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가 단일 잣대인 우리나라 중산층, 그들의 민낯
한 주간지에서 ‘중산층 통계 논란’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이 기사의 핵심은 통계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통계는 중산층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국민들은 오히려 중산층에서 저소득층으로 떨어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통계와 국민의 체감 현실 사이의 괴리다. [관련 기사 : 그 많은 중산층, 도대체 어디에 있어? ]
‘공정서비스’와 부산 아파트의 ‘갑질’ 사이
한 도시락업체가 매장에 ‘공정서비스’를 안내하는 글을 게시하면서 누리꾼의 칭송을 한 몸에 받은 게 다음 날이다. [관련 글 : 그 가게의 ‘공정서비스’ ] 공교롭게도 그 이튿날에는 경비원이 날마다 출근길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게 한 부산의 어떤 아파트의 ‘갑질’ 기사가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를 달구었다.
‘상품과 대가는 동등한 교환’이라는 상식적 전제로부터 출발한 그 가게의 공정서비스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현실의 의미를 새삼 환기해 준 듯하다. 그것은 대형 쇼핑몰에서의 ‘무한 친절’이 기실은 ‘고객에게 오류는 없다’라는 부당한 전제 아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우쳐 준 것이다.
상품을 구매할 때마다 우리는 전에 없던 ‘무한 친절’을 경험한다. 때때로 그러한 현실은 구매자에겐 판매원들의 친절이 당연하며 자기 지위가 판매원의 그것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자존감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시에 그칠 뿐 아니라 기업의 이윤 동기를 위해 자행되는 인권 유린의 빌미가 되기 쉽다.
그 가게의 ‘공정서비스’는 매장에서 근무하는 젊은이들이 ‘항상 존중받아야 할 훌륭한 젊은이들’이며 ‘누구에게는 금쪽같은 자식’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화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천박한 승자 독식의 사회라는 걸 아프게 증빙할 뿐이라는 것도.
‘공정서비스’에 이어진 부산의 ‘갑질 아파트’ 소식을 듣고 그 상반되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별로 혼란스럽지 않다. 하나는 어쩌다 만나게 되는 좋은 소식이지만, 다른 하나는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나쁜 소식 중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손녀뻘 학생에게 인사한 경비원 “먹고 살려고”]
과잉 친절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부산 아파트 갑질은 백화점 따위에서 일어나는 진상 고객의 그것과 비슷하다. 진상 고객이 교환의 가치와 무관한 판매직원의 무한 친절과 복종을 요구하며 무릎을 꿇리는 따위의 야만적 일탈을 저지른 것처럼 예의 아파트에선 경비원에게 아파트 ‘경비’ 이상의 복종과 예우를 요구한 것이다. 그것도 갑의 지위와 힘을 이용하여.
“어쩔 수 없죠, 벌어 먹고살려면.”
손자뻘의 학생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거듭해야 했던 경비원의 독백을 전해 듣고 부끄러워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부끄러운 사태 앞에서 가장 먼저 나선 이는 그 아파트에 사는 학생이었다. 학생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도, ‘이 문제가 온라인에서 논쟁거리가 되기 전까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그런 일이 두 달째나 이어지고 있는데도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던 어른들이다. 그게 어찌 그 아파트만의 문제겠는가. 일상의 단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관계를 단지 ‘갑을’의 계약관계로, 갑의 지위와 힘을 행사하는 게 자신의 권리라고 착각하는 일이 좀 많은가 말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새끼 부자’?
이 갑질의 주체인 ‘갑’은 누구일까. 뭉뚱그려 ‘부자’라 하기도, 단순한 상품구매자라 줄이기도 뭣한 이들의 어느 계층에 속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은 경제협력기구(OECD)에서 사용하는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50∼150% 구간에 포함되는 가구를 이른다. 만약 1인 가구의 중위소득이 100만 원이라면 50만 원(50%)부터 150만 원(150%)을 버는 가구가 중산층이다. 자연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해마다 증가하여 지금은 65.6%에 이른다. 100가구 가운데 66가구가 중산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재산은 빼고 단지 소득만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현실과는 제대로 부합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중산층 개념은 엄밀히 보면 중산층이 아닌 ‘소득 중간층’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산층은 실제로 매월 받는 소득뿐 아니라 부동산 등 자산도 소유하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와 같은 자본주의 발전의 경로를 거치지 않아서일까.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 개념은 대체로 경제적 능력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강해 보인다. 중산층 기준을 묻는 직장인 대상 설문조사 결과나 <동아일보>의 조사(2015)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것은 자산과 소득이다.
부채 없이 30평 이상의 주택을 소유한다든가, 월 급여가 500만 원 이상이라든가, 중형 자동차를 보유하고 일정액의 예금 잔액이 있고 1년에 한 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하는 것 등이 지금까지의 중산층의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15년 조사에는 다소 변화가 있다. 주택이나 월수입 말고도 매주 일정 시간 이상의 취미·레저 활동을 한다거나 자기 계발에 매월 10만 원을 쓴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것인데 이는 최소한 일정한 자산과 소득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생활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매달 일정액을 기부한다는 조건이 들어 있는데, 이는 절대빈곤을 넘어 선진국 문턱까지 쫓아온 21세기 한국의 변화를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중산층에게 ‘없는 것’
그러나 거기에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에서 제시된 중산층의 기준에 빠짐없이 들어 있는 것이 빠져 있다. 이를테면 ‘사회적 약자’를 돕고, ‘부정과 불법에 저항’한다거나 ‘공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등의 사회적 행동 방식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제시된 조건들은 그 나라 중산층들에게 평균적으로 해당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충족되어야 할 당위적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산과 소득 등의 경제적 능력보다는 사회와 소통하고 공동선을 위한 역할을 언급하고 있는 이들 나라의 기준은 그것 자체로 시민으로서의 소양과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기부금 조항이 들어간 것은 절차적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과 그 구성원의 변화로서 유일하게 사회적인 성격과 연관된 부분이다. 우리 사회가 약자를 돕고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것을 기준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민주화 과정에서 치러낸 적지 않은 희생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까.
기성세대 가운데 상당수가 지난 시기 민주화에 힘을 보탠 이들이고, 젊은 세대에서는 기부를 생활화하는 등의 생활 양식상의 변화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갑질’ 따위로 드러나는 것은 아직도 그 사회적 성격에 대한 자각과는 거리가 먼 우리 사회 중산층의 민낯이다. 자신의 이해와 권리에는 밝지만, 타자의 자유와 인권, 시민의 의무 같은 공동선에 대한 인식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민망한 ‘갑질’에 대한 보도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그 주인공들이 꼼짝없이 우리 사회의 중산층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신의 구매력을 자랑하는 이들이야 상류층일 게고 그 자신이 빈곤 계층인 이들이 굳이 갑질을 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젯밤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의 보도를 보다 말고,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13년 동안이나 서울에 신설되지 못했다는 장애인 학교 설립 문제를 두고 절박해진 장애 학생 부모들이 이를 반대하는 주민 앞에 ‘무릎’까지 꿇고 호소했단다.
장애인 학교는 몸이 불편한 학생들만 따로 다니는 특수학교다. 장애인 직업 훈련센터 주민공청회에서 장애 학생 부모들은 주민들 앞에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들 앞에 주민들도 무릎을 꿇는 걸로 대응했다.
“발달 장애인을 왜 우리 아이들이 감당해야 합니까.”
“우리도 무릎 꿇읍시다. 우리도 무릎 꿇어.”
“장애인을 위해서라도, 중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서로 독립적인 공간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뉴스는 주민들이 장애인 학교가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 이유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장애인이든, 노숙자든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시설이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닥치는 것은 교육과 재산권 문제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 아니던가.
이 앵커 브리핑에서 손석희 앵커는 입장을 유보하며 굳이 어느 쪽도 나무라지 않는다. 단지 그렇게 뇌까릴 뿐이다.
“양쪽이 모두 무릎을 꿇는 처절함… 그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1987년 6월항쟁의 주력부대는 이른바 시내 중심가 빌딩에서 근무하는 회사원들, 이른바 ‘넥타이부대’였다. 이들의 참여가 항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때의 분노한 샐러리맨들과 오늘날 중산층의 모습으로 돌출되는 저 갑질의 주역들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사회적 공분으로 시위대에 따라붙어 짱돌을 던지던 그들의 분노와 어렵사리 이룬 자택, 그 자산을 지키기 위해 장애인 학교가 우리 동네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같이 무릎을 꿇는 저들의 분노는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개인적 이해를 넘어 시민으로서 타자의 자유와 인권, 시민의 의무 같은 공동선에 대한 인식으로 가는 여정을 얼마나 멀고 험한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는 어이없는 역사적 퇴행이 권력에 의해 무심하게 진행되는 2015년 가을, 나는 다시 우리 시대의 민얼굴을 들여다본다.
2015. 11. 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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