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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이팝나무, ‘가로수’의 진화

by 낮달2018 2020.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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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의 이팝나무 가로수 

▲ 구미시 봉곡동 거리의 이팝나무 가로수 . 이팝나무는 다 자라면 높이는 15~25m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

‘가로수’라고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건 어린 시절 고향의 신작로 길 양옆에 나란히 서 있던 버드나무다. 그것은 황석영의 단편 ‘삼포 가는 길’에 나오는 ‘차도 양쪽에 대빗자루를 거꾸로 박아 놓은 듯한 앙상한 포플러’였다. 여름이면 이 버드나무는 무성해진 가지에 매미의 합창을 끼고 살았다.

 

일제 강점기 때 심은 게 분명한 버드나무 가로수는 지금은 흔적도 없다. 길은 더 넓어졌고, 단단하게 포장되었으며 선명한 교통표지판과 가로등 따위가 가로수를 대신하고 있다. 시골길에서 가로수가 사라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다.

 

가로수, 연봉 6천 원으로 세운 ‘도심의 녹색 댐’

 

농작물에 그늘을 지운다, 가로수 때문에 교통사고의 피해가 치명적으로 커질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미운털이 박히더니 언제부턴가 시골길에서 가로수를 만나는 게 쉽지 않아졌다. 물론 관광지가 되어 버린 벚꽃길이나, 메타세쿼이아 길 같은 유명 가로수 길은 예외다.

 

구글에서 ‘가로수’를 검색했더니 같은 이름의 생활정보지에 관련된 내용부터 죽 뜬다. 그나마 <위키백과>가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의 체면을 세워준다. 가로수를 북한에서는 문화어로 ‘거리나무’라고 한단다. 그것도 괜찮겠다. ‘거리’는 한자어 같지만 순우리말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가로수의 역사는 꽤 오래다. 조선 시대에는 거리(이 ‘거리’는 한자어다.)를 알고자 길가에 나무를 심었다. 5리마다 오리나무를, 10리마다 시무나무를 심은 것이다. 이는 길가에 나무를 심는 주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인데 나라에서 이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로수는 약 140년 전인 조선 고종 2년(1866년) ‘도로 양옆에 나무를 심으라’는 왕명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긴 역사에 비해 ‘대우’는 보잘것없다. 정부의 가로수 관리 예산을 국내 가로수 전체 개체 수로 나눠 추산한 그루당 관리비인 ‘연봉’은 고작 6천 원에 불과하다. [관련 <한겨레> 기사 참조]

 

그러나 가로수 한 그루의 가치는 만만하지 않다. 가로수가 있는 도로는 평균 2.6~6.8℃ 낮은 온도를 나타낸다. 습도 또한 평균 9~23%가 높다. 가로수 한 그루는 15평형 에어컨 7대를 10시간 동안 가동하고 하루 4명이 마실 수 있는 산소를 공급하는 것과 같다. 가로수를 가리켜 ‘도심 녹색 댐’이라고 비유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이팝나무꽃 . 흰색으로 원뿔 모양의 취산꽃차례로 달린다 .

길가가 나무가 자라는 데 좋은 환경이 아님은 말할 나위가 없다. 자동차 배기가스에 늘 노출되어 있어야 하고 심어진 땅이 좁은 데다 보도블록으로 덮어버려 숨 쉴 틈이 없는 것도 문제다. 교통신호나 표지판을 가리지 않기 위하여 가지를 쳐야 하는 문제도 있다. 당연히 가로수의 수종 선정에는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 기후에 대한 적응도, 공해에 대한 내성 등도 우선 고려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2005년 말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도로변에 심어진 가로수는 406만 5천 그루, 총연장 거리는 28,878km이다. (산림청 자료) 수종별로는 벚나무가 25%, 은행나무가 24%, 버즘나무(플라타너스) 8%, 느티나무 7% 순이었다.

 

구미로 옮아와 산 지 석 달이 지났다. 바쁘게 살다 보니 주변에는 무심했다. 시골길과 달리 도심에는 가로수가 있다. 그러나 무엇이 바빴는지 그것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는가 보다. 5월 접어들면서 주변의 빛깔은 훨씬 짙어졌다.

 

‘이밥’의 이팝이냐, ‘입하’의 이팝이냐

 

연변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것은 가끔 버스를 타고 출근하면서 누리는 즐거움이다. 구미는 도심 군데군데에 야트막한 산이 끼어 있어서 봄에서 여름까지 거기 드러나는 빛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교외로 나들이하는 것과 진배없는 즐거움이다.

 

주변에서 나날이 바뀌는 빛의 변화를 바라보게 되면서 길가의 가로수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침침한 눈에 비치는 흰 꽃이 인상적인 나무였다. 저게 무슨 나무일까. 주변 동료에게 물어봐도 잘 모른다. 나중에야 그게 이팝나무란 걸 알았다.

▲ 순천 평중리 이팝나무(천연기념물 36호)

우리 동네 주변의 가로수는 모두 이팝나무다. 5월은 이팝나무의 개화기다. 물푸레나뭇과에 속하는 잎 지는(낙엽) 넓은 잎(활엽) 큰키나무(교목)인 이팝나무는 한국·타이·중국·일본 등지에 분포하며 이암나무·뻣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이팝나무는 생태 높이가 20m에 달하는데 국내에서 가장 큰 나무는 순천 평중리의 이팝나무(천연기념물 36호)다.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8m, 가슴높이 둘레 4.6m이다. 나무의 꽃 피는 모양을 보고 농사의 풍흉을 점치며 마을의 ‘신목(神木)’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팝나무는 물이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므로 비의 양이 적당하면 꽃이 활짝 피고, 부족하면 잘 피지 못한다. 물의 양은 벼농사에도 관련되는 것으로, 오랜 경험을 통한 자연관찰의 결과로서 이와 같은 전설이 생겼다. 미신이 아니라 타산지석을 생활 지혜로 삼던 조상의 슬기가 담긴 이야기다.

 

이팝나무란 이름에 얽힌 설은 두 가지다. 꽃이 필 때 나무 전체가 하얀 꽃으로 뒤덮여 이밥, 즉 쌀밥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도 하고, 여름이 시작될 때인 입하에 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立夏木)’이라 하다가 소리 나는 대로 ‘이팝나무’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팝나무가 ‘쌀밥’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어떤 며느리의 한 서린 서러움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다. 나무 이름에 깃든 것은 고단하고 서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민중들의 슬픈 상상력이다. 못된 시어미와 착하고 불쌍한 며느리의 대립은 이 이야기에서도 되풀이된다.

 

옛날 경상도 땅에 어린 나이로 시집온 착한 며느리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시시콜콜 트집을 잡으며 며느리를 못살게 굴었다. 한 번은 큰 제사가 있어 제사에 쓸 쌀밥을 짓게 되었다. 평소 잡곡밥만 짓던 며느리가 모처럼 쌀밥을 지으려니 혹 밥을 잘못 지어서 꾸중을 듣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뜸이 잘 들었는지 알아보려고 몇 개의 밥알을 떠서 먹어 보았다. 그 광경을 본 시어머니는 제사에 쓸 메밥을 며느리가 먼저 먹었다고 하며 온갖 학대를 일삼았다. 그러자 억울함을 견디지 못한 며느리는 어느 날 뒷산으로 올라가 목을 매 죽었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서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을 가득 피워 냈다. 쌀밥에 한이 맺힌 며느리가 죽어서는 나무가 되었다며 동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이팝나무라 불렀다. [기사 참조]

▲ 이팝나무의 개화기는 5~6월, 지금 한창 하얀 꽃이 피고 있어 날마다 이팝나무의 모습은 풍성해진다 .

 

이팝나무는 영어로는 옷감의 장식 술을 뜻하는 ‘프린지 트리’(Fringe tree)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무 이름에도 밥과 쌀을 갖다 붙인다. 이팝나무는 전라도에서는 ‘밥태기’, 경기도에서는 ‘쌀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며느리밥풀 같은 이름에서 보듯 민중들에게는 ‘밥’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5월의 축복, ‘아카시아’ 아닌 ‘아까시’ 향

 

지금 이팝나무 가로수는 바야흐로 절정의 개화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날이 피어나는 꽃으로 나무의 외양이 더욱 풍성해진다. 가까이서 보면 길쭉한 꽃잎이 성긴데, 먼빛으로는 그 모양새가 오히려 화사하다. 가로수로 이팝나무를 선정한 젊은 도시 구미의 선택은 후한 점수를 줘도 될 듯하다.

 

가로수가 끝나는 종점에 내가 사는 아파트가 있다. 창문을 열면 바로 북봉산, 싱그러운 신록으로 성장한 산의 숨결이 느껴진다. 며칠 전에는 퇴근해 집으로 들어오는데 코끝에 강한 향기가 느껴졌다. 아,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아카시아 향기다. 그러고 보니 아파트를 둘러싼 산비탈은 온통 아카시아 하얀 꽃으로 뒤덮였다.

 

심호흡을 하면 그 일체의 잡내가 끼이지 않은 향기는 폐부로 깊숙이 들어온다. 어저께 십몇 년 만에 만난 제자는 아카시아꽃이 한창 필 때 잃은 친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아카시아 향기를 고통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누구나 고유한 기억으로 사물을 떠올리는 것이다.

▲ 아까시나무는 꽃을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무 중 하나다 .
▲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북봉산. 산어귀에 들어찬, 하얗게 보이는 것은 모두 아까시나무꽃이다 .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아카시아’라고 하지만 아카시아(acacia)는 아카시아 속에 속하는 천여 종에 가까운 상록 교목의 총칭으로 주로 열대지방 자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그것은 ‘아까시나무’로 콩아과(Faboideae)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잎은 녹비(綠肥) 효과가 뛰어나 토양을 빨리 기름지게 하므로 우리나라 조림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헐벗은 산을 녹화하는데 아까시나무가 선택된 것은 산성 토양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산사태의 위험이 있는 곳에는 으레 아까시나무를 심은 것도 뿌리의 발달이 강인한 덕분이다. 아까시나무는 뿌리 번식이 강해 둥치를 잘라내도 새순이 돋아 무덤 주변에서는 가장 기피되는 나무 중의 하나다.

 

그러나 아까시나무는 꽃을 먹을 수 있는 데다 아까시나무꽃 꿀을 제공해 준다. 구미 인근에 전국 최대의 아까시나무꽃 벌꿀 밀원지인 칠곡군 지천면 신동재가 있다. 거기 사는, 벌 수염 부문 한국 기네스북 기록자이며 자기 이름의 벌꿀 브랜드를 가진 ‘벌 수염 사나이’도 유명하다.

 

아침저녁으로 느끼는 아까시나무의 싱그러운 향기와 나날이 풍성해지고 있는 이팝나무 가로수로 누리는 이 5월의 ‘호사’는 남부럽지 않은 축복이다. 막히고 꼬인 나라 안의 소식들로 상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역시 날것 그대로의 자연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된다.

 

 

2012. 5. 13. 낮달

 

 

* 취산꽃차례[취산화서(聚散花序)] : 먼저 꽃대 끝에 한 개의 꽃이 피고 그 주위의 가지 끝에 다시 꽃이 피고 거기서 다시 가지가 갈라져 끝에 꽃이 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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