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07년 7월 24일- 대한제국, ‘한일신협약’으로 입법·행정권 빼앗기다
1907년 7월 24일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1856~1926)과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통감 관저에서 ‘한일신협약’을 체결했다. 전체 7개 항목의 이 조약으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하에 법령의 제정과 중요 행정상의 처분 등 모든 사무에 대해 승인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대한제국 정부는 입법·사법과 고등 관리의 임면 등 대한제국 주권인 입법·행정권을 고스란히 빼앗긴 것이었다.
입법 ·행정권을 고스란히 빼앗긴 한일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 ‘정미 7조약’ 등으로도 부르는 한일신협약은 ‘시정개선’을 위해 통감이 지시하는 사항을 따르며, 관리의 임용과 추천도 통감이 할 수 있도록 하여 일본인들을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할 수 있는 길도 열어놓은 명백한 불평등조약이었다.
고종 황제는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1870~1917), 이위종( 1887~1924), 이준(1859~1907) 등 세 명의 특사를 파견하였다. 특사 일행은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주최국 네덜란드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이양한 을사늑약(1905)을 이유로 회의 참가를 거부했다. 이 무렵, 이미 특사의 존재는 그들이 접촉한 열강 측을 통해 일본에 통보되어 있었다. [관련 글 :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밀사 이준 분사하다]
7월 12일, 일본 정부는 이토의 요청으로 한국의 내정 전반을 장악한다는 ‘대한처리방침’을 결정한 후 이토에게 전달하였다. 세부적인 장악 방침은 두 가지 안으로 정리하였는데, 이를 접수한 이토는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8가지 항목으로 만들었다.
7월 23일 이토는 준비한 안건을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부 대신 송병준(1857~1925) 등에 보여준 후, 다음 날 조약을 체결하는 절차로 들어갔다. “한국 황제 폐하의 조칙은 미리 통감에게 자순(咨詢: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의견을 묻고 의논함)할 것”이란 내용은 고종에게 다그쳐 동의받기 어렵다고 하여 삭제하였다. 나머지 항목은 ‘정미 조약’ 제1조부터 제7조까지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고, 제4조에서 ‘한국 관리’가 ‘한국의 고등 관리’로 어구가 약간 수정되는 정도에 그쳤다.
제1조는 통감의 지도를 받아 대한제국 정부가 ‘시정개선’을 하도록 함으로써 통감이 내정 일반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2조는 통감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법령을 제정하고 행정 처분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대한제국의 입법권과 행정권에 제약을 두는 조항이었다. 제3조는 사법과 행정사무를 분리한다고 하였는데, 세부적인 사항은 신설 재판소를 설치하고, 일본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이는 사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조항이었다.
제4조는 통감의 동의를 얻어 고등 관리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이로써 황제의 인사권을 제한하고, 통감을 따르는 일본인들을 고위직에도 배치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제5조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대한제국의 중앙과 지방 관청에 임용할 수 있도록 하여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을 통감부에서 상세히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조항이다. 제6조는 통감이 동의하지 않는 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새롭게 외국인을 고용하지 못하게 한 조항이다.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처럼 대한제국의 처지에 동조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반일 여론을 조성하는 외국인이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토는 고종을 알현해 “밀사를 파견하는 행위는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적의를 발표한 것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포고할 권리가 있다”라면서 밤을 새워 고종의 양위(讓位)를 협박했다. 어전회의에서도 고종을 도울 신하는 없었다. 뒤에 ‘정미7적’으로 불리게 되는 송병준과 이완용은 “헤이그 밀사 사건의 책임은 폐하께 있습니다. 친히 도쿄로 가서 천황께 사죄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대한문 앞에서 맞아 면박의 예를 다하십시오. 이 두 가지를 차마 못 한다면 일본이 선전(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협박하고 나섰다.
심지어는 “폐하가 자결해야 국가가 살 것”이라는 발언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송병준에게 “경은 누구의 신하냐”고 책망한 뒤 내전으로 들어갔다. 결국 7월 19일 황태자가 ‘군국대사(軍國大事:군사상의 기밀과 국가에 대한 아주 중요한 일)’를 대리한다는 고종의 조칙(詔勅: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이 나왔다. 서울에서 양위에 대한 반발이 빗발치자, 주둔 일본군은 궁궐 주변의 경계를 강화하였다.
다음 날(7.24.) 아침 일제는 경운궁 중화전에서 황제가 나오지 않은 채 양위식을 거행하여 광무 황제의 퇴위를 기정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양위식에는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는 고종도, 이어받을 순종도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을 거부한 신구 황제 대신 환관 둘이 대역으로 동원되어 용상에 앉았고, 대신들이 하례를 올리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촌극이었다.
‘한일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비밀리에 체결
같은 날, 이완용과 이토는 ‘한일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비밀리에 체결하였다. 이토는 ‘군대 해산’ 등의 극히 민감한 내용이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체결한 각서 원본을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하야시 다다스(林董, 1850~1913) 외무대신이 직접 휴대하고 귀국하도록 하였다.
각서는 대심원, 공소원, 지방재판소 등 재판소와 감옥의 신설과 일본인 간수 고용, 군대 해산, 각부 차관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 관청의 일본인 관리 고용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이로써 통감의 지도를 받는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각 부서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토는 이른바 ‘자치 육성 정책’의 추진을 표방하였지만, 이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정책이었을 뿐, 대한제국의 황제와 일반 대중을 위한 정책의 시행은 결코 아니었다.
군대 해산으로 봉기한 대한제국 군인들의 항전
정미조약은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1907년 7월 25일 자 <관보(官報)>로 고시되었다. 하지만 체결 당시부터 ‘전권 위임장, 황제의 비준서 등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조인 후에 보고된 조약을 일본 정부에서도 추밀원 회의 등을 통해 사후 승인하였다는 점’에서 절차상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7월 31일, 군대를 해산한다는 조칙이 내려졌고, 8월 1일부터 9월 3일까지 8천 명이 넘는 대한제국 군인들이 강제적으로 해산을 당하였다. 8월 1일, 일제가 군대 해산식을 강행하자 크게 분개한 대대장 박승환(1869~1907, 1962 대통령장)은 유서를 쓰고 권총으로 자결했고, 이는 군인들의 봉기로 이어졌다.
특히 남대문과 창의문 일대에서 벌어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의 저항은 한국 군인들의 항일 투쟁 중 가장 빛나는 것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진압에 나선 일본군 3개 대대 병력에 맞서 무려 4시간 이상이나 장렬한 전투를 이어갔고, 이들의 항전은 지방 진위대의 해산 시에도 거듭되었다.
원주 진위대 특무 장교 민긍호(1865~1908, 1962 대통령장)는 부대의 전 병사 250명을 지도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며 이후 관동 의병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군대 해산은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뜻하는 비극적 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완강히 저항했으나 진압되었으나, 해산된 각지의 군인들은 의병부대에 합류함으로써 항일무장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갔다.
2023. 8.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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