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월 24일, 김좌진 장군 흉탄에 스러지다
1930년 새해를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활기차게 맞았다. 지난해 7월 김좌진의 신민부가 김종진, 이을규,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와 연대하여 결성한 재만한족총연합회(한족총련)가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월 하순 어느 날, 그는 중동선(中東線) 산시역 근처에 있던 한족총련 소속의 도정공장으로 나갔다. 중동선 일대의 한인들이 생산한 수만 석의 미곡을 도정하여 위탁 판매하는 과정에서 중국 상인들에게 농단 당하지 않게 설치한 정미소였다.
이 공장에서 김좌진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소속의 한인 박상실의 총에 맞는다. 1930년 1월 24일 오후 4시였다. 향년 41세. 1920년 항일무장투쟁사에 빛나는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 연합부대를 이끌었던 이 강골의 독립투사는 감기지 않은 눈을 감아야 했다.
김좌진, 흉탄에 스러지다
김좌진은 충남 홍성군 갈산면의 양반가의 3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호는 백야(白冶)다. 3살 때 부친을 여의었으나 집안이 넉넉하여 별 어려움 없이 모친의 훈도를 받으며 자랐다. 형 경진이 서울로 양자로 들어가게 되자 그가 장남 노릇을 했다. 그는 칠척 거구에 힘이 장사였을 뿐 아니라, 기상도 호방했다.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노비를 해방시키고 전답을 나누어 주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열여섯이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귀향, 호서지방을 밝게 한다는 뜻인 호명(湖明)학교를 설립하여 가산을 정리한 뒤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 자신의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 장학사업, 육영사업, 청년운동 등을 전개하다가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집안 친척에게 들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 6개월 간 복역했는데 복역 중 그는 백범 김구와도 만났다. 1913년 출감하면서 다음 시를 지었다.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志士)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박상진 등과 활동하다 1918년 시 ‘단장지통(斷腸之痛)’ 한 수를 남기고 만주로 망명해 대한 광복회 부사령을 맡았다. 1919년 대한 광복회가 와해되자 북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관련 글 :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
刀頭風動關山月(도두풍동관산월) 적막한 달밤에 칼머리 바람은 세찬데
劍末霜寒故國心(검말상한고국심)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 생각을 돋우누나.
三千槿域倭何事(삼천근역왜하사) 삼천리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不斷腥塵一掃尋(부단성진일소심)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 없구나.
1920년 10월, 일본군 동지대 부대는 화룡현 삼도구에 있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용정 지역으로 진군해 왔다. 일본군의 이동경로와 동정을 알아낸 독립군은 일본군이 아군을 쫓아 청산리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선발대를 기습하여 섬멸한 뒤, 매복하다가 추격대를 궤멸시켰다.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빛나는 청산리 대첩이다. 김좌진, 이범석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 등 주축으로 활약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는 10여 차례에 걸쳐 지린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지의 간도에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을 대파한 것이다. [관련 글 : 청산리 전투, 큰 승리로 막을 올리다]
만주독립군 연합부대의 ‘청산리 대첩’
청산리 대첩은 일제가 1920년 초부터 계획한 만주 내 한인 독립군 전체에 대한 초토화 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의 대승을 계기로 일본은 중국에 압력을 행사해 독립군들이 만주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압박하자 독립군들 일부는 러시아로 건너가는 등 만주 독립군은 해체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1920년 12월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 10여 개 단체가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로 취임했다. 김좌진은 러시아 스보보드니(이만, 자유시)으로 넘어갔다가 이듬해 러시아 붉은 군대가 대한독립군단의 군사들을 포위하여 1천여 명을 사살한 이른바 자유시 참변(흑하사변)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을 겸해 신민부를 창건한 김좌진은 독립군 양성에 전념하다가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고 1929년 한족총련의 주석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간에 갈등이 격화되었다.
자유시 참변 이후 반공 노선을 분명히 한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집안 아우뻘인 아나키스트 김종진을 통하여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게 된다. 김좌진의 신민부 군정파와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동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좌진은 1930년 1월 24일 산시역 근처의 도정공장에서 박상실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다. 공산주의 세력이 ‘김좌진 제거’라는 극단의 선택을 한 배경에는 아나키스트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한족총련이 일제와 공산주의 세력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세력 확장에 나서자 러시아 국경과 접해 있던 북만주 지역 공산주의 세력은 거세게 반발했고 그 결과가 극단적 암살로 나타났던 것이다.
김좌진은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겼다. 그의 장례는 한족총연합회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에 참석한 중국 사람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하였다고 한다. 한족총련에서는 범인을 색출해 암살을 시한 김봉환을 체포해 처형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지휘관이었으며, 김동삼, 오동진 등과 ‘3대 맹장’으로 불리었던 이 독립투사는 해방 조국을 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원통하게 눈을 감았다. 그의 유해는 3년 뒤 부인이 만주로 잠입해 수습하여 홍성에 밀장하였다가 1957년에, 전답을 노비들에게 나눠주면서 어머니의 이름으로 남겨둔 보령 선산에 안장되었다.
1947년 김좌진을 추모하는 추모회에서 백범 김구는 다음과 같이 추도했다.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우리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 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 다시 말해 봅시다.”
1962년 김좌진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74년 보령시에서 김좌진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그의 업적과 정신을 후세에 계승코자 매년 10월 22일에 추모 제향 행사가 열리고 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여러 교육사업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6. 1.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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