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경주 나들이] ② 경주시 인왕동 신라의 궁성 유적 ‘월성’과 ‘해자’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모임 다음날 찾은 월성과 해자
복직 교사 모임은 최부자 아카데미 생활관에서 묵고, 다음 날 시내 복요리집에서 조반을 들고 공식적으로 끝났다. 그냥 헤어지기 섭섭하여, 경주에 사는 회원을 길잡이 삼아 반월성을 찾기로 했다. 경주시와 문화재청이 2018년부터 추진해 2022년에 마무리하여 재현된 ‘월성해자’를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경주 월성(月城)은 신라 궁궐이 있던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과 그 안의 건물 유적들을 합쳐서 이르는 명칭이다. 성곽의 외형이 반달처럼 생겨 ‘반월성’ 혹은 ‘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한다. 또 왕이 머문 성이어서 ‘재성(在城)’으로도 불렀다. 월성과 해자에서 ‘재성’이 새겨진 와당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월성은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 경주 역사 유적 지구의 일부로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기원전 37년(신라 혁거세 거서간 21년)에 쌓은 금성(金城)에 이어 월성이 왕성이 된 것은 기원후 101년(신라 파사 이사금 22년)이다. 월성은 경주 분지의 중심부 남쪽에 있는 남천(南川) 북쪽 기슭의 소규모 단독 구릉 정상부에 축성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 신라조에는 성의 둘레가 1,423보(步)라고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성곽의 둘레는 2,400m 정도고, 동서 길이는 약 900m, 남북 길이는 약 260m, 면적은 약 19만 3,845㎡이다.
월성은 토성으로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 쌓고 그 위를 점토로 덮었다. 성이 반월 형태가 된 것은 성의 남쪽이 자연 절벽이기 때문이다. 월성에는 11개의 문 터가 확인되는데, 정문은 북문이었다. 성벽 주위에는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성곽을 따라 파놓은 못’인 해자(垓字)를 둘렀다.
성의 외곽에는 해자를 돌려 성곽을 보호하는 것은 한·중·일 삼국 모두에서 일반적일뿐더러 세계 보편적인 현상이다. 보통 산성은 도랑을 파더라도 물이 흐르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평지에 만들어진 도성, 읍성 등은 자연 하천 그 자체를 해자로 삼거나 하천의 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여 해자를 만든다.
토성인 월성의 해자는 남쪽은 자연 해자, 나머지는 인공 해자
한국사에서 해자가 본격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 첫 왕성으로 추정되는 중국 랴오닝성의 하고성자(下古城子)다. 이 성은 혼강을 자연 해자로 삼고 있으며, 두 번째 왕성인 지린성 지안시 국내성은 압록강과 그 지류인 통구하(通溝河)를 해자로 삼고 있다.
한성기 백제 왕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풍납토성은 한강 본류와 지류를 해자로 삼았으며, 인근의 몽촌토성역시 한강의 지류를 이용하여 해자를 돌렸다. 웅진 시기의 왕성인 공산성은 산성에 해당하지만, 금강을 자연 해자로 삼고 있다. 사비 시기의 부여 나성(羅城)은 백마강이 크게 굽이치는 지점에 있어 북편과 서편의 강을 자연 해자로 두고 있다.
경주 월성은 남쪽에 흐르는 남천이 자연 해자 역할을 하고 북편과 동편, 서편은 불규칙한 웅덩이를 파서 해자를 만들었다. 이번 복원 사업으로 월성 북쪽에 월성을 감싼 모습의 인공 해자를 재현했다. 발굴 중에 연못 바닥에서 신라인들이 썼던 행정문서인 한자 적힌 나무쪽(목간)과 동물 뼈, 토기를 비롯한 각종 생활 용기 등이 숱하게 나왔다고 한다.
월성은 삼국 통일 이후에 사면에 돌을 깔아서 호안 석축을 마련하고 연못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이때부터는 해자의 고유한 기능인 방어 이외에 관상의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쳐 평지에 만들어지는 읍성은 대부분 해자를 갖추게 되었다.
청주읍성, 낙안읍성, 해미읍성, 고창읍성, 동래읍성, 김해읍성, 웅천읍성, 광양읍성 등 조선시대의 읍성에는 대부분 해자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 각지에 축조한 일본식 성곽인 왜성(倭城)에도 해자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쌓은 순천왜성에도 내성과 외성 사이에는 해자를 설치하고 성벽 바깥으로는 목책을 둘러 요새화하였다.
아침을 먹고 교촌마을로 돌아온 우리는 월정교 근처에 차를 대고 계림 숲 뒤쪽에 난 길을 천천히 걸었다. 오른쪽에 여러 웅덩이처럼 나뉜 해자가 복원되어 있었다. 안내판에 따르면 해자는 월정교 쪽에서부터 1-1, 1-2, 3, 4, 5, 나호 등 모두 6곳이었다.
2014년부터 시작된 조사에 따르면 동·서·북쪽은 성벽 기저부를 따라 도랑을 파고 물을 채워 사용한 인공 해자다. 해자의 최대폭은 45m, 최대깊이는 1.8m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살얼음이 낀 해자는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다. 복원한다고 해서 반드시 당시의 깊이대로 복원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월성에 올라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성안의 광범위하게 펼쳐진 발굴 현장을 먼빛으로 바라보며 1741년 월성 서쪽에서 월성 내부로 옮겨서 축조한 석빙고를 둘러보았다. 소나무와 느티나무 고목이 잘 어우러진 성 둘레길에서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해자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21세기에 복원한 월성의 해자는 이미 그 기능과 무관하게 재현된 유적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을 거였다.
방어시설이니만큼 해자에는 참혹한 전쟁의 양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1592년 4월, 동래 부사 송상현은 2시간을 버티며 왜장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끈 선봉대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하고 동래성은 함락됐다. 2005년 해자 발굴에서 동래성 전투의 흔적이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해자에선 목간과 토우 출토, 서성벽에선 ‘인신공희’의 흔적
해자에선 생존자가 서둘러 동래성을 복구하면서 해자에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들과 각종 무기 등이 발굴되었다. 드러난 상당수의 인골에서는 칼에 머리를 베이거나 총과 화살 등에 맞아서 생긴 상흔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월성 해자에서는 이 대신 5세기 후반에서 6세기경 신라의 목간 130여 점과 4~5세기경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작은 모형의 배와 온전한 형태의 나무 방패 2점이 나왔을 뿐다.
대신 2014년 이후 시작된 월성 발굴조사에서 서성벽 바닥에서 최소 27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노출된 인골들은 성벽을 높이 쌓기 전에 땅을 다진 바닥층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인골들은 성벽의 진행 방향을 따라 중심 토루(土壘 : 굴착 공사에서, 특정 부분의 지지물로서 임시로 지표에 남긴 커다란 덩어리)의 가장자리에 맞추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불과 10m 떨어진, 1984~5년 및 1990년의 시·발굴 지점에서도 23구가량의 인골이 쏟아져 나왔음이 확인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부근의 성벽을 쌓을 때 최소한 27명의 인신공희가 이루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성벽 축조와 관련된 ‘모종의 의식’, 성을 쌓기 전에 땅을 다진 뒤 사람을 죽여 제사를 지낸 ‘인신공희(人身供犧)’로 추정된다. 축성 과정에서 안전을 기원하고, 견고한 성의 완성을 바라면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틀림없다. 그런 다음 본격적인 축성이 이뤄졌을 것이다.
성벽을 쌓기 위한 다짐 층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축조 공정별 출토 토기와 목탄 등의 연대측정을 고려하면 4세기 중엽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인골로 남은 인신공희는 이 시기에 자행된 뒤 본격적인 축성 공사가 펼쳐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무렵은 신라가 고대국가 체계를 갖춰가던 내물왕(356~402) 시대였다. 신라에서 순장제도가 공식 폐지된 것은 502년(지증왕 3년)에 와서다. 6세기 중엽에 신라에 복속된 가야도 5세기 내내 다수의 순장자를 지배층에 함께 묻었던 폐습이 계속되었다.
월성의 서쪽 사면으로 내려올수록 떡갈나무 같은 참나뭇과의 나무들이 울창했다. 다시 출발 지점으로 내려오는데, 남천 쪽의 경사면에 푸른 천막으로 덮어놓은 발굴 현장이 보였다. 이곳이 27명에 이르는 인골이 발굴된 인신공희의 현장이다.
1990년 발굴에서 확인된 인골은 영아 1구, 미성년 9구, 성년 8구, 4~50대 2구에 2016년과 2017년에 수습한 5세 전후의 유아와 20대 여성, 50대 남녀 등이다. 이들이 특정한 연령대가 아니라 여러 아이부터 청년, 중년까지 여러 연령대가 섞여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4세기 중엽에 성의 안전과 나라의 안녕을 꾀하고자 산목숨을 묻는 인신공희를 연출했지만, 그로부터 5백여 년 뒤에 신라는 멸망했다. 그리고 천 년도 넘어 뒷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그 악습은 역사에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월성의 참모습은 언제쯤 드러날까
월성은 9~10세기경에 사용이 중단된 이래, 천 년이 지나서 뒷사람들의 손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기록과 발굴조사를 통해 월성의 안팎에는 궁궐 혹은 관청과 관련된 다수의 건물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월성 외곽 건물 터는 해자 주변에서 여럿 확인되는데, 이는 월성의 관리와 관련된 관아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월성 내부는 A~D 지구로 나누어 조사가 진행 중인데, 이 중 C 지구에서는 월성 폐기 직전까지 사용된 17동의 건물지가 계획적으로 배치된 것이 파악되었고, 아래쪽에는 선대의 건물도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월성은 3세기를 전후하여 10세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고되었으니, 10세기께 사용이 중단된 것은 확인된 셈이다.
우리는 무심히 스쳐 지나왔지만, 월성 내부에 천막으로 덮인 발굴 현장의 조사가 끝난 뒤 펼쳐 보일 월성의 본모습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비록 1천 년 이전의 역사지만,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왕성 월성의 모습은 고려시대 이후에는 다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라의 성장과 번영, 그리고 멸망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함 직하다.
2024. 1. 16. 낮달
참고
· 경주 월성벽 바닥에서 발견된 최소 27구 인골의 정체는?(경향신문 2022.4.19.)
[새해 경주 나들이] ① 경주시 교촌안길 27-44 최부잣집
'이 풍진 세상에 >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홋카이도 여행] <미스터 초밥왕>의 고향, 스시가 전부는 아니더라 (8) | 2024.02.02 |
---|---|
[홋카이도 여행] 삿포로에서 만난 최고의 끼니는 편의점 도시락 (12) | 2024.02.01 |
겸손과 포용의 미덕, 그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400년의 부를 지켰다 (37) | 2024.01.13 |
덕유산 향적봉의 눈꽃 행렬, ‘설경의 갈증’ 풀었다 (29) | 2023.12.25 |
가장 오래된 저수지, ‘의림지’는 ‘호수’로도 사랑받았다 (39) | 2023.11.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