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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풍경

‘조율시리(棗栗枾梨)’의 으뜸 ‘대추’ 이야기

by 낮달2018 2019.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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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呪力) 갖춘 , 제수 과일의 으뜸 ‘대추’

▲ 대추는 꽃 하나에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서야 떨어지는 과일이어서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한가위에 처가에 갔더니 마당 한쪽에 심어놓은 대추나무에 대추가 푸지게 달렸다. 아직 어린나무인 데다 잔뜩 달린 대추 무게 때문에 가지가 휘어질 만큼. 많이 달린 대신 씨알은 잘다. 장모님께선 붉은빛이 돌면 따내야 한다고 하셔서 꼭지 주변이 불그죽죽하게 익기 시작하는 걸 달려들어 얼마간 따 왔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길섶에도 대추나무가 이어졌다. 관리를 제대로 해서인지 씨알로 굵은 놈은 실팍하다. 역시 아직 익으려면 얼마간의 햇볕이 더 필요한 듯했다. 집에 가져온 대추는 대그릇에 담아서 베란다에 내놓았다.

▲ 베란다에 넌 대추. 대추는 생대추는 물론이거니와 말린 것, 씨, 잎까지 골고루 약재로 쓰인다.

대추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떨어지며,
벼 벤 그루터기에 게는 어찌 내리는고.
술 익자 체 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하리.

 

대추나무 가지가 휘도록 달린 대추가 붉게 익어가는 광경은 그것 자체로 풍요로운 가을을 환기한다. 조선 시대 문인 황희(1363~1452)가 가을 농촌의 풍요로움과 여유를 노래한 시조에서 ‘대추 볼 붉은 골’을 노래한 이유일 것이다. 거기다 잘 익은 밤이 떨어지고 추수한 논에는 게가 기어 다니고 마침맞게 술 거르는 데 쓰는 체 장사가 돌아가니 술 한 잔 아니 할 수 없지 않으냐고 시인은 묻는 것이다.

대추는 갈매나무과 대추나무의 열매이다. 한자로는 ‘대추 조(棗)’를 써서 홍조(紅棗)라고 한다. 대추의 원산지는 남부 유럽과 동남아시아라는 설과 북아메리카, 유럽이라는 주장 등이 서로 엇갈린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재배하고 있는 대추는 중국계 대추로 아시아와 유럽 지역, 아메리카 대륙의 중남부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는 온대 낙엽 과수이다.

 

대추나무의 높이는 약 5미터쯤이고 열매는 씨가 단단한 핵에 싸여 있는 타원형 핵과다. 처음에 초록색을 띠다가 9~10월에 적갈색이나 붉은 갈색으로 익는다. 대추는 날로 먹기도 하고 말려서 저장하기도 한다.

 

대추 열매는 달다. 나는 개인적으로 날로 먹는 대추의 단맛이 세상의 모든 단맛의 원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은 어떠한 잡맛도 포함하지 않는 가장 신선하고 싱싱한 단맛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일이라도 어떤 단맛은 넘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또 어떤 단맛은 질리게 하기도 하니 말이다.

 

“대추 세 개로 한 끼 요기를 한다.”는 옛말이 전하는데 이는 대추가 배고픔을 달래는 대용식으로 쓰였음을 말해준다. 대추는 설기와 증편을 비롯한 떡, 삼계탕과 대추 전병, 대추차, 별식으로 먹는 찰밥 등의 일반 음식에도 고명처럼 넣어서 먹는다.

 

대추는 <시경(詩經)>에 올라 있을 만큼 그 재배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대추는 적어도 2~3천 년 전부터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들어와 있었던 거로 추정하는데 김해 양동리 가야 유적지에서 나온 청동거울에 ‘대추 문양’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대추에 관한 역사적 기록으로는 고려 문종 33년(1079)에 송나라에서 보내온 1백 가지 의약품 중에 대추가 포함되어 있다는 게 처음이다. 재배 기록은 이보다 1백여 년 뒤인 고려 명종 18년(1188)에 ‘대추나무 등의 과일나무 심기를 독려했다’는 <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도 대추는 밤과 함께 중요한 제사에 썼다는 내용이 전한다.

▲ 익어가고 있는 생대추.
▲ 대추는 조율시리, 제수 과일의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대추는 생대추는 물론이거니와 말린 것, 씨, 잎까지 골고루 약재로 쓰인다. 말린 대추는 속을 편안하게 하고 생대추는 쪄서 먹으면 장과 위를 보하고 살이 오르게 하며 기를 돕는다. 대추 씨는 3년 묵힌 것을 구워 먹으면 복통과 나쁜 기운을 다스릴 수 있다. 잎은 가루를 내어 먹으면 살이 내리고, 즙을 내어 땀띠에 문지르면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력(呪力) 갖춘 대추가 제수 과일의 으뜸이 되다

 

대추의 주술적 힘[주력(呪力)]을 이용한 치료도 널리 행해졌다. 염병이 나돌 땐 대추를 실에 꿰어 사립문에 걸어두거나 대추 씨를 입에 물고 다녔다. 대추의 붉은 색이 축사(逐邪), 나쁜 귀신을 물리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마침맞게도 대추나무엔 가시까지 돋았으니 귀신이 꺼릴 만한 것이다.

 

▲ 액운을 막아준다는 벽조목 도장 ⓒ bebeplus

벼락에 맞아 그을린 대추나무[벽조목(霹棗木)]로 만든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 액운을 막는다는 속신도 있다. 대추나무는 그 재질이 치밀하고 단단하여 방망이나 떡메 등 높은 강도가 요구되는 데에 쓰이는 데다 그 빛깔이 붉은빛이 강하므로 귀신을 쫓는 벽사(辟邪)의 의미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는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그걸 구하는 게 워낙 어려운지라 주변에는 가짜 벽조목이 넘친다. 벽조목 인장이 비싼 이유다. 벼락을 맞은 대추나무는 돌덩이처럼 단단해서 물에 넣으면 금방 가라앉는 것이 진품을 구별하는 기준이라고 하지만 벼락을 맞지 않아도 물에 가라앉은 나무는 여럿 있다고 한다. 결국, 이 개명한 21세기에도 사람들은 전통적 속신(俗信)으로부터 별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혼인하는 날 새 며느리의 첫 절을 받을 시어머니는 폐백상에서 대추를 집어 며느리의 치마폭에 던져준다. ‘이 풍속에는 남자아이를 상징하는 대추를 통해 아들을 비는 기자(祈子)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세종 때의 ‘혼례의(婚禮儀)’에도 폐백을 드릴 때 대추와 밤을 쓴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보면 이는 매우 오래된 풍속인 듯하다.

 

복숭아를 제상에 올리지 않고 집안에 그 나무를 심는 것도 금기로 여긴 것은 복숭아가 가진 주력, 즉 그 벽사의 힘 때문이다. 그러나 주력을 가진 대추는 마침내 제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일이 되었다. 이 이율배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꽃 하나에 반드시 열매 하나’, 대추는 ‘자손의 번창’을 상징

 

제상에 대추를 올리는 것은 <고려사> 기록(제상 맨 앞줄에 ‘대추, 소금, 마른고기, 흰떡’을 놓는다.)에도 전한다. 조선조에서도 종묘 제례에는 대추가 빠지지 않았고, 과일을 놓는 순서도 조율시리(棗栗枾梨), 혹은 홍동백서(紅東白西)라 하여 항상 대추가 맨 앞이었다. [관련 글 : 차례상에 홍동백서(紅東白西)’는 없다? 차례, 제사 문화를 생각한다]

 

대추가 의례나 풍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일이 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대추는 꽃 하나가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서야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추는 아무리 비바람이 치고 폭풍이 불어도 그냥 꽃으로 피었다가 꽃으로만 지는 법은 없다. 꽃 하나가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서야 떨어진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고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예부터 대추는 충북 보은산이 유명했다. 대추 농사가, 의식은 물론이거니와 혼인 비용까지 해결해 주는 생업이다 보니 ‘삼복에 비가 오면 보은 처녀의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다. 삼복은 대추의 개화 시기와 겹치는데 이때 비가 오면 제대로 수분(受粉)을 못해 대추 농사를 망치기 때문이었다.

 

최근 보은군수가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폄훼하고, 친일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분개한 사람들이 보은 대추 불매운동을 벌이려는 기미가 보이자, 보은 군민들이 ‘보은 대추가 무슨 죄가 있냐’고 항변하는 촌극도 있었다. 그렇다, 대추에 무슨 죄가 있으랴.

 

그 밖에도 경상북도 경산도 대추로 유명하다. 경산시 압량면 금구리는 대추의 명실상부한 으뜸 생산지다. 금구는 전국 생산량의 절반 가까이 출하하는 곳이었지만 농가에 대한 지원 미비, 가격하락 등으로 인해 대추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늘고 있다고 한다.

 

‘대추’가 들어가는 속담도 제법 있다. 여기저기에 빚을 많이 진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이 쓰이고 매우 작고 보잘것없는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콧구멍에 낀 대추 씨’가 쓰인다. 대추나무가 우리 일상과 친근한 나무라는 뜻이겠다.

 

베란다에 말려놓은 대추는 하루가 지나니 단박에 붉은빛이 짙어진다. 막상 가져오긴 했지만, 생대추를 먹는 게 최곤데, 말려서 어디에 쓸까 하는 공연한 걱정을 하면서 연휴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

 

 

2014. 9. 10. 쓰고 2019. 9. 3. 깁고 더함.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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