 겸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랑채는 1970년대 불타 버린 것을 다시 중건한 건물이다. 경주 지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을 쌓은 석재나 주춧돌은 통일신라 절터에서 사용했던 것을 재사용한 것이라 한다.
사랑채는 앞면 5칸 규모로 왼쪽 2칸은 대청마루, 가운데 2칸은 온돌방, 기역 자로 꺾인 오른쪽 1칸은 온돌방과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큰 사랑채 뜰 아래의 돌 구조물은 횃불을 피워 놓기 위하여 뜰에 세운 기둥 모양의 정료대(庭燎臺)다. 누마루 앞 정원에는 빨간 열매를 잔뜩 늘어뜨린 산수유가 햇살 아래 반짝였다.
집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려는데, 천석곳간 외벽에 한글과 영어, 중국어와 일본어로 새긴 ‘6훈’이 걸렸고, 그 앞에 경주 최씨 작은 쌀통이 놓여 있다. 이 부잣집을 지켜온 공존과 상생의 철학을 떠올리면서 나는 최부자는 견줄 수 없는 엄청난 부를 가지고도 여전히 더 많은 부를 집요하게 쫓고 있는 오늘의 부자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2024. 1. 13. 낮달
[새해 경주 나들이] ② 경주시 인왕동 신라의 궁성 유적 ‘월성’과 ‘해자’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최부자댁’
· 위키백과
· 경주 교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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