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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우당 이회영,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다

by 낮달2018 2019. 11. 16.

[역사 공부 ‘오늘’] 1932년 11월 17일 – 이회영 뤼순 감옥에서 순국

▲ 우당 이회영 선생은  1932년 11월 17일, 다롄 뤼순 감옥 36호 감방에서 순국했다. ⓒ 김태빈

1932년 11월 17일, 예순여섯의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이 중국 다롄(大連)의 뤼순(旅順) 감옥 36호 감방에서 눈을 감았다. 11월 5일, 상하이에서 영국 선적의 남창호(南昌號)로 다롄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된 지 12일 만이었다.

 

다롄경찰서에서 열흘 넘게 혹독한 심문을 받았지만, 그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고 본적지 조회조차 거부했다. 그의 유해를 모시러 간 딸 규숙에 따르면 그의 안면을 확인하니 ‘선혈이 낭자하였고 타파오(大袍, 중국 의복)에도 선혈이 많이 묻어 있었다’.

 

우당이 상하이를 떠나 다롄으로 향한 것은 만주의 연락 근거지 확보와 지하공작 망 조직, 주만(駐滿) 일본군 사령관 암살 등 아나키스트의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였다. 동지들은 당시 일본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 있던 만주는 위험하다고 말렸으나 그의 의지는 단호했다.

 

“나는 살 만큼 살았고, 이제 남은 것은 동지들에게 이 늙은이도 항일전선에서 끝까지 싸웠음을 알리는 것이다.”

 

우당이 순국한 뒤, 상하이의 무정부주의 단체 남화(南華) 한인 청년연맹(남화연맹)은 우당이 밀정 때문에 희생되었음을 확인하고 이를 추적했다.

 

이태공과 연충렬이라는 자가 범인임을 확신한 동지 정화암(1896~1981)과 백정기(1896~1934), 엄형순은 유인한 이들의 자백을 받고 상하이 입달학원과 정거장 사이의 벌판에서 이들을 처단했다. 그것이 조국을 배신한 밀정들을 처리하는 당대의 방식이었다.

 

▲ 상하이에서 다롄에 온 우당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다롄 수상경찰서의 현재 모습. ⓒ 김태빈

우당 이회영은 서울 출신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조선 제일이란 뜻의 ‘삼한갑족(三韓甲族)’ 출신이었지만 나라의 위기 앞에 그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봉건적 인습과 계급적 구속을 타파했다.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기도 했고, 남의 집 종들에게는 터무니없게도 경어를 썼다. 당시의 양반들이나 판서의 집안으로서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당치 않은 짓’이었다.”(권오돈)

 

삼한갑족 출신의 아나키스트

 

그는 청상과부가 된 누이를 개가시키기 위해 여동생을 죽은 것처럼 거짓 장례를 치른 뒤에 개가시켰다. 또 첫 부인과 사별한 뒤 재혼하면서 상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결혼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그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거침이 없었다.

 

우당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이갑·전덕기·양기탁·이동녕·신채호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이동녕·이승훈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 간부 회의를 열어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망명을 결심한 우당 일가는 비밀리에 전 재산을 처분하여 약 40만 원의 거금을 마련하였다. 쌀 한 섬이 3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으니 이 돈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에 이르는 거금이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일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월남 이상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우당 일가’

 

우당 일가는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뒤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 우당 이회영과 함께 활동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동지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그는 상해보다는 베이징에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정화암 등과 교유하면서 그는 아나키즘의 세례를 받았고 1924년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이회영은 정화암, 백정기, 중국인 왕아초, 일본인 아나키스트 전화민 등과 함께 상하이의 어느 건물 지하에 모여 항일 구국연맹을 결성, 의장에 추대되었다. 구국연맹은 일본 측 기관 기물의 파괴를 목적으로 하며 기획, 선전, 연락, 행동 등 부서를 두는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였다.

 

이회영의 지휘로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유기문 등 흑색공포단의 단원들은 중국 국민당 당내의 친일 그룹의 리더 왕정위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대신 그의 부관을 사살하였으며, 아모이(厦門)에 있던 일본 영사관을 폭파했다.

 

1932년 1월에는 흑색공포단원을 톈진(天津)에 파견, 톈진부두의 일본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폭파하고, 톈진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여 영사관 건물과 시설 일부를 파괴하였다. 단원들은 아무도 체포되지 않고 거사를 성공리에 수행했다.

 

1932년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여 지원 약속을 받아낸 우당이 상하이를 떠나 다롄으로 떠난 것은 중국 동북부에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고 관동군 사령관 무토(武藤) 대장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길은 그의 마지막 여정이 되었다.

 

일제는 고문을 숨기려고 자살설 등을 유포했지만 뒷날, 중국 항일운동가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뤼순 감옥에서 재판도 거치지 않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관련 기록은 우당이 다롄경찰서에서 순국한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처형이든 옥사든 그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 뤼순 감옥박물관에는 그가 복역한 감방에 선생의 약력과 뤼순 감옥에 투옥돼 옥사하기까지 경위를 설명한 패널이 걸려 있고 그의 흉상이 전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서울 종로에 세워진 우당기념관. 우당은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우당은 더 볼 것 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상징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6형제가 항일투쟁을 벌이면서 수백억의 재산은 사라졌고 그는 끼니도 못 이어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해방 조국이 그에게 수여한 영예는 고작 3등급(독립장)에 그쳤다.

 

3등급 건국훈장, 훈격 상향 조정이 필요하다

 

유관순 열사도 3등급이고, ‘임정의 안주인’이라 불린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 여사는 최하등급인 5등급(애족장)을 받았다. 그에 비해 이승만의 비서 출신인 임병직은 김구, 안중근, 윤봉길 의사와 동급인 1등급(대한민국장)을 받았으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훈격이다. 독립운동가의 훈격을 상향 조정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우당 이회영은 명문거족의 자손으로 태어나 스스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온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아나키스트가 되어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했다. 그의 생애를 아나키즘 연구자 하기락 교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의 우당 이회영 묘.

“민족주의 태내(胎內)에서의 무정부주의의 성장, 그 사상적 성숙, 그 투쟁 단계, 그리고 전시(戰時)의 전투체제로의 전환 등의 과정을 우리는 우당이라는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읽어낼 수 있다. 우당의 최후는 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장렬한 산화였다.”

2017. 11. 16.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김태빈, <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레드우드, 2017)

· 이덕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웅진닷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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