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에서 돌아온 여인, ‘환향녀’를 내친 조선 사회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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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종영된 MBC 금토 드라마 <연인>의 여주인공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배우 안은진이 역사 속에 잊힌 ‘환향녀(還鄕女)’을 불러냈다. “병자호란을 겪으며 엇갈리는 연인들의 사랑과 백성들의 생명력을 다룬 휴먼 역사 멜로 드라마”(MBC 프로그램 소개)라는 이 작품에서 여주인공은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온갖 고초를 겪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 환향녀이기 때문이다.
‘환향녀’는 ‘화냥년’의 어원이 아니다
말 그대로 ‘고향에 돌아온 여인’인 환향녀는 ‘정절을 잃어버린 여인’이라는 뜻으로 ‘화냥년’의 어원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은 아니다. 국립국어원 누리집에 따르면 ‘화냥’은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쓰인 ‘화랑(花娘)’에서 유래한 말이다. ‘화랑’은 본래 ‘가무에 능한 여자’, 즉 기생을 뜻했고, ‘첩’의 의미로도 쓰였다. <표준국어대사전> 역시 ‘화냥’의 어원을 ‘화랑’으로 밝히고 있다.
이 환향녀와 관련한 역사를 히스토리텔러 기자 이기환은 “환향녀라 손가락질? 남자들이나 잘하세요”…병자호란 여인들의 절규(경향신문, 2023.11.13.)라는 기사로 조곤조곤 밝혀준다. 이 역사의 갈피에 묻힌 이름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전쟁으로 여성들이 견뎌야 했던 폭력을 새삼 환기할 수 있었다.
정약용이 지은 <비어고(備禦考)>에는 삼전도의 굴욕(1637) 후 청나라로 끌려간 이가 60만 명이 넘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중 상당수가 여인들이었다. 이 부녀자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지만, 운 좋게 도망을 치거나, 많은 돈을 주고 풀려난 이들도 있었다.
“철수하는 청군 각 진영에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 치며 울부짖으니, 청나라군이 채찍을 휘두르며 몰아갔다.” - 나만갑(1592~1642), <병자록(丙子錄)>(병자호란 당시의 난중일기)
“사대의 아내나 첩, 처녀들은 차마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을 보면 더러 옷으로 머리를 덮었다.” - 정약용, <비어고>(일종의 국방 백서)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온 여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청나라에서 정절을 잃고 돌아온 환향녀라는 손가락질뿐이었고, 양반 집안에서는 이들에게 자결을 강요하거나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온 이가 딸인지 며느리인지에 따라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갈렸다.
청에 끌려간 딸과 며느리를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
위 기사는 인조 16년(1638) 3월 11일 자 <인조실록>의 기록을 불러낸다. 대사헌과 예조·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역임한 장유(1587~1638)와 전 승지 한이겸(1581~?)이 각각 돌아온 며느리와 딸의 문제로 올린 상소다.
“제 외아들(장선징·1614~1478)의 처(며느리)가 청나라 군에 잡혀갔다가 몸값을 주고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아들의 배필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습니다. 이혼하고 새장가를 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장유
“제 딸이 청나라군에 사로잡혀 있다가 몸값을 주고 귀국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들려 합니다. 원통해서 못살겠습니다.” - 한이겸
환향녀가 딸인지, 며느리인지에 따라서 이들의 태도가 엇갈린 것이다. 환향녀 ‘며느리’는 받아들일 수 없고, 환향녀 ‘딸’은 되레 버리려는 사위를 나무라는 아비의 모습이다. 예조에서 이를 공론에 부쳤고, 좌의정 최명길(1586~1647)은 단호하게 환향녀를 변호한다.
“전쟁 중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도 진실을 밝히지 못한 여인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사로잡힌 부녀자들이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볼 수 있습니까.”
- <인조실록> 원문(신풍 부원군 장유가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 온 부녀자들의 이혼 문제에 대해 계하다) 보기
공론에 붙였음에도 오로지 최명길의 주장만이 실록에 실린 것은 달리 반박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도 똑같은 논쟁이 벌어졌는데, 선조가 “이혼 및 재혼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선조는 “적진에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경우와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여인을 견줄 수는 없다”(역사서 <조야첨재>)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최명길의 변호와 실록 사관의 기막힌 평론
최명길은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어떤 이가 적진(왜)에서 돌아온 부인과의 이혼을 청하자,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인을 두고 새 장가를 든 관리에게 특명을 내려 뒤에 들인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했다. 최명길은 임란 때 고관대작들이 잡혀갔다 돌아온 처와 살면서 자식들을 낳아 명문거족이 된 사람도 더러 있다고 하고, 끌려갔다가 협박에 굴하지 않고 굶어 죽거나 자결한 이들의 예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날짜 <인조실록>의 결론은 “그러나 이 뒤로 사대부집 자제는 모두 다시 장가를 들고, 다시 (환향녀와) 합하는 자가 없었다.”였다. 더 기막힌 것은 이 실록을 기록한 사관의 평론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아,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당시 호조판서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할 때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한 주전파였던 예조판서 김상헌 등과 대립하여 청나라 진영을 오가며 화의에 앞장선 주화파다.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수모를 겪으며 난국을 화의로 건지려 했던 최명길은 눈물을 흘리며 항복문서를 썼고, 김상헌은 이를 찢어버린다.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는 청음의 일갈에 최명길은 찢어진 종이를 주워 맞추었다. “대감은 찢으나, 나는 주워 맞추리다.”
결국 청음은 항복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낙향해 두문불출했고 최명길은 영의정이 되어 인질로 끌려간 척화 대신과 포로 석방을 교섭하는 등 난국을 수습했다. 두 사람은 그러나 몇 해 후 청나라의 감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김상헌은 최명길에게 “공의 주화가 오로지 나라를 위한 충성에서 비롯한 것임”을 비로소 알고 마음으로 탄복하였다고 한다. [관련 글 : 안동 소산리와 청음 김상헌]
최명길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입을 다물었던 신료들은 그러나 환향녀를 내치는 쪽을 선택했다. 결국 “못난 임금과 못난 아비, 못남 남편”을 만나 적에게 붙잡혀 가야만 했던 여인들은 화냥년’ 소리를 들으며 버림받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패전으로 희생을 강요당한 여인들
청나라의 침략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면서 잘난 양반들은 가장 약자인 여성들, 그것도 어미와 아내, 며느리와 딸을 버리고 달아났다. 강화가 함락되자, 강화 감찰사 김경증은 혼자 달아났고, 남은 일가의 어머니와 부인, 며느리, 그리고 일가의 여인들이 모두 자진했다. 그의 아들은 어머니를 비롯해 일가 여인들에게 자진을 강요했다.
“적병이 강화도 갑곶진을 건너자, 김경징은 늙은 어미를 버리고 배를 타고 달아났다. (……) 경징의 아들 김진표는 제 할미와 어미를 협박하여 스스로 죽게 하였다.”(<인조실록> 1637년 9월21일)
청나라 군사가 접근하자 두려워한 아내가 살려달라고 하자, 남편은 빨리 죽으라고 겁박하는 등, 잘난 양반들은 제 가문의 명예를 들먹이며 부녀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그리고 여성들은 적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와도 다시 제 나라, 남편과 가문으로부터 내쳐지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전후 현실을 다룬 ‘몽유록계 한문 소설’로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강도(강화도)가 청(淸) 군병에 의해 함락됨으로써 죽게 된 여인 15명의 원령(怨靈)이 주인공의 꿈에 나타나, 조정 대신과 강화 수비를 맡았던 관리들을 비난하는 것이 작품의 내용이다. 마지막 여인인 기생은 순절한 여인들을 찬양한다.
“나라의 수치에 충신으로 의(義)에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매서운 정조를 보인 것은 부녀자뿐이니 이 죽음은 영광된 것인데 어찌 슬퍼하십니까.”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2차례의 호란을 초래한 무능한 군주 인조(재위 1623~1649)는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삼전도의 굴욕)를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성에서 나온다’는 뜻으로 ‘정축하성(丁丑下城)’으로 표현하며 이를 신하들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패전의 결과는 참담하고 굴욕적이었다. 당시 항복문서에는 “(청과 조선의) 여러 신하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사이좋게 지낸다”(<인조실록> 1637.1.28.)라는 기막힌 내용이 들어있었고 청나라는 같은 해 9월 “그때의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음이 청나라 심양에서 소현세자 등이 본국에 올린 장계를 모아 엮은 보고서인 <심양장계(瀋陽狀啓)>에 전하고 있다.
패전의 결과는 피지배계층에 더욱 가혹
패전의 결과는 피지배계층에 더욱 가혹했다. 청나라 심양 남탑 거리에는 조선인 포로를 매매하는 노예시장이 있었는데 돈이 있으면 이들을 속환(贖還)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 일행이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의 상황을 정리한 실록인 <심양일기>에 전하는 기록이다.
“청인들이 남녀 인질들을 모아 놓으니, 수만 명이 됐다. 모자가 상봉하고 형제가 서로 만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곡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심양일기> 1637.5.17.)
원래 양국 간 교섭에 따른 1인당 몸값은 은(銀) 10~30냥 정도(<인조실록> 1637.4.21.·1638.5.11.) 였으나, 실제로는 천차만별로 1인당 100~250냥에 이르렀고, 심지어 1000~1500냥을 호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몸값을 낼 수 없는 백성들은 결국 돌아올 수 없었다는 얘기다.
딸과 며느리 차별, 그 원인은 ‘피’에 있는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남자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온갖 기득권을 누리지만, 정작 져야 할 책임과 의무 따위보다는 제 가부장적 권력을 유지하는 데 골몰하는 건 다르지 않다. 그런데 유독 같은 여자인데도, 딸과 며느리를 바라보는 태도가 엇갈리는 게 눈에 밟힌다.
며느리는 이혼하게 해달라고 하고, 딸이 받은 사위의 이혼 요구는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차별은 피를 나눈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서 비롯한 것일까.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에서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겐 이런 류의 차별은 꽤 뿌리 깊은 것 같다. 적지 않은 속담이 그를 입증하는 사례다.
가을볕에는 딸을 쪼이고, 봄볕에는 며느리를 쪼인다.
배 썩은 것은 딸을 주고, 밤 썩은 것은 며느리 준다.
죽 먹은 설거지는 딸 시키고, 비빔 그릇 설거지는 며느리 시킨다.
딸의 시앗은 바늘방석에 앉히고, 며느리 시앗은 꽃방석에 앉힌다.
피붙이와 혼인으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가 다르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딸이 낳은 자식은 내 성을 물려받지 않지만, 며느리가 낳은 아이는 내 성을 물려받고, 내 자손으로서 상속자가 된다. 그런데도 끌려갔다 돌아온 며느리는 내치고, 딸을 거두어들인 것은 ‘피’ 말고 다른 요인이 있는 것일까. 딸은 피로는 끌리지만, 출가외인이어서 당장 내 가문의 명예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았던 것인지.
드라마 <연인>은 기사만 보았지, 한 번도 시청하지 못했다. MBC에서 다시 보기로 볼 수도 있긴 하지만, 그걸 굳이 요금을 내고 볼 엄두를 내는 건 쉽지 않다. 다만, 환향녀를 사랑으로 거두어들인 남주인공이 나오는 장면들을 유튜브로 보면서 이 드라마가 외국에서도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넉넉히 짐작하고 있다.
2023. 11. 22. 낮달
참고
· 이기환, “환향녀라 손가락질? 남자들이나 잘하세요”…병자호란 여인들의 절규(경향신문, 2023.11.13.)
· 이기환, [흔적의 역사] 환향녀, 화냥년, 호로자식(경향신문, 201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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