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943년 10월 25일-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떠나다
1943년 오늘,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크즐오르다 시 쓰체브나야 거리 제2번지 자택에서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洪範圖, 1868~1943)가 파란 많은 삶을 마감했다. 함경도 주민으로부터 ‘총알로 바늘귀도 뚫는 사람’으로 알려진 ‘산 포수’ 출신이었지만 기민한 유격 전술로 일본군을 연파하면서 일본군에게서는 ‘나는 장군[비장군(飛將軍)]’으로 불리었던 항일 무장투쟁사의 전설적 영웅의 임종은, 그러나 쓸쓸했다.
봉오동(1920)과 청산리(1920) 전투의 대승을 이끌었지만, 나라 잃은 독립투사에게는 승리를 즐길 여가조차 주어지지 못했다.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제는 간도 일대의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하여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을 학살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 개소의 학교를 불태우는 ‘간도 학살’(경신참변)을 자행했던 것이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카자흐스탄에서 지다
만주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진 독립군부대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장기전을 준비하기 위해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옮겨갔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독립군끼리 총을 겨누는, 한국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불상사라고 일컬어지는 자유시 참변(흑하사변, 1921)을 겪어야 했다.
참변 후 이르쿠츠크로 옮겨간 홍범도 부대는 소비에트 적군(赤軍)에 배속되었고 홍범도는 적군 내 한인 빨치산(의용군)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독립군 사령관을 자임하고 있었던 홍범도로서는 일본군과 싸우지 못하게 된 상황이 오히려 치욕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뒷날 홍범도는 레닌을 만나고 소련공산당(볼세비키)에 입당(1927)하였지만 다시는 전선에 서지 못했다. 그는 연해주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콤비나트(집단농장)와 콜호즈(농업협동조합)의 관리자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탈린의 한인 정책에 따라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되어야 했다.
1943년 10월 25일에 눈을 감을 때까지, 자청한 일이긴 했지만, 홍범도는 크즐오르다의 조선극장의 수위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비록 칠순을 넘긴 노인이긴 했지만, 한때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독립투사의 말년은 쓸쓸했다. 그는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파란의 70 평생을 마감했다.
민중의 영웅, ‘날으는 장군’ 홍범도
홍범도는 평양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다섯 살 때 나이를 속여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하여 3년간 복무하였다. 황해도 수안의 종이공장에서 일하다가 주인과 다투고 거기를 떠나 금강산 신계사로 들어가 지담대사의 상좌가 되었다. 이때 후일 아내가 된 단양 이씨를 만났다.
그는 처가살이하며 농사를 짓고 틈틈이 사냥을 했다. 지역의 울창한 삼림에는 맹수들이 적지 않아 주민들은 호환을 두려워해 스스로 수렵에 나서기도 했다. 홍범도는 뛰어난 사격술로 포연대(捕捐隊)라는 직업 포수들의 동업조합에 가입하게 되고 곧 동료들의 신망을 얻어 포연대장이 되었다.
홍범도가 항일투쟁을 시작한 것은 1907년, 북청 안평사(安坪社) 엄방동에서 주로 산 포수로 구성된 의병부대를 조직하면서다. 같은 해 11월, 포수들의 총을 압수하여 북청으로 반출하는 일본군 일행을 후치령(厚峙嶺)에서 습격하여 다수의 일본군을 살상하고 무기를 노획했다.
이후 1911년까지 홍범도가 치른 의병 활동은 눈부시다. 그는 북청 장항리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고, 이듬해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갑산읍으로 진격하여 9시간 동안 읍내를 점령하면서 ‘날으는(나는) 홍범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1900년대 초 함경도 주민들이 그를 칭송하여 부르던 민요의 한 소절이다.
“홍 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량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 군대가 막 쓰러진다.”
이후, 일제에 아내를 잃은 홍범도는 함흥, 북청, 안변, 정평, 무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60여 회 전투를 벌이며 적지 않은 승리를 거두었다. 1908년 말에 국경을 넘게 된 홍범도 부대는 1910년에는 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의 ‘13도의군’ 조직에 참여하게 되고 이상설의 주도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성명회(聲名會)에 참여하여 일본의 한국 병탄을 성토했다. 산 포수 출신의 의병장이 마침내 독립투쟁의 지도자로 부상한 것이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독립운동단체 권업회의 창립을 주도하여 부회장에 선임된 홍범도는 농사와 수렵에 종사하며 무력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독립군 단체들의 함북 온성 일대 진입작전을 주도하면서 그의 무장투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1920년 5월, 홍범도는 안무의 국민회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 북로 제1군 사령부를 맡았다. 6월 7일, 홍범도는 700여 명의 연합 독립군부대를 지휘하여 310여 명의 일본군을 화룡현 봉오동에서 공략하여 적 150여 명을 살상하여 패주하게 하는 대승을 거둔다. 이 싸움이 봉오동 전투다.
6월 4일, 홍범도 부대와 최진동 부대의 예하 1개 소대가 각각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三屯子)를 출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 지대를 기습 공격하여 몰살시켰다. 후속 봉오동 전투의 도화선이 되는 이 전투를 따로 삼둔자 전투라고 한다.
일본군 남양수비대의 반격전이 전개되자, 독립군 연합부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에 매복시키고, 약간의 병력을 고지대에 배치해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인하였다. 6월 6일, 일본군이 잠복해 있는 독립군부대 앞까지 추격해오자 독립군은 100m 안팎의 산악 고지에서 일제사격을 퍼부어 일본군 1개 중대 병력 60명을 사살하였다.
독립군 연합부대의 승전, 봉오동 전투
일본군 제19 보병사단장이 야스카와 지로(安川二郞) 소좌가 지휘하는 월강(越江) 추격대대를 출동시키자 독립군 지휘부에서는 유리한 전투 지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병력을 산꼭대기에 배치하여 시야를 확보하고 일부 병력은 후방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게 한 것이다.
야스카와의 일본군은 6월 6일 밤부터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 6월 7일에 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에 이르렀다. 한 차례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 물러났던 월강 대대는 대오를 정비하여 당일 오전 11시 30분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여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안에 들어왔다.
추격해 온 일본군이 봉오동 골짜기 안 포위망에 들어오자 오후 1시부터 홍범도의 사격 개시 명령에 따라 3면에서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고 서너 시간 동안 치열한 교전이 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날이 흐려지더니 소나기와 우박이 퍼붓고 천둥 번개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어 골짜기는 더욱 어두워졌다.
이 기상악화가 독립군을 도왔다. 교전 중 일본군은 아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교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군이 아군끼리 서로 교전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은 오후 늦게 날이 개고 난 뒤였다.
날이 개자 명사수 홍범도의 일식 보총(步銃)에서 발사된 탄환이 일본군의 연대 지휘자를 단박에 거꾸러뜨렸다. 이를 신호로 독립군의 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고 지휘관을 잃은 일본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독립군의 대승이었다.
봉오동 전투의 의미는 단순한 전투 성과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독립군 각 부대가 처음으로 연합하여 간도에 침입한 대규모의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 있었다. 이를 계기로 독립군과 간도 지역 동포들의 사기가 높아졌고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지난날의 의병항쟁에 이은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홍범도의 명성을 국내외에 크게 높였다. 5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만주·노령(露領) 지역 독립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해 주었다. 이 승전의 기운은 넉 달 후,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이어졌다.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뒤 홍범도 부대는 독립군에 대한 합동 수색작전을 펼치는 간도 일본영사관의 경찰부대를 기습했다. 두 시간여의 전투에서 2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기록했는데 이 싸움이 바로 노두구(老頭溝) 전투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한 뒤 국내 진입작전을 펴려 했던 홍범도는 동포 사회에 닥친 일제의 보복(경신참변) 등을 고려해 러시아령 시베리아로 건너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거기 가면 한인 민족운동을 지원하는 러시아 혁명정부의 원조를 받을 수 있겠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로 들어간 한국 독립군은 3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이들은 대한독립단이라는 단일 지휘체계로 정비된다. 홍범도는 부총재로 서일과 함께 이 조직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직은 김좌진과 이범석 등 북로군정서 계열의 일부 독립군이 러시아 원동 정부의 공동 항일투쟁 제안에 반대하여 북만주로 되돌아감으로써 차질이 생겼다.
러시아로 간 백두산 호랑이
그리고 뒤이어 발생한 ‘자유시 참변(흑하사변)’으로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고려공산당의 두 계파 간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자 홍범도는 양파의 갈등을 조정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려혁명 군정 의회를 중심으로 군사단체의 통일을 기하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자 무력으로 이들 독립군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 참변으로 수백 명이 죽고 다치고 포로가 되었다.
군정 의회의 요구를 수용했던 홍범도 부대는 참변을 피했고, 1921년 8월 이르쿠츠크로 가서 소비에트 적군 제5군 직속 한인여단으로 개편되었다.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홍범도는 더는 일본군과 싸우는 독립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후, 은퇴한 호랑이 장군은 시베리아와 연해주 지역의 자상한 농민지도자 노릇을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호랑이 장군으로 기억했던 듯하다. 70세 때 크즐오르다시로 이주한 홍범도는 지역의 조선극장을 찾아가 수위를 자청했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뒤 현역 참전을 원했으나 소련 당국에 거절당한 뒤였다.
조선극장 창시자의 한 사람인 극단 연출가 겸 극작가인 태장춘은 1942년 홍범도의 투쟁경험을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의병들’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던 이 연극은 나중에 ‘홍범도’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관객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고 한다.
노년의 홍범도는 자신의 삶과 투쟁을 재현하는 무대를 바라보면서 행복했을까. 그는 연극이 어땠느냐는 태장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너무 추네, 추어. 허나 연극을 아무리 잘 놀아도 백두산 포수의 백발백중인 총재간이야 뵈어주지 못하지.”
홍범도는 남북한에서 동시에 존경하는 독립군 장군 가운데 제일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만주에 이주해 사는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장군이기도 하다. 그가 살았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한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실천적 투쟁
러시아로 들어가 적군에 편입되고 레닌을 만나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홍범도의 전력에도 불구하고 남한학계에서는 대체로 그를 투철한 민족주의자로 바라본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 연변, 그리고 러시아의 한인 학자들은 그를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전향, 발전한 대표적 사례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출신 성분과 성품, 행적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체계적으로 정립된 사회주의 이론이나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이념에 동조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이념을 무리하게 재단하기보다는 그의 실천적 투쟁으로서의 구국 항쟁의 성격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게 홍범도 연구자 장세윤(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독립전쟁> 저자)의 주장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했다. 1984년 11월 초에 크즐오르다 묘역에 장군의 반신 동상이 세워졌고, 1989년 5월 26일 크즐오르다에 ‘홍범도 거리’가 명명되었다. 그것만으로 이국에 묻힌 노 독립투사의 한은 얼마간 위로를 받게 될는지.
2016. 10. 24. 낮달
* 글을 쓰면서 도움을 받는 백과사전의 내용은 난삽하거나 지나치게 간략하다. 이 글도 몇몇 백과사전과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독립전쟁>(장세윤)과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역사문제연구소) 등의 책을 참고하였다.
제76주년 광복절인 2021년 8월 15일 밤에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서거 78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2019년 카자흐스탄을 찾은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공식 요청했고, ‘봉오동 전투’ 100주년인 지난해 카자흐스탄으로부터 확답받았다. 장군의 유해는 8월 18일 오전 대전현충원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2023년 10월 25일
최근 여론조사에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 밖으로 옮기려는 데 대해 국민 63.7%가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KBS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천 명을 대상으로 지난 9월 25일부터 사흘간 전화 면접 조사-기사 바로가기)
그런데 결국 육사는 “특정 시기 및 단체 관련 중복 및 편향성에 대한 우려”를 명분으로 육사 충무관 내 ‘독립전쟁 영웅실’을 철거하고 ‘국난 극복 역사학습 공간’을 조성 중이다. 더는 붙일 말이 없다.
이로써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에서 드러난 매서운 주권자들의 비판 앞에서,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떤 비판에도 변명해선 안 된다”라고 했다는데 그것은 영락없는 ‘유체이탈’ 발언이었다.
대통령은 또 “민생 현장에 더 들어가 챙겨야 한다”라고 주문했고, 최근엔 “이념 논쟁을 멈추고, 오직 민생에만 집중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당부도 했다고 한다. ‘이념보다 민생’이라는 ‘말씀’이 무색할 지경이 되었다. [관련 기사 :홍범도 흉상·독립영웅실 철거 강행이 ‘민생·반성’인가]
국회 국방위원회가 육군본부·육군사관학교 등을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이 “육사에 홍 장군 흉상을 설치한 게 대적관을 흐린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박정환 육군 참모총장은 “그것도 일정 부분 대적관을 흐리게 만든 요인”이라면서 “육사는 광복 운동, 항일운동하는 학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관련 기사 : 육참총장 “홍범도 흉상, 대적관 흐리게 했다” 철거 논리 ‘황당’]
이게 이 나라 육군 수장의 수준이다. 정권에 따라 영혼 없이 군 당국이 또다시 정권의 입맛에 따라 코드를 맞춘 예로 기록될 만하다. ‘홍범도함’ 이름이 “공정하고 정당한 과정과 절차를 거쳤다”라며 함명 변경은 현재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밝힌 이종호 해군 참모총장의 답변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이유다. [관련 기사 : 해군 참모총장 “홍범도함 이름, 공정하고 정당한 과정 거쳐 제정”]
오늘(25일)은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 추모 및 청산리전투 전승 103주년 기념식이 대전현충원에서 열린다고 한다. 국가보훈부는 오늘 오전 11시부터 대전현충원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과 우원식 기념사업회 이사장, 독립유공자 유족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과 기념식이 거행된다고 한다.
'이 풍진 세상에 > 역사 공부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10) | 2024.10.29 |
---|---|
[오늘] 1979년 오늘-중앙정보부장은 절대권력의 심장을 쏘았다 (16) | 2024.10.25 |
[오늘] 레이테만 전투와 마쓰이(松井) 오장의 행방 (10) | 2024.10.23 |
[오늘] 국민총력전을 위한 친일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11) | 2024.10.22 |
[오늘] 청산리 전투, 큰 승리로 막을 올리다 (11) | 2024.10.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