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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가을 본색(1) 익어가는 열매들

by 낮달2018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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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과 수확의 계절, 주변에서 익어가는 과실들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아파트 앞의 아그배. 열매의 모습이 돌배나무와 비슷하며, 아기 배처럼 작은 모양이어서 '아그배'라는 이름이 붙은 거로 추정된다.

가을을 ‘결실’이나 ‘수확’의 계절이라고 이르는 것은 새삼스럽고도 진부하다. 한때는 그게 사람들이 쓰는 편지의 첫 부분인 계절 인사로 즐겨 쓰이긴 했지만, 더는 그 의미의 울림이 새롭지 않아서다. 그것과 동시에 쓰인 표현이 ‘천고마비’나 ‘독서’의 계절 등인데, 그것도 해묵어 화석이 되어버린 표현이다.

 

그나마 ‘조락(凋落)’의 계절이라고 하면, 앞엣것에 비기면 케케묵은 느낌이 덜하다. ‘조락’은 ‘시들어 떨어진다’라는 한자어인데, 정작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낙엽’의 계절을 선호한다. 결실이나 수확이 작물이나 과수의 숙성을 가리키는 낱말이라면, ‘조락’은 그 이후의 생태적 현상, 소임을 마치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와 잎의 변화를 이르는 어휘다.

 

 생성과 순환의 경계, 가을

 

수확과 조락은 가을을 맞이한 식물이 가진 두 가지 측면을 이르는 표현이다. 식물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스스로 키워온 열매를 인간에게 돌려주고, 다가오는 겨울을 나고자 자신의 몸피를 가볍게 하는 것이다. 그 생성과 순환의 경계가 바로 가을인 셈이다.

 

9월 말께부터 어저께(29일)까지 산책길에서 찍은 이미지들 가운데 열매를 골라보니 산수유를 빼고도 10가지다. 처음은 아파트 우리 동 앞의 아그배다. 장미과 사과나무 속의 나무로 배나무와는 거리가 있지만, 열매의 모습이 돌배나무와 비슷하며, 아기 배처럼 작은 모양이어서 ‘아그배’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원수, 분재용으로 심는 나무다. [관련 글 : 2023년 가을의 산수유]

▲보는 것만으로도 신 느낌이 밀려오게 하는 석류. 너무 익어서 터진 것인가, 새가 쪼은 것인지 석류가 깨져 있다.
▲ 요즘 감은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병충해 때문에 망가지고 볼품 없어진다. 가운데 감은 마치 얼어터진 듯한 모습이다.
▲ 산미가 강하고 단단하며 향기가 강한 열매로 가을에 노랗게 익는 모과. 나무에 달리는 참외 비슷하다 하여 '모과'가 되었다.

석류는 우리 동네 산 아래의 양옥집 마당에 서 있는 나무다. 담장 너머로 내민 가지에 해마다 탐스럽게 석류가 달린다. 정은숙이라는 가수가 부른 ‘석류의 계절’이라는 대중가요가 공전의 히트를 하던 해 나는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의 중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거리의 음향기기 판매점인 ‘소리사’에서 틀어대는 그 노래에서 ‘가을은 외로운 석류의 계절’이라는 가사와 리듬을 익혔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보면 감나무가 있는 집도 꽤 된다. 감도 요즘은 약을 치지 않으면 병충해가 심해서 온전한 열매를 얻기 어렵다. 동네의 마당 넓은 양옥집에는 열매를 총총 단 감나무 키가 성큼 높은데, 거기 달린 감들도 병충해를 입어서 모양이 온전치 않다. [관련 글 : 감 이야기- 땡감에서 홍시, 곶감까지]

 

동네 버스 정류장 근처의 소형 마트 옆 높다란 담 너머에 열매를 잔뜩 달고 있는 나무는 모과다. 과일전 망신시킨다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의 이 과일은 탐내는 사람이 없어서일까. 가지마다 주먹만 한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모과는 산미가 강하고 단단하며 향기가 강한 열매로 가을에 노랗게 익는다. 과육을 꿀에 재워서 정과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과실주 또는 차로 끓여 먹기도 한다.

 

모과는 나무에 달리는 ‘참외’ 비슷한 열매라 하여 ‘목과(木瓜)’ 또는 ‘목과(木果)’라 쓰기도 한다. 목과가 ‘모과’가 된 것은 ‘간난(艱難)’이 ‘가난’으로 바뀐 것과 같이, 한 단어 속에 같거나 비슷한 음이 중복되어 나타날 때 하나를 생략하는 ‘동음생략’의 결과다.

▲꽃사과는 사과나무 속 식물 중에서 열매보다는 관상용 꽃을 위해 심는 종들의 총칭으로 종류가 여럿이다.
▲ 구미의 거리마다 가로수로 심은 이팝나무. 검은 보라색 열매는 폴리페놀이 풍부해 활성산소를 감소시키고 노화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 올해는 도토리가 풍년이었다. 아무도 주워가지 않은 도토리가 길바닥에 마구 흩어져 있다. 이 사진은 물론 주워 모아 찍었다.

북봉산 줄기 아래 자리 잡은 오리고기 식당의 담장 대신 심은 꽃나무 가운데 꽃사과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꽃사과는 사과나무 속 식물 중에서 열매보다는 관상용 꽃을 위해 심는 종들의 총칭으로 종류가 여럿이다. 중학교 앞의 카페 앞에도 한 그루가 있으나 그건 좀 더 붉고 씨알이 굵은데, 이미 충분히 익어 짓물러 터진 놈도 있다.

 

아파트 앞부터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주도로 양쪽의 가로수는 물푸레나뭇과의 낙엽 활엽 교목 이팝나무다. 구미 시내 거리에는 이 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데가 많다. 10~11월에 열리는 검은 보라색 열매는 폴리페놀이 풍부하게 들어 있어 활성산소를 감소시키고 노화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관련 글 : 이팝나무, ‘가로수의 진화]

 

올해는 도토리가 풍년이었다. 나는 여전히 도토리 대신 ‘꿀밤’이라고 부르는데 지난 10월 9일, 동네 뒤 북봉산 어귀에서 찍은 사진이다. 물론 흩어진 놈들을 주워 모아서 찍은 사진이다. 풍년인 데다 따로 줍는 사람이 없어서 길바닥마다 도토리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올겨울, 다람쥐, 청설모, 어치 등의 짐승들은 풍족한 먹이로 푸근하게 겨울을 날 수 있겠다.

▲ 고은 시인의 시 '열매 몇 개'를 떠올려주는 찔레 열매. 탄생을 위한 인고는 식물이라고 다르지 않다.
▲ 조율시리의 으뜸으로 꼽히는 대추. 제사상에 빠질 수 없는 대추를 나는 가장 달고 맛있는 것으로 친다.
▲ 우리 아파트 지상 주차장 위에 조성한 어린이놀이터의 주목이 마치 이어폰에 끼우는 마개 같은 모양의 붉은 열매를 맺었다.

북봉산 어귀에서 만난 찔레도 병충해를 입은 듯하지만, 일단 열매 몇 개를 맺었다. 찔레는 5월에 만개한 꽃만큼 아름다워 보이진 않지만, 고은 시인의 시 ‘열매 몇 개’에서 노래한 것 같은 ‘탄생을 위한 인고’를 새삼 헤아리게 해 준다. [관련 글 : 생명마다 한 우주’, 그 탄생을 위한 인고의 시간]

 

대추나무가 있는 집도 동네에 몇 있는데, 역시 오리고깃집에서 담장 대신 심은 대추가 그중 실하다. 씨알이 어른 엄지보다 더 굵어 보이는데, 지날 때마다 주인이 따는지 하나씩 줄곤 했다. 대추는 우리 제사상에 진설(陳設)하는 ‘조율시리(棗栗柿梨)’의 으뜸이다. 나는 생으로 먹는 대추가 세상에서 가장 단 과실로 기억한다. [관련 글 : 조율시리(棗栗枾梨)’의 으뜸 대추이야기]

 

주목(朱木)은 주목과의 상록 침엽교목으로 한국, 중국 북동부, 일본이 원산지다. 고산지대에서 서식하는 아한대성 수종이나, 저지대에서도 잘 적응해 관상수로 기르는데, 우리 동네 중학교 운동장과 우리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에도 있다. 주목은 마치 이어폰에 끼우는 마개 같은 모양의 붉은 열매를 맺었다.

▲ 과실은 아니지만, 벼는 곡식 열매다. 나이 들수록 이런 곡식도 예사롭지 않게 눈에 들어오게 된 듯하다.

마지막으로 과실은 아니지만, 벼도 익어가는 곡식 열매다. 이제 곧 추수가 시작될 터이고, 들판은 빠르게 비어갈 것이다. 그냥 무심히 지나쳐도 무방한 벼가 예사롭지 않게 눈에 들어오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힘들여 벼농사를 지은 농부들에게 잘 익어 고개 숙인 벼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자식 같을까.

 

한 해의 수고로움을 거두는 계절이지만, 그것은 이내 비워질 수밖에 없는 이 계절과 삶의 순환 앞에서 문득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을 아득하게 돌이켜본다.

 

 

2023. 11. 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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