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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을의 산수유

by 낮달2018 202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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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봄의 척후’에서 고혹의 붉은 열매가 되다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내가 사는 아파트 뒤편 담장 안에 심겨진 산수유가 농익어 빨간 열매를 달았다.

우리 아파트 담장 가에는 산수유 여러 그루가 심겨 있다. 그중 세 그루는 공동 현관을 나서면 바로 왼쪽에 있어 가장 먼저 봄소식을 전해준다. 2월 중순이 지나면 서서히 벙글어 꽃망울을 터뜨리는 산수유꽃은 그걸 가까이 지켜보는 내게 계절의 순환을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산수유는 층층나무 목 층층나뭇과에 속하는 낙엽성 소교목이다. 줄기는 높이 5~12m, 가지가 많이 갈라진다. 꽃은 3~4월에 잎보다 먼저 피는데, 꽃대 끝에 20~30개의 많은 노란 꽃이 우산살처럼 피어난다. 빨갛게 익는 타원형의 열매는 약재로 쓰인다.

 

산수유 열매는 그 주산지 농민에게는 생광스러운 수입원이다. 경북 의성군 사곡면에서는 경북 도내 산수유 생산량의 80%(전국의 38%)를 출하한다. 요즘엔 산수유 씨를 기계로 발라내지만, 그 이전에는 이로 씨를 발라내야 해서 산수유 마을로 널리 알려진 ‘화전리’ 노인들의 이는 닳아서 비뚤어졌다고 했다. [관련 글 : 순박한 민얼굴의 산수유 마을 의성 화전리]

▲ 이르면 2월 말께부터 꽃망울이 벙근 산수유 꽃눈(왼쪽)과 마침내 씨나락을 닮은 꽃을 터뜨린 산수유.

산수유(山茱萸)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1970년에 광릉 지역에서 자생지가 발견되어 우리나라 자생종임이 밝혀졌다.(국립생물자원관 한반도의 생물 다양성에서는 중국 원산으로 기록) 흔히 ‘봄의 전령’으로 기리는 꽃은 매화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 한 열흘쯤은 더 이르게 피는 꽃이 산수유다. 그래서 나는 산수유를 ‘봄의 척후’라고 부르기도 했다. [관련 글 : 봄 기척산수유와 매화]

▲ 아직 때가 이른 것인지, 산수유 열매는 푸른 놈부터 붉게 물드는 놈, 아주 익은 놈 등이 다 보인다.
▲ 어딘지는 잊었다. 산수유가 빨간 열매를 수북히 달고 있다. 2016년 10월.
▲ 2022년 11월 말, 완전히 빨갛게 익은 산수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 구미시 원호리 초등학교 담장 너머 산수유 군락에 산수유 열매가 다닥다닥 달려 있다.
▲ 우리 아파트 뒤쪽 담장 앞에 선 산수유. 빨간 열매가 곱게 익었다.

좀 민망한 얘기지만, 나는 초임으로 교단에 선 스물아홉 살 때까지 산수유를 모르고 지냈다. 물론 이름조차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산수유가 어떻게 생긴 나무인지조차 몰랐었다. 당시 <고교국어> 1학년 교과서의 첫 대단원에 실린 김종길의 시 ‘성탄제’에 산수유 열매가 등장한다. 고열로 앓아누운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화자는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 그 붉은 산수유 열매─’를 노래하는 것이다.

 

그 시를 가르친 때가 3월이었으니, 살펴보면 주변에 산수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찾아본 기억이 전혀 없으니 나는 얼렁뚱땅 산수유를 설명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산수유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두 번째 학교에서 해직되었다가 5년 뒤에 경북 북부지방의 한 시골 학교로 복직하고 난 이후, 마흔을 앞두고였다.

 

시골에서 자랐으니, 주변에 산수유가 없을 리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걸 알지 못하고 자란 건 아무도 그걸 가르쳐주지 않았던 탓이고, 주변의 사물에 무관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산수유를 제대로 알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몇 해 뒤엔 비슷한 노란 꽃이 피는 생강나무와 산수유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관련 글 : 산수유와 생강나무]

▲ 산수유는 약재로 쓰이는데, 차와 술로 개발되어 시중에서 팔리고 있다.

산수유 열매는 씨를 발라낸 뒤 쪄서 햇빛에 잘 말려서 사용한다. 산수유는 두통, 이명(耳鳴), 해수병, 해열, 월경과다 등에 약재로 쓰이며 식은땀, 야뇨증 등에도 민간요법으로 사용된다. 또한, 잘 말린 산수유를 끓여서 차로 마셔도 아주 좋다. 김종길의 시 ‘성탄제’에서 아버지가 따온 산수유 열매는 해열제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과일을 주재료로 술을 담그는 오래된 전통이 산수유를 지나칠 리 없다. 산수유와 소주를 잘 섞어 밀봉하여 3개월 정도 숙성시키면, 붉은빛이 감도는 술이 완성된다. 이게 ‘산수유주’다. 한방에서는 산수유의 신맛이 근육의 수축력과 방광의 조절 능력을 높여 주어 정력 소모로 인한 원기 부족, 식은땀, 요통, 조루, 발기부전, 몽정, 유정(遺精), 이명, 요실금 치료에 효과를 발휘한다고 본다. 그래서 산수유주는 장복하면 정력 증진에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약술’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산수유를 단지 꽃과 풍경으로만 즐긴다. 인근 의성 화전리만 해도 3월 말에서 4월 초에 걸쳐 열리는 산수유 축제엔 화전리 주변 도로가 막히고, 길가에 댄 자동차가 끝없다. 의성 사곡엔 길을 가다 잊을 만하면 눈에 띄는 나무, 마을 들머리나 산 중턱에 마치 아지랑이처럼 화사하게 꽃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은 모두 산수유다.

 

그 중 사곡면 화전리(花田里) 일대는 옅은 파스텔 색조의 노란 산수유꽃의 행렬이 십여 리가 넘게 이어진다. 특히 화전 2리 숲실마을은 주말이면 상춘객과 사진기를 둘러멘 도회 사람들로 차고 넘친다. 뒤늦게 축제를 꾸린 의성이 그럴진대 앞서간 전남 구례군 산동면과 경기 이천시 백사면 일원에서 베풀어지는 산수유 축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관련 글 : 의성 화전리, 산수유 꽃그늘이 지키는 마을]

 

통통하게 살이 오른 산수유의 수확은 대부분 11월 말까지 이루어진다. 햇볕에 말리거나 온돌방에서 약 4일간 말린 뒤 씨를 발라내어 2차 건조 과정을 거친다. 건조 과정에서 윤기가 흐르는 짙은 붉은색으로 변하며, 단맛과 신맛으로 사람들의 미각을 사로잡게 되는 것이다.

▲ 아파트 앞쪽 담장 옆에 선 산수유 나무에 열린 열매들. 푸른 놈에서부터 농익은 놈까지 다 보인다.
▲ 구미시 동락공원에서 만난 산수유.
▲ 구미시 동락공원의 산수유. 아직 때가 일러 익은 정도가 다른 산수유가 한 가지에 달려 있다.

꽃이 지고 난 다음에 산수유에 눈길을 주기는 쉽지 않아서 나는 그동안 초봄에 산수유가 꽃눈에서 꽃망울로, 꽃으로 화사하게 필 때까지를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얼마 전 동락공원에 갔다가 한참 익어가는 산수유를 보았다. 돌아와 현관으로 들어서다가 문득 생각나 앞쪽 담장 가 산수유 열매를 살펴보니, 아직 푸른 놈, 조금 익어 발그레해진 놈, 그리고 빨갛게 익은 놈 등이 어우러져 있었다.

 

뒤쪽 담장 쪽에도 가보니, 상황은 비슷했다. 앞쪽보다 햇볕을 많이 받아서인지, 가지는 비슷한데도 열매가 다닥다닥 달렸다. 이 열매는 온전히 익으려면 한 달 넘는 시간이 필요할 터이다. 몇 해 전 고아읍 원호리 원호초등학교 담장 뒤쪽에서 완전히 익은 산수유 군락을 본 때가 11월 말께였다. 

▲ 아파트 뒤편 담장 앞의 산수유. 아무도 따가지 않는 산수유 열매는 가지에 달린 채 해를 넘긴다.
▲ 수확철에 따지 않은 산수유 열매는 가지에 매달려 겨울을 나고 다음해 꽃이 필 때까지 달려 있다. 2010년 3월, 의성 화전리.

그러나 관상수로 심은 산수유의 열매는 아무도 따지 않는다. 한겨울에 잎이 모두 떨어져도 산수유 열매는 가지에 달려 있다. 시 ‘성탄제’에서 아버지가 한겨울에 산수유 열매를 구해올 수 있었던 이유다. 산수유 열매는 해를 넘기며 새 꽃이 필 때쯤이면 기름이 빠져 쪼글쪼글한 형태로 지난해를 환기해 준다. 그래서 초봄에 화사하게 핀 산수유꽃 아래 드문드문 달린 지난해의 산수유는 마치 화려했던 지난 젊음의 쓸쓸한 초상 같기도 하다.

 

조그만 가지에 다닥다닥 열린 산수유 열매를 바로보면서 2023년, 또 한 해의 조락을 가늠해 본다.

 

 

 

2023. 10.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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