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건국론’과 맥을 잇는 ‘단절적 역사관’의 민낯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육군사관학교(육사)가 교내 중앙현관 앞에 설치된 독립전쟁 영웅 네 분과 이회영 선생 흉상을 철거해 외부로 옮기고자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신에 육사는 일제 만주군 출신 백선엽 장군의 흉상 설치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은 “국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헌법적 처사”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 홍범도 철거하고 ‘만주군 출신’ 백선엽 흉상 검토…육사의 ‘역사 쿠데타’]
육사의 영웅 흉상을 철거, 국군의 역사적 정통성 부정인가
육사 내에 흉상으로 설치된 독립군‧광복군 장군은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네 분이고, 여기에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까지 모두 5분이다. 이 흉상들은 2018년 제99주년 삼일절을 맞아 우리 군 장병들이 사용한 5.56㎜ 소총 5만 발 분량의 탄피 300㎏을 녹여 만든 것이다.
당시 육사는 탄피를 재료로 흉상을 설치한 데 대해 “총과 실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음에도 봉오동‧청산리 대첩 등 만주벌판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며 조국 독립의 불씨를 타오르게 한 선배 전우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밝혔었다.
당시 문재인 정부 때였는데, 이분들의 흉상을 설치한 것은 독립군 지휘관들이 ‘국군의 시작’이라는 역사를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실제로 해방 후 창군 이래 일본군, 만주군 출신들이 창군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이후 국군의 요직을 차지해 온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었다.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의 군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점령
해군 초대 손원일 참모총장을 제외하면 육군의 초대 참모총장 이응준은 일본 육사를 나온 일본군 대좌 출신이고, 공군 초대 참모총장 김정렬은 일본 항공사관학교를 나온 일본군 대위 출신이다. 해병대 사령관은 초대 신현준, 2대 김석범, 3대 김대식까지 모두 일제 만주군 장교로 독립군을 토벌부대인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관련 글 : 독립군 토벌부대 출신 군인은 어떻게 창군 주역이 됐나]
이승만 정부의 육참총장 8명(중복 3명 포함 11대) 가운데 6명(이응준·채병덕·신태영·이종찬·이형근·송요찬)이 일본군 출신, 2명(정일권·백선엽)이 만주군 출신이었다. 군사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후 18년간 독재를 이어가다 비명에 죽은 박정희도 만주군 출신, 최근 경북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동상까지 세워진 백선엽(1920~2020)은 만주군 중에서도 간도특설대 출신이었다. [관련 글 : 왜 백선엽과 한미 대통령은 6·25 격전지 ‘다부동’에서 다시 만났나]
군의 정예 지휘관을 양성하는 국군의 정규사관학교로서 두 차례 쿠데타(5·16, 12·12)의 주역(박정희, 전두환)을 낳았고, 군사 반란에 가담하여 하극상과 군기를 문란케 한 군내 사조직의 구성원들을 양산한 것만으로도 육사의 명예는 더럽혀졌고, 그 역사와 전통은 누더기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 뜻에서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의 영웅들과 육사의 뿌리로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육사 교정에 설치한 의미는 충분하다. 그런데도 불과 7년 만에, 이 흉상을 외부로 옮기려고 검토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연속성과 무관하게 ‘정권의 교체’ 때문이라는 이유 외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육사는 “2018년 설치된 독립군‧광복군 영웅 흉상은 위치의 적절성, 국난 극복의 역사가 특정 시기에 국한되는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 왔다고 본다. 그래서 “흉상을 다수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곳으로 이전하기 위해 최적의 장소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또 국방부 장관은 “공산주의 경력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됐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는 독립 투쟁 당시 소련 영내서 활동한 홍범도 장군을 지칭하는 듯하다.
전임 정부에서 정립한 ‘육사의 정체성’이 마뜩잖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긴 하지만, 이는 결국 전임 정부에서 시행한 육사의 정체성 정립이 마뜩잖다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국가보훈부는 대전현충원 누리집의 백선엽 예비역 대장 안장 기록에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2009년)’이라고 적은 문구를 일방적으로 삭제했다. 이는 “백선엽 장군이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객관적 자료는 없다”라면서, 백 장군이 친일이 아니라는 데에 장관직까지 걸겠다는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주도했다.
군 관련 소식통은 “육사에 백선엽 장군의 흉상 설치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라고 했는데, 육사 관계자는 “여러 인물에 대해 검토 중”이라며 “검토 기준은 육사의 정체성과 설립 취지를 구현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 및 한‧미동맹의 가치와 의의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홍범도 장군, 우당 이회영, 신흥무관학교, 백야 김좌진 장군 등 각 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은 육사가 흉상을 철거해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전시 또는 보관할 수 있는지 검토 요청을 했음을 확인했다. 이어서 “독립전쟁의 역사를 지우려는 윤석열 정부의 시도를 당장 멈추라”라고 이 조치에 대한 비판에 나섰다.
육사의 움직임은 굳이 그 속내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8·15해방 이후를 건국으로 보는 보수와 극우세력의 역사관과 맥을 같이한다. 해방 후 정부 수립부터 계산하면, ‘친일 부역의 역사’를 환기하지 않아도 되니만큼 ‘이전 독립 투쟁의 역사’를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홍범도’를 철거하고 ‘백선엽’을 검토한다는 것을 ‘육사의 쿠데타’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빛나는 승리, 독립전쟁 3대 대첩
독립전쟁의 3대 대첩은 더 볼 것 없이 ‘봉오동 전투’(1920)와 ‘청산리 전투’(1920), ‘대전자령 전투’(1933)고 그 주역은 각각 홍범도, 김좌진·이범석, 지청천 장군이다. 이들 전투에서 독립군은 무기와 장비는 물론, 훈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일본군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20년 6월, 일본군 제19사단은 독립군을 추격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편성하고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군해 왔다. 이미 사전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1868~1943)는 700여 명의 연합 독립군 부대를 지휘하여 310여 명의 일본군을 화룡현 봉오동에서 공략하여 적 150여 명을 살상하여 패주하게 하는 대승을 거두었다.[관련 글 :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에서 지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각 부대가 처음으로 연합하여 간도에 침입한 대규모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 의미가 컸다. 이를 계기로 독립군과 간도 지역 동포들의 사기가 높아졌고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지난날의 의병 항쟁에 이은 이 승전은 홍범도의 명성을 국내외에 크게 높였다. 5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주·노령(露領) 지역 독립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해 주었다. 이 승전의 기운은 넉 달 후,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이어졌다.
봉오동에서 뜻밖의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여러 지역에 주둔하던 부대를 동원하여 독립군을 포위, 공격해오게 된다.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군은 청산리에서 근처의 백운평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김좌진은 지형 조건을 활용하여 제1제대를 후방에,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는 제2제대를 최전선에 배치하고 일본군이 매복지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를 모르는 일본군은 독립군이 매복한 곳까지 다가왔고, 이때 300여 명의 독립군이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중무장한 일본군 부대는 몇 차례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은폐 사격을 하는 독립군을 당할 수 없었다.
한편, 같은 날 오후 완루구 지역에서는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가 일본군 4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약 일주일 동안 1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은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이 간도로 출병한 일본군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빛나는 승리였다. [관련 글 : 청산리 전투, 큰 승리로 막을 올리다 / 1930년 오늘 - 청산리의 김좌진, 흉탄에 스러지다]
이범석(1900~1972) 장군은 쑨원의 육군강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북로군정서에서 중대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그 뒤 소련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관련 글 : 충칭에서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 포고하다]
대전자령((大甸子嶺)은 지금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汪淸)현 일대의 고개로 계곡 길이 5km 정도 이어지고 고갯길 양쪽 길가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진 천연의 매복지였다. 1933년 6월 총사령 지청천(1888~1957)이 이끄는 5백여 명의 한국 독립군은 길림 구국군이란 이름의 중국 항일의용군 2천여 명과 함께 1300여 명의 일본군 정규군(간도 파견군)을 매복 공격했다. 군수물자를 잔뜩 싣고 이동하고 있던 일본군 이즈카(飯塚) 연대는 4시간 만에 거의 궤멸하였다. 4시간의 격전 끝에 연합군은 군복 3천 벌, 대포와 박격포 10문, 소총 1천 5백 정, 군량 등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의 항일전 사상 최대의 승전이었다. 이전까지 주로 만주국군을 상대로 싸웠으나 이 전투는 정규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대규모 작전이었다. 총사령관 이청천은 구한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가 강제 병합 뒤 동경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졸업한 이니 그는 일본 육사에서 배운 대로 일본군을 궤멸시킨 것이었다. [관련 글 : 4시간 만에 일본군 궤멸시킨, 일본육사 출신 독립군 대장 / 대한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장군 급서하다]
우당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독립군의 산실 ‘신흥무관학교’
우당 이회영(1867~1932) 선생은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 출신이었지만 나라의 위기 앞에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한 이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망명을 결심한 우당 일가(6형제 일가족 40여 명)는 비밀리에 전 재산을 처분하여 약 40만 원의 거금을 마련하였다. 쌀 한 섬이 3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으니 이 돈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우당 일가는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뒤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폐교(1920)될 때까지 2,1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이 청산리전투의 대첩과 친일 주구배주살 등 독립 전선 각 분야에서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만주로 망명하여 6형제가 항일투쟁을 벌이면서 수백억의 재산은 사라졌고 그는 끼니도 못 이어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살다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의 형제 조카들은 모두 10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고, 그의 부인인 김은숙 여사도 최근 서훈을 받았다. 우당과 그 일가는 식민지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상징이다. [관련 글 : 우당 이회영,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다]
이들의 삶과 투쟁 앞에 뒷사람들은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이들의 분노와 용기, 결단과 투쟁이 쓰러진 나라를 일으켜 광복의 시간을 자아냈다. 이들이 흉상으로나마 호국의 간성을 기르는 육군사관학교 교정에서 후예를 이끌어가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거룩한 일이다.
현 정부의 퇴행과 굴욕적 대일 외교, ‘국익’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지금 윤석열 정부는 대법원판결로 확정된 일본 전범 기업의 배상 의무를 무시하고 ‘제3자 변제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금을 대납하는 방식을 고집함으로써 유족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심지어는 정부의 배상금을 받더라도 ‘채권자가 동일하게 금전 채권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논리조차 서슴지 않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어제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제1원전에 보관 중인 방사능 오염수의 바다 방류를 시작했다. 2011년 3월 원전 폭발 사고로 인해 발생한 방사능 오염수(134만t)를 향후 30년 이상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에 정부는 사실상 찬성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어민과 수산업자 등 관련 국민은 물론, 소비자들까지도 ‘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고민에 빠뜨렸다.
국민의 민족 감정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권력과 집권당의 이해에 맞춰 이루어지는 이 일방적이고 무책임한 대일 외교는 대일 외교 정상화라는 포장으로 성찰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친일 반민족행위 관련한 보수세력의 입장과 맥을 같이하면서, 주권자의 민족적 자긍심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있다.
이러한 모든 외교 행위, 국내 정치적 결정 등이 궁극적으로 누구의 이익과 무엇을 위한 일인지 국민은 묻고 있다. 이는 철 지난 색깔론에 기울어지고, 보수적 퇴행을 거듭하는 시정을 삼가고 ‘진정한 민족과 국익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성찰하라’는 강력한 요구다.
2023. 8. 26. 낮달
* 결국 육사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를 결정했다.
[관련 기사 : “육사 홍범도 흉상 철거” 국방부에도 홍범도 흉상 있다]
'이 풍진 세상에 > 길 위에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토(關東)대학살’ 100년 <은폐된 학살, 기억하는 시민들> (27) | 2023.08.31 |
---|---|
‘한일신협약’, 입법·행정권에다 비밀 각서로 ‘군대 해산’ 등까지 담았다 (20) | 2023.08.30 |
왜 백선엽과 한미 대통령은 6·25 격전지 ‘다부동’에서 다시 만났나 (8) | 2023.08.19 |
‘맨발 걷기’, 혹은 ‘접지(earthing)’를 시작하다 (4) | 2023.08.12 |
이 사람, 국민권익위원회 전현희 위원장 (4) | 2023.06.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